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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천지 안. 남녘 관광객들이 북녘땅 백두산 천지로 내려가 보트를 타고 천지 위를 답사하고 있다. 천지엔 북녘 주민들이 풀어놓은 산천어들이 떼지어 살고 있다.
ⓒ 최성민
▲ 남녘 관광단에게 손 흔드는 북녘 주민들. '굶주려 죽는다'는 말과는 달리 백무고원엔 대홍단 감자농장 등 잘 개발된 삶터가 있어 뒤에 보이는 주택단지 등 주민들의 생활이 쪼달려 보이지는 않는다.
ⓒ 최성민
▲ 북녘 여성 안내원. 가벼운 화장만을 하고 매우 정제된 예절로 남녘 관광객을 안내했다. 관광지 주변의 토종 동식물에 대해 즉흥적인 질문을 해도 잠시 머뭇거릴 뿐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상세한 대답을 하는 것이 남녘 여느 관광 안내원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 최성민
백두산 관광단이 2000년 9월 22일 첫발을 디딘 평양 순안공항(오후 2시 5분)과 백두산 관문 삼지연공항(오후 4시 50분)은 남쪽이나 외국 공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온하고 적막하기까지 했다.

북쪽 남녀 공항 직원들은 이미 40여명의 남쪽 언론사 사장단 방북을 치렀기 때문인지 밝은 표정으로, 그러나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환대로 관광단을 맞았다. 북쪽 사람들의 어떤 결의와 함께 균형감이 곁들여진 이런 태도는 관광단 안내원이나 주민들의 말씨, 행동 등에서 일정 내내 일관되게 읽을 수 있었다.

관광단은 이튿날 새벽 4시 이번 일정의 최대 목적인 백두산 천지를 향했다. 숙소인 소백수초대소에서 천지까지는 차로(시속 30~40km) 1시간 20분 거리. 차 안에서는 "내가 생전에 우리땅으로 백두산을 오르게 될 줄은 몰랐다" "꿈인 것 같아요!" 등 흥분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북쪽 안내원들은 그 사이 백두산의 기후와 생태, 그리고 주변 마을들의 삶에 관해 친구 대하듯 설명해 주었다.

백두산 가는 길엔 여기가 우리 땅인가 눈을 의심케 하는 명물이 있다. 밀림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숲속도로가 그것이다. 차는 끝이 보이질 않는 '삼림욕길'을 핸들을 꺾지 않고 10분~20분씩 달린다. 20년~50년된 이깔나무(낙엽송의 일종, '잎을 간다'는 뜻으로 '잎갈나무'라 부른 데서 유래된 이름)가 쭉쭉 뻗어 올라 하늘을 가린 그 길 끄트머리 어딘가에 백두산은 지금쯤 흰 설봉으로 솟아 있을 것이다.

▲ 남녘 관광객들이 묵은 백두산 소백수초대원 숙소. 다른 시설은 호텔급으로 훌륭했으나 워낙 전기사정이 나빠서 화장실 형광등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1회용 치솔과 면도기 등도 1회를 채 쓰기가 어려워 북녘 생필품의 열악한 환경을 보여주었다.
ⓒ 최성민
청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공기 속에 담겨진 향긋한 송진냄새는 북쪽의 자연이 얼마나 잘 보존되어 있는지를 가늠케 하면서 남쪽 사람들에겐 꿈같은 부러움으로 다가온다. 북쪽 안내원의 설명이 곁들여진다.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께서는 21세기를 자연과 환경의 세기라고 말씀하시면서 넘쳐나는 묘향산의 금광까지도 자연보호를 내세워 파내지 못하게 하셨다."

식량난 속에서도 개간유혹을 물리치고 이 광활한 대지를 '숲의 낙원'으로 지켜내는 북쪽 사람들의 애씀에 감사의 목소리가 차 안에서 들린다.

▲ 갑무경비도로
ⓒ 최성민
이 도로는 '갑무경비도로'라 불린다. 삼지연에서 100m쯤 떨어져 직선으로 뻗어있는 연장 120km의 백두산 오름길로서, 일제가 국경경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1937년부터 1939년 5월 초까지 닦아놓은 갑산-무산 사이 군용도로였다.

"김일성 장군님께서는 일제의 도로 개통식 전날 말끔히 닦고 쓸어 개미 한 마리 얼씬 하지 않는 이 길을 대낮에 전사들을 거느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앞장서 걸으셨다"는 안내원의 설명엔 민족적 자부심이 맺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깔나무숲은 백두산 허리까지 이어진다. 숲과 그 윗쪽 황무지가 이어지는 경계지점에서 가끔 호랑이와 곰이 나타나 주민들에게 주의보가 내린다고 안내원이 귀띔해 준다.

▲ 갑무경비도로를 가는 북녘 주민. 교통사정이 어려워 북녘 주민들은 대부분 배낭을 메고 걸어다닌다. 곳곳에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구호가 '미제국주의'의 봉쇄속에 어렵게 자립경제를 꾸려가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었다.
ⓒ 최성민
황무지에 들어서면서 자동차는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워낙 거대한 산이기에 오름길은 완만하다. 그래서 차가 힘겨워하는 것은 '조종의 산' 백두의 위력에 저어해 하는 몸짓이라 생각하면 여정은 한껏 성스러워진다. 그 성스러움은 해가 돋을 무렵 절정에 이른다. 여명의 백두산은 무한대의 적막과 극치의 고독 세상이 되어 무서움으로 엄습해 온다.

그 별천지에서 사람들은 작고 텅 비워진 그릇이 되어 백두정기 담아가 전할 곳을 그리게 된다. 이날 백두산 오름에서는 날씨가 해돋이 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일행은 삭도를 타고 천지 물가로 내려가 '천지산천어' 죽으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북의 안내원 및 백두산 강사들과 어울려 천지 물이 마르도록 열내어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자주, 민주'를 불렀다.

▲ 삼지연에 있는 김일성 동상.
ⓒ 최성민
항일투쟁 '혁명 성지' 자부

이 땅 정기의 발원인 백두산은 남북 모든 이의 흠모의 정이 모이는 '한 마음의 시원'이기도 하다. 백두산에서 이 땅의 모든 산줄기들이 뻗어 내리고, 가장 큰 두 강이 비롯되어 동서로 굽이쳐 내린다. 그러나 남녘 사람들에게 백두산은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구절로 입에만 오르내리는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북녘 사람들에게 백두산은 '혁명의 성산'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의 불멸의 혁명사적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백두산 '혁명사적지'는 외부인들에게 가장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은 관광자원일 수 있다. 특히 남녘에서 온 동포들에게는 '항일구국 전적지'로서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북쪽 자료(일방적일 수 있음을 전제로)와 직접 둘러본 경험을 토대로 '김일성 항일유격'의 근간인 '백두산 밀영'(비밀 군영)을 소개한다.

▲ 백두밀영에 있는 고향집.김정일 위원장이 난 집이라고 한다.
ⓒ 최성민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광활한 수림에는 1930년대 후반에 '항일혁명 전략기지'가 꾸려졌는데, 이를 '백두산근거지'라 한다. 이 일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온 사람들이 많아서 주민들의 계급구성이 좋았고, 반일감정이 높았으며, 또한 자연지리적 조건도 매우 유리했다. 대수림지대와 험준한 산악으로 연결된 백두산 근거지는 적의 군사활동을 크게 제약하고 유격투쟁을 맹렬하게 벌여나갈 수 있었다. 또 백무고원, 개마고원, 낭림산 줄기를 따라 근거지를 넓히고 무장투쟁을 국내 깊이 확대 발전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 백두산 일대 항일밀영을 순례하는 인민군 병사들.
ⓒ 최성민
백두산 근거지에는 많은 밀영들이 꾸려졌으며, 그것들은 서로 연결망을 이루고 있었다. 밀영망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활동 기지로서 부대들의 훈련과 휴식으로부터 치료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조건들이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이 밀영망들에서 '혁명사령부'가 자리한 '백두산밀영'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김일성 수령은 여기에서 반일민족 통일전선운동을 확대하고 조선공산당창건준비사업을 추진했으며, 일제에 큰 군사정치적 타격을 준 보천보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는 게 북쪽의 설명이다.

이번 관광단은 보천보 전적지에서부터 부대가 도중에 휴식했다는 삼지연, 일제가 건설한 국경경비용 '갑무경비도로' 등을 답사했다. 이 가운데 백두산 소백수골에 있는 '백두산밀영'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탄생한 '고향집', 사령부귀틀집, 정일봉이 있으며, 각종 구호나무들도 있다. 백두산밀영 가까이에 있는 사자봉밀영은 정치공작원이나 지하조직 책임자들의 회합자리다. 이밖에 압록강안지구밀영 등 다수의 후방, 중간연락 밀영들이 있다. 북녘 젊은이들은 해마다 봄 가을에 걸쳐 이 '혁명사적지'를 행군 답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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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창간발의인, 문화부 기자, 여론매체부장, 논설위원 역임. 곡성 산절로야생다원 대표.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소장. 철학박사(서울대 교육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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