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매대의 아가씨는 나중에 올 사람들을 위하여 몇 권 남겨 두었다가 다섯 권 씩 나누어 파는 기지를 발휘하여 혼자서 물건을 다 사가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이 표본집은 그 제본이나 표지, 용지의 질이 떨어져 오히려 고서의 희귀본 같은 느낌을 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는 아주 소중한 모습으로 만병초, 백두산 들쭉, 담자리꽃, 두메아편꽃, 비료용담, 물싸리, 좀참꽃, 바람꽃 등 이름조차 예쁜 꽃들이 아주 바스라지기 일보 직전의 모습으로 있었다.
실제로 어느 부분은 이미 조금 으스러지고 있어서 여간 조심스럽게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이 꽃들을 따서 모으고 말리고 여기에 붙였을 어느 소녀의 손을 생각했다. 마치 나의 누이가 가발공장에서 밤잠을 빼앗겨 가며 만든 가발을 생각한 것은 너무 지나친 상상력의 발동이었을까?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아주 천천히 표본집의 책장을 넘기곤 하였다.
또 한 가지 인기를 끈 것은 호텔의 현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 조선 화가들의 그림이었다. 수묵화와 유화가 있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마침 내가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있을 때 신세훈 이사장이 백두산 천지 전경을 독특한 시각으로 잡아서 그린 수묵화 한 점을 놓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었다. 문외한인 내 눈에도 확 들어오는 그림이어서 내가 옆에 가서 거들었다.
"이 분이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님이신데 아마 이 그림을 파시면 아주 영광스런 일이 될 것이니 잘해서 파십시다."
결국 작가는 이 말에 고무되어서 인지 백 유로를 부르던 값을 거두고 그만 60유로에 팔고 말았으니 내가 너무 깎도록 유도한 것은 아닌가 해서 미안했다. 대신 나는 그의 그림(최명식 화가)을 한 점 골라서 사주기로 하고 그림을 보았다. 알고 보니 신 이사장이 고른 그림은 1급 작가의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조선의 화가들은 작품과 경력이나 수상 등의 이력에 따라 1급에서 5급까지의 단계를 두고 있어서 그림의 값도 그 등급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최명식 화가의 그림 중에서 나는 '눈 내리는 백두산' 이라는 제호가 붙은 아주 검은 색이 주류를 이루는 천지의 눈 내리는 밤풍경의 그림을 한 점 구입했다.
필시 집에 이것을 들고 가면 비구상의 강한 색상이 주류를 이루는 그림을 그리는 아내의 꾸지람 들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었다. 이 그림은 신 이사장의 것보다 커서인지 처음에 120유로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팔짱을 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더니 최 화백은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작가 선생, 시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듯이 이 그림도 값을 부르는 것은 참 어려운 일 이단 말입니다. 그러니 꼭 사갈 수 있는 가격을 말해 주시면 내가 알아서 드리도록 하갔으니 말씀을 해 보시란 말입니다."
나는 물건 흥정을 잘 하는 편은 못되는 사람임에도 그날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박하게 값을 깎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결국 60유로에 나도 백두산을 살 수 있었다. 최 화백은 내가 신 이사장에게 그림을 팔 때 옆에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특별히 싸게 주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흥정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값을 깎고도 맘이 편치 않았던 것은 왜일까? 꽤 오랫동안 나는 맘이 짠했다.
저녁 식사 시간 때까지 자투리 시간을 보내는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들은 현관에 놓인 테이블을 차지하고 술판을 벌인 황석영 선생과 고은 선생 일당들이었다. 역시 '황구라'라는 별명이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소재는 '김하기 음주 침략 사건' 으로 아마도 절정에 이른 듯했다.
"그 때 내가 감옥에 있었는데 어느 날 교도관이 날 부르더니 김하기를 아느냐고 하더란 말이야 그래서 소설 쓰는 작가라고 대답했더니 아 글쎄 김하기가 압록강을 건너서 월북을 했다면서 내가 김하기를 북에 파견한 거 아니냐고 하는 거야 미치겠드만 그래서 난 얼떨결에 아무 상관도 없는데 김하기 때문에 면회정지 한 달 먹었대니까 아까 북쪽 사람들 하고도 이 사건을 얘기했는데 내가 김하기 월북사건 이랬더니 북쪽 사람들이 단순히 월북이 아니라 음주 침략이라구 해서 배꼽을 잡았어!"
문단에서 김하기 월북 사건은 참으로 전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완전한 만남'으로 인기가 있었던 김하기 소설가가 어느 날 갑자기 월북을 했다니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뒤집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여러 가지 이설이 있고 또 이야기가 재구성되어 아직도 원고료를 받으러 갔느니 여자를 따라 갔느니 하는 지방판본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날 다행히 김하기는 내 옆자리에서 식사를 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본인은 많은 고초도 겪고 수많은 질문과 의심을 받았다고 전제하면서 만나는 이마다 이 사건을 질문해서 본인도 말하기 싫은데 하도 억측이 난무하니 그 진상을 밝히는 것이라 하면서 그 대강을 말해 주었다.
이글에서 들은 대로 다 적을 수는 없는 사정이고 그는 중국 쪽에서 술을 마신 후 정말로 만취상태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압록강 물을 헤엄 쳐서 건너 가다가 나중에는 거의 휩쓸려 떠내려갔는데 다행히 강 건너에 죽지 않고 도착했던 것이다. 다행히 보름 만에 아무 불순한 의도도 없고 본인의 강력한 귀환 의사에 따라 그는 중국으로 추방되는 형식을 거쳐 국내로 돌아왔다.
정말 그는 술 때문에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그가 동아대학교의 운동권 출신이고 아주 진보적 견지에서 쓴 소설까지 있는 터라 의심은 더해지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북의 감옥에서 15개월을 보내고서야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 후로 김하기는 술을 끊었다고 하면서 건배를 해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시인 신형식은 횡성군이란 글씨가 박힌 모자를 쓰고 다녀서 시선을 끌었는데 알고 보니 방북을 앞두고 가진 작가회의 예비교육 시간에 북에 갈 때는 영어가 적힌 옷이나 모자를 쓰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리 집을 뒤져봐도 영어가 안 적힌 게 없어서 그 모자를 쓰고 왔다하여 한차례 웃었다. 그런데 그 옆의 아는 이가 그 모자는 검도선수인 아들이 쓰던 것이고 그 아들이 횡성군 대표로 대회에 나갔으니까 결국은 아들 자랑하려고 한 것이니 그 모자를 쓰면 일거양득 아니냐고 부연 설명을 붙여 주었다. 그래서 신 시인은 아예 횡성군이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김하기 소설가와 신형식 시인을 찾아내어 베개봉 호텔 입구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화가 크게 그려진 곳으로 불러 사진을 한 방 찍자고 청했는데 김하기는 나에게 이 사진을 어디에다 쓸 것인 모양인데 이 배경이 들어가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호텔 간판이 잘 나오는 밖으로 나와서 사진을 박았다. 나는 속으로 김하기가 월북사건의 후유증을 아직도 가지고 있나보다 하는 생각을 언뜻 해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여러 가지 행동도 상당히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보였다. 아, 웃지 못 할 분단조국의 초상이여!
내일은 새벽 2시에 일어나 백두산에 오르는 날이어서 모두들 저녁을 먹고는 일찍 잠을 청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조는 오인태 조장과 김성수 교수 그리고 김인숙씨 등이 차나 한 잔 하자고 하여 청량음료 매대로 갔다. 그곳은 차와 음료 그리고 술을 갖추어 놓고 파는 일종의 바 형식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아까 식당에서 아주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며 시중을 드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접대원이 매대에 와 있어서 나이를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에둘러 말했다.
"유치원 2년, 소학교 4년, 중학교 6년, 전문학교 3년, 그리고 여기서 7년 째 일하고 있으니 나이를 알아맞혀 보십시오."
그렇다면 대강 계산해도 스물일곱은 되었다는 말인데 우리 일행 모두가 '와!' 하면서 아직 십대인 줄로 알았다 하니 김윤희라는 이름표를 단 그녀는 보조개를 내며 웃었다. 그녀는 정말 듣고 보니 나이 값을 잘 하는 최고의 접대원이었다. 아주 능숙하고 부드러우며 단정한 모습을 끝까지 보이며 매대를 지켰다. 김성수 교수는 본인이 북한 청소년들의 의식구조에 대해 조사할 것이 있으니 묻는 말에 대답해 달라고 하였고 그녀는 아주 재미있고 구체적으로 잘 대답해 주었다.
그중에는 이성친구에 관한 질문이 있었는데 어느 곳에서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정도의 교제는 비슷한 모양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모두 내일 새벽에 올라갈 백두산의 일출에 대해서 그녀에게 묻자 그녀는 또 이렇게 답하는 것이 아닌가?
"백두산 일출은 보러 올라가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안합니까? 마음이 착한 사람이 올라가면 틀림없이 좋은 일출을 보여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가면 볼 수 없습니다. 아마 작가 선생님들이 이렇게 어렵게 오셨으니 내일 백두산은 활짝 개갔습니다. 지난번에는 정신문화 연구원장님이 오셨드랬는데 그분 말씀이 '야, 이거 중국으로만 다니다가 내 땅을 밟고 백두산에 올라가게 되니 눈물이 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황지우 시인과 임우기 시인 등이 더 와서 맥주를 시켰고 우리는 김윤희 접대원이 들려준 '곡절 많은 운명' 이라는 조선에서의 최고 인기작 영화 이야기를 거의 다 듣고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주인공 송명수와 일본인 애인 마사꼬가 겪는 우여곡절 많은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가끔 옆자리의 주문 때문에 이야기가 끊겼지만 김 접대원은 끝날 때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나중에 김성수 교수는 평양에 와서 '곡절 많은 운명' 비디오테이프를 연구목적으로 한 질 구입하고 말았다. 김인숙 소설가는 김 접대원에게 '애인은 잘생겼어요'라고 물었다.
"고럼 애인이 못생긴 사람도 있습니까?"
이렇게 늘 넘치는 입담으로 좌중을 재미있게 해주는 재주가 그녀에게 있었다. 이야기 중에 백두산엔 겨울에 눈이 키만큼 온다는 말에 내가 농담으로 '고럼 눈이 180센티나 온단 말입니까?' 했더니 키가 작은 김윤희 동무는 '아닙니다. 160센티 정도 옵니다'하면서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다들 손뼉을 치며 웃었다. 구석에 앉아 말없이 맥주잔만 뒤집던 황지우 시인이 '여기도 바람피운다는 말 있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킥킥 웃다가 '예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의 말을 많이 따릅니다'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김윤희 접대원의 애인은 평양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데 내년 봄에 결혼을 할 것이라고 하길에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고럼 내년에 평양에서 봅세다'하니 그녀도 '또 오십시오' 하였다. 다음날 백두산으로 떠나기 전 사진을 한 장 찍으려고 그녀를 찾으니 우리들 짐을 챙겨주느라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중에도 활짝 웃으며 옆에 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