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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떠나는 기쁨만큼이나 따라다니는 난관도 많다. 기차 이동이 많은 유럽에서 만날 확률이 높은 '철도노조파업'은 여행객들을 종종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동할 수 없어 여정에 차질이 생기는데, 일정에 따라 미리 숙소예약이라도 해 놓은 상태라면 더없이 난감해진다.

지난, 여름 내가 일정에 없는 헤이그행 기차를 탔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벨기에 철도노조파업으로 브뤼셀행 기차 운행이 중단된 데다 버스는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였다.

이왕 짐을 싸고 이곳을 떠나기로 했는데 다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찍은 곳이 헤이그! 네델란드에서 암스테르담 다음으로 이름이 익숙해 이곳을 선택했다.

▲ 헤이그의 실내 쇼핑몰
ⓒ 조미영
헤이그역에 내려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벨기에행 버스를 알아보았으나 역시 좌석은 없다. 다음날 오전 버스편을 예매하고 하룻밤 묵을 숙소를 구하기 위해 역을 나섰다.

그런데 이곳 분위기는 여느 지역과 사뭇 다르다. 역 주변의 복잡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오간 데 없고 유리가 번득거리는 최신 고층빌딩과 잘 정돈된 미끈한 보도블록만이 싸늘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길이라도 물어보련만 인기척조차 없다. 무작정 걸어 이 블록을 한 바퀴 돌았지만 결국 숙소를 찾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역으로 돌아오는데 찌뿌드드하던 하늘은 끝내 비까지 흩뿌린다.

배낭에, 가방에, 우산까지 심히 불편한데 바지자락까지 끌리며 빗물을 잔득 머금어 발걸음에 무게를 얹어 놓는다. 결국 역 관광안내소 중계로 숙소를 구하고 여장을 풀었다.

▲ 콘크리트 건물의 딱딱함은 언제나 위협적이다!
ⓒ 조미영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닌 탓에 심신이 피곤했지만,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도시를 살펴보기로 하고 안내 책자를 펼쳤는데 내용은 달랑 반쪽!

"네덜란드 정부기관이 모인 행정중심지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이준 열사 묘소가 있다. 볼거리로는 미니어처 마을 마두로담이 있다."

이 정도로 요약 가능하다.

벌써, 오후를 훌쩍 넘긴 시간이라 멀리 갈 수는 없고 근처로 나갔다.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블록을 빠져나와 길을 건너니 상가가 보인다. 좁은 골목길과 오래된 건물들이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닮았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며 여유가 생긴다.

현대식 고층 건물들 사이에만 가면 경직되는 내 몸의 습성 탓이다. 그러나 이미 상가는 문 닫을 준비로 분주하고 빗줄기는 점점 굵어진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 듯싶다. 발걸음을 돌려 숙소 근처 슈퍼마켓으로 갔다.

초과된 호텔비용 때문에 간단한 요깃거리로 저녁을 해결할 생각이다. 유령도시처럼 썰렁하던 이 곳 거리가 깔끔한 정장차림의 사람들로 분주하다. 퇴근시간이 되어 건물을 빠져 나온 직장인들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여의도 같다. 순간 너무도 편안한 차림에 가방을 멘 내 모습이 건물유리에 투영되어 보였는데 이때처럼 어색한 느낌이 든 것도 처음이다.

▲ 건물 사이에 광장과 분수가 있어 다행이다.
ⓒ 조미영
다음날 일찍 잠에서 깼다. 창 밖을 내다보니 밤새 내리던 비가 멈추고 동틀 무렵의 부드러운 햇살이 거리를 감싸기 시작한다. 출출한 아침, 사과를 깨물며 동네 산책을 나섰다. 텅 빈 거리로 간간이 두세 명의 승객을 태운 트램이 지나고 거리청소를 하는 아저씨들이 골목을 쓸고 있다.

어제 갔던 상가골목을 가니 깔끔한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의 좁은 골목과 오래된 건물들, 진열대의 상품과 간판만 없다면 책으로 보던 과거 도시의 모습과 흡사하다.

▲ 옛 건물들이지만 최신 상품을 팔고 있다.
ⓒ 조미영
▲ 이 곳에 야간 조명이 켜지면 멋있을 것 같다.
ⓒ 조미영
점점 좁은 골목으로 들어설수록 흥미로웠다. 낮은 난간과 각양각색의 창문들이 나름대로 한껏 멋을 부린다. 비슷한 듯 다른 건물들과 거리풍경까지 다채롭다.

한참을 돌아 그 곳을 빠져 나오니 이번에는 버스가 지나는 도로 옆으로 풍경화 속 그림 한 귀퉁이가 뚝 잘려나오듯 생생한 자연이 펼쳐진다. 맑은 호수를 끼고 한쪽에는 쭉쭉 뻗은 나무들이 산책로를 이루고 한쪽에는 멋들어진 건물이 호수표면에 반사되어 빛난다. 이때 때맞춰 떠오르는 아침 해는 갤러리의 조명등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 호수옆 산책로에서 바라본 풍경. 나무를 기대고 서있는 것은 야외 조각품이다!
ⓒ 조미영
▲ 도심속 조그만 쉼터!
ⓒ 조미영
돌아오는 길 어제와 달리 숙소 근처의 표정 없는 건물들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유리건물들이 햇살을 받아 갖가지 색을 뒤집어 쓴 탓도 있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고층건물들 역시 각기 개성이 있다.

현대식 건물들 사이의 공간구성도 독특하다. 큰 건물을 돌아가면 광장이 있고, 미로 같은 골목도 있다. 풋풋한 자연의 맛은 느낄 수 없지만 그리 무표정한 거리만도 아니었다.

▲ 현대식 건물들 사이로 이런 아치가 설치되어 있다.
ⓒ 조미영
▲ 영화관. 이 곳도 상영작 대부분은 할리우드 영화다.
ⓒ 조미영
헤이그는 인간의 마음을 담아낸 듯한 도시 같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과거를 간직하며 만들어낸 거리와 안락함을 추구하며 현대식으로 만들어낸 거리가 공존한다. 추억과 미래를 동시에 부여잡은 느낌이다. 추구하는 것들을 뒤죽박죽 섞어 놓는 게 일반적이지만 잘 정리하여 구분해 놓은 모습이 깔끔하다. 그래서 점점 이 도시에 호감이 생긴다.

▲ 나그네의 목마름을 달래줄 것 같은…. 과거의 흔적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 조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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