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새벽 행사를 끝내고 내려오는 길에 바람이 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나는 한국에서 참가한 최고령자인 이기형 선생님을 부축해서 내려왔다.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정상에서 약 두 시간 가까이 바람을 맞서가며 진행된 행사여서 나이가 드신 작가들에게는 힘든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남정현 선생님은 고문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터라 간신히 행사만 참석하시고 버스에서 기다리고 계셨는데도 힘들어 하셨다. 남 선생님은 나중에 베개봉 호텔에 돌아오셔서 링거 주사를 맞고 휴식을 취하신 후에야 순안행 비행기에 오르실 수 있었다.
6시 40분부터 하산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날은 아침인데도 대낮 같았다. 우리가 일찍 일어나 움직인 것을 생각하면 벌써 네 시간이 넘게 지났으니 그럴 것도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아침 식사 전이었고 감동과 격정에서 평상심으로 돌아온 터라 졸음과 시장기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바람에 다들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버스는 어둠 속을 헤쳐 온 반대로 환한 아침 길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길 양 옆은 밤보다 훨씬 잘 보였고 쏟아지는 햇살로 눈부셨다. 나도 졸음으로 눈꺼풀이 천근같았지만 다시 보기 힘든 이 장관의 경치를 놓칠세라 차마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 차 안내원 중에는 고은혜 여성 동무가 있었는데 키가 크고 몸집도 튼실한 여장부감이었다. 그녀는 김일성 종합대학 동양어문학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민화협에 재직한다고 하니 출신성분과 능력이 고루 뛰어난, 조선에서는 보기 드문 인재임이 틀림이 없다. 그녀는 대화도 화통하고 씩씩해 보여서 여러 사람들이 말을 걸고 농담도 하였는데 구김살없이 잘 받아 주었다.
그녀는 창규형이나 김영현 형과도 벌써 친해져서 백두산 가는 길에 창규형은 자기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라며 CD를 한 장 건네기도 하였다. 다들 멍하니 정신이 없는지 아무 말이 없자 그녀가 김영현 형에게 왜 말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백두산 천지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와서 그럽니다."
7시 50분경 베개봉 호텔로 돌아와보니 바로 아침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역시 산중이라 곰취나물과 된장찌개로 아침을 먹고 나니 그만 잠이 쏟아졌다. 1진이 먼저 비행기를 타고 가야했는데 평양의 안개 때문에 아직 출발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소식이 전해져 기내에서 도시락으로 먹어야 할 곽밥을 식당에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1조는 식사를 하고 대기하였고 2조인 우리들은 객실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전기가 나가버리는 바람에 지하수를 쓰는 호텔에 물이 끊어져서 세수는커녕 양치질도 못하고 누워 있으려니 백두산 천지가 눈에 어른거려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보니 1진은 이미 평양으로 향했고 우리 2진은 대기념비 및 삼지연 관람을 위해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사실 대기념비 관람에 대해서는 서울에서부터 시시비비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이곳의 관람(조선의 표현은 참배라고 해야 옳다)을 필수 조건으로 요청했을 뿐 아니라 은근히 헌화나 동참 정도까지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으로서는 곤란한 일이라고 전달했고 결국은 현장에는 가되 김일성 주석 동상은 그냥 지나친다는 것으로 남과 북이 합의를 본 상태였다.
아직 우리 현실에서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다. 이번에 서울에서 열렸던 8·15 광복 60주년 축전에 조선의 대표단이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보수 단체들이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현충원을 참배하는 것은 순국선열에 대한 모독이다' 라면 거칠게 항의하였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잘못된 생각은 아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반공전선에 나서 이 나라를 지켰고 그 결과로 남쪽만이라도 민주국가를 세웠다고 자부하는 분들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북은 어떤가? '1948년 김일성 주석의 주도 하에 열린 남북연석회의를 거부하고 남쪽에만 친미세력들이 국가를 세웠으니 남은 미 제국주의의 치하에 있다. 그래서 민족을 구하기 위해 민족해방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아직도 미국 때문에 조선은 반쪽이다'라는 생각이 그네들의 굳은 신념이다.
한국의 상황만 보더라도 아직 법적으로는 북은 우리가 통일해야 할 대상이고, 우리의 영토요,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적인 것이다. 그래서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헌법상 우리의 국토로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정서에는 법으로 되어 있는 것들이 현실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국제적으로도 우리는 각각 독립된 나라로 유엔에 가입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적인 활동을 서로 인정해오고 있는데 어찌 북이 우리 땅이고 남이 자기네 국가란 말인가?
북의 인민들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서울에는 거지들이 북적대고 배고파 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니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러냈고 자기들보다 훨씬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며 쌀과 비료를 얻어다 쓰는 형편이라는 것도 안다.
남의 국민들도 더 많은 것을 안다. 북에도 우리와 같은 민족들이 어렵게 살고 있으며 전쟁이 아닌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합해져야 하며 그것을 위해 경제력이 앞선 남쪽이 돕는 것이 옳다는 것도 동감하고 있다.
사람끼리도 한 때 싸운 적이 있을 경우 대개 쌍방과실이 있게 마련인 것인데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잘잘못을 꼬치꼬치 캐묻고 따진다고 될 일이 아니다. 서로 싸움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던 부분에 대해 오해와 잘못된 것에 대한 사과를 통해서만 화해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북에서 국립 현충원을 참배하겠다는데 그것을 막을 필요가 있을까? 혹자들은 말한다. '한두 번 속느냐? 북에 가서 김일성 동상에 참배하라면 어쩔 것이냐? 다 속셈이 있는 작전이다.' 이 문제의 속을 들여다보려면 좌우익이라 불리는 우리의 진보와 보수에 관해 조금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의 글을 한 번 보자.(<씨네21>, 517쪽, 2005. 8.23)
"북쪽 방문단의 현충원 참배가 있던 날, 한 사내가 북쪽 대표단에 물병을 집어던지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을 보았다. 그런가 하면 인공기를 불태우려는 우익 시위대를 경찰은 소화기를 난사해가며 진압했다고 한다. 원천봉쇄와 강경진압은 운동권만 당하는 줄 알았더니, 이제는 대한민국을 전세 낸 우익들이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게 많던 우익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중략)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을 이끄는 이들은 과거에 운동을 했다가 '전향' 한 분들이라고 한다. 이들의 변신을 보면서 안쓰러운 생각도 든다. '좌익이냐 우익이냐'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이다. 문제는 좌익을 하든 우익을 하든 그 짓을 극단적으로 하는 것이다. 정작 반성할 것은 극단성인데, 이들은 그 극단성을 그대로 갖고 좌에서 우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중략)
남북의 화해 무드가 급물살을 타자 올드라이트와 뉴라이트가 다시 뭉쳤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올드라이트는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물병을 투척하고 인공기를 불태운다. 80년대 운동권으로 가투를 좀 해봐서, 그 절박한 심정, 이해가 간다. 이들의 코미디를 뉴라이트가 말로 거든다. 북한 인권을 외면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통일이 되면 민족의 법정에 서게 될 것" 이라나? (중략)
"인권 좋아하시네" 라고 했던 박통의 철학을 추종하는 올드라이트와 뉴라이트, 소리 높여 외치기를 '인권은 체제를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 란다. "
나는 물론 진보와 보수를 끌어내어 싸움시키려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보수와 진보의 글을 논하지는 않겠다. 다만 위에 인용한 글을 통하여 현재 우리 시대의 보수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부디 오해 없으시길….
나는 단언한다. 그러면 통일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북과 친밀하게 지내지 않으면서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가? 북이 굶어 죽든지 미국과 전쟁을 해서 박살이 나든지 우리가 문을 닫아걸고 못 본 채 못 들은 척 하고 살자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러나 지금 한반도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북이 무너지면 그들만이 죽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미국이 북을 무력 침공한다면 중국은 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래서 미국과 중국이 협상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그러나 그 결과는 볼 것도 없이 모두 우리가 바라는 답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과 러시아는 팔짱만 끼고 그냥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다시 백 년 전이 생각난다. 다시는 돌이키기 싫은 우리의 아픈 역사가 아니었는가?
삼지연의 대기념비는 조선이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운동의 과정과 성과를 기념하기 위하여 밀영 근처에 무장항쟁의 과정을 조각하고 그 가운데 김일성 주석의 어마어마하게 큰 동상을 세워놓은 광장으로 삼지연 호수 앞에 있다.
조선작가동맹 회원들과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광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 대표단은 미리 교육을 통하여 약속한 대로 김 주석의 동상을 비껴서 지나갔고 북의 사람들은 김 주석 동상 앞에 헌화하였다. 서울에 돌아와 카메라를 검색해 보면서 나는 실소를 금할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얼마나 그 상황에서 긴장을 하였는지 김일성 주석의 동상은 물론 그 주위의 조각상 하나에도 렌즈를 들이대지 못하고 온 것이었으니 내 머리 속에는 아직도 박통에게 교육받은 멸공의 뿌리가 적지 않게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헌화를 마친 북 대표단과 우리는 어색하게 다시 만나 조각상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광장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안내원은 그 상황이 조금은 굳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항일투쟁 당시 고향을 그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사향가(思鄕歌)" 를 한 시인의 요청에 따라 직접 들려주는 열성을 보였다.
우리는 그녀의 노래에 박수를 보냈고 금세 분위기는 활기를 되찾았으니 참으로 그녀의 임기응변이 놀라웠다. 그녀는 백두산의 용암이 폭발할 때 생겼다는 못 삼형제의 전설과 주위에 사는 식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물 속에 살고 있다는 버들치와 동개 등 여덟 가지 물고기까지 일일이 가르쳐 주었다.
광장을 거의 다 돌아 나왔을 무렵 나는 송기숙 선생과 임헌영 선생이 가까이 걸으며 무슨 말씀인가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울컥했다. 그들이야말로 독재정권의 정권연장 방편이나 주도권 획득을 위한 획책의 수단에 의해 사상을 의심받고 고문을 당했으며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이들이 아닌가?
하물며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은 또 얼마인가, 나는 광장의 끄트머리에 서서 두 분의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의 무서운 변화를 돌이키며 많은 생각이 뒤엉키는 것을 실감했다. 과연 두 분은 지금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