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 돋는 소름에 설핏 정신을 차리는 순간, 시퍼런 하늘이 와락 나를 덮친다. 허우적거리며 눈을 떠 보면 어느새 하늘은 태평양 한가운데가 되어 잔잔한 구름조차 찾을 수 없다. 시린 눈을 비비고 다시 눈을 치켜 떠 보지만, 빨려 들어갈 듯 깊은 푸른 빛의 하늘뿐이다. 진짜로 바다에 빠진 착각이 일 정도로 가벼운 떨림을 느낀다. 온몸에 돋아난 소름과 한기를 기지개로 떨쳐내고 일어나 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내가 누워 있던 자리 위로는 이미 깊은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2003년 여름, 영국 런던.
이곳에 도착한 첫날, 간밤의 장시간 비행과 시차 때문에 나른해진 나는 민박에 여장을 풀고 동네 어귀 공원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그 후로도 여행 틈틈이 공원에서의 나의 뒹굴기는 버릇처럼 계속됐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듣는 첫 노래가 온종일 입속을 맴도는 그런 이치와 비슷한 경험이었다.
이날도 나는 하이드 파크에서 낮 시간 대부분을 보낸 터이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있을 즈음, 공원에는 꽤 많은 무리의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학생들도 보이고 직장인들도 보이고, 이내 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원반 던지기와 야구 연습 등을 한다. "벌써, 오후 5시를 넘었구나!" 일과를 마친 사람들의 여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유럽의 여름은 해가 길어 앞으로도 몇 시간은 이렇게 빛 좋은 햇살을 받으며 운동과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첫날 이후에도 계속 공원을 찾은 제일 큰 이유는 간단한 점심 해결을 위해서였다. 워낙 비싼 물가와 아직은 식당에서 혼자하는 식사가 여러모로 불편한 탓에 간단한 먹을 것을 사들고 공원을 찾았다. 점심 시간의 공원 풍경은 풍성했다. 나처럼 샌드위치를 사 와서 먹는 근처의 직장인들과 선탠 의자에 누워 일광욕을 하는 젊은이들, 책을 읽는 아주머니,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을 치는 학생들까지 다양한 점심 시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지조차 망설여져서 빙빙 돌다가 한적한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햇빛을 쫓아 자리를 옮겨 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줄곧 햇빛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그러니 항상 내가 원하는 자리의 선택폭이 그들보다 훨씬 넓은 편이었다. 나중에 배짱이 두둑해져서 늘어져라 낮잠까지 잘 정도가 되고 난 다음에는 가끔 그늘 위치가 바뀐 것도 모르고 내리쬐는 태양의 눈부심 아래서 깨어나기도 했다.
나른한 오후의 달콤한 낮잠이라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세운 대책이 선글라스를 끼고 자는 것이었다. 이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변 이들의 스스럼없는 애정 표현을 맞닥뜨리게 될 때에도 유용했다. 선글라스로 그들보다 더 당황해 하는 나를 감출 수 있었다. 나중엔 아무렇지도 않게 면역이 됐지만 말이다.
이렇게 시작한 공원에서 점심 먹기는 공원에서 놀기로 점차 바뀌어 갔다. 작년 여름 유럽은 유난히도 더워 아침, 저녁으로만 돌아다니고 점심에는 공원에서 보내는 날들이 많았다. 공원 잔디밭에 깔개를 펴고 자리를 잡고 앉아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시간들은 여행 중 최고의 휴식이었다. 제법 다양해진 점심 메뉴를 펼쳐 놓고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 여유도 생겨났다.
이때면 으레 신발을 벗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흘낏흘낏 쳐다 본다. 처음에는 동양인 여행객이라 쳐다보는 줄 알았는데 아마도 신발을 벗어 놓고 있어서 더욱 쳐다본 듯하다. 생각해 보니 유럽 사람들은 열차 여행을 하면서 침대칸에서도 신발을 벗지 않고 잠을 잤다.
여행 기간 내내 혹사 당하는 발이 답답한 신발에서 해방되는 그 시간들은 무척 중요하다. 신발이 작게 느껴질 정도로 퉁퉁 부어 있던 발이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고 나면 신발에 풍덩 빠지듯 쏙 들어가니 말이다.
주말에 공원에서 놀기는 더욱 재미있었다.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묘기나 동호인들의 연주회를 감상할 수 있고 놀러 나온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굳이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놀이 공원에 갈 필요가 없다. 나무와 잔디밭만 있는 공원에서도 충분히 만족스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시 한국, 2004년 가을.
볕이 좋은 가을이다. 귓볼에 닿는 바람의 느낌이 아직은 기분이 좋을 때다. "역시 우리 나라의 가을은 좋아!" 근처 공원에라도 나가 도시락을 까 먹고 싶은 충동에 잔디밭을 기웃거려 본다.
하지만 왠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 잔디밭 둘레로 담장을 두르듯 경계를 쳐 놓거나 단정하게 다듬어진 화초들이 주변 가득 들어서서는 끼어들 틈을 내주지 않는다. 넉넉한 품으로 맞이해 줄 나무 그늘은 더 더욱 찾을 수 없다. 누군가의 취향에 의해 깎고 손질되어진 관상용 나무 몇 그루가 있을 뿐이다.
그래도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요'라는 표지가 없음에 위안을 얻고 다시 한번 용기를 내 본다. 하지만, 영 불안하다. 관리 아저씨가 금세라도 쫓아 나와 호루라기를 불어댈 것만 같다. '역시 잔디는 그냥 구경만 해야 하나 보다!' 그나마 잔디밭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음에 위안을 하며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