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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동포의 백두산 관광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더니 일정이 다시 불투명해지고 있다. 북쪽이 현대아산의 김윤규 전 회장 징계에 항의해 금강산 관광객수를 줄이는 조치를 취하면서 냉각분위기가 돌고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9월 하순이면 눈이 내려 이듬해 5월까지는 일반인의 입산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50년을 기다린 일인데 몇 달을 못 참으랴, 백두산은 즉흥적이거나 선정적 접근보다는 한민족의 정신적 시원을 찾아간다는 마음가짐으로 한껏 경건하고 진득한 걸음으로 다가가 볼 일이다.

▲ 해맑은 가을하늘 아래로 백두산 가는 길이 훤히 열려있다.
ⓒ 최성민
당시 백두산 관광객들은 각계 각층에서 선정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한국관광협회 중앙회가 중심이 되어 선정작업을 한 모양인데, 각 시도 관광협회 대표, 여행사 사장단, 국회 문화관광위 3당 간사, 학계, 올림픽금메달리스트 및 유명 등산가 등 체육계, 그리고 6명의 여행 취재기자 등이었다. 기자들은 문광부에서 20여명의 출입기자(관광여행담당)들을 상대로 제비뽑기를 했다.

▲ 백두산 천지 근처 넓은 뜰에서 통일만세를 부르는 남북 동포들
ⓒ 최성민
관광단이 다양한 인원으로 이루어진 성격 때문에 현지에서 이념과 관계된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나는 국회 문광위(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간사들이 백두산만 돌아보는 일정에 항의하여 ‘단식투쟁’을 한 것이다. 그들은 백두산 일정을 단축하고 평양관광을 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특히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 밀영 답사 위주로 짜인 일정에 항의했다. 국회의원들의 단식은 동행한 기자단과 갈등을 일으켰다.

▲ 천지 안 광장에 발빠른(?) 한 아낙네가 포장마차를 열고 커피 등 음료수를 팔고 있다. 가격은 모두 1달러.
ⓒ 최성민
기자들은, 50년만에 온 백두산, 일생에 오기 어려운 곳에 와서, 특히 좀 과장은 있을지 모르지만 남쪽에선 갖지 못한 항일투쟁 유적지를 돌아보는 ‘역사 체험’을 중간에 그만두자는 데에 동의하지 않았다. 평양이야 이제 오기가 한결 수월해졌고 이번 관광사업의 명칭이 ‘백두-한라 교차 관광’이므로 백두산 일정으로 채우는 게 정상이라는 것이었다.

기자들은 국회의원들의 ‘백두밀영 답사 거부 투쟁’을 ‘정치 쇼’로 보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관광도중 한나라당 간사 남경필 의원은 두만강변 곤장덕이라는 곳에서 TV 카메라를향해 “대한민국만세”를 불러 애국심(?)을 발휘했는데, 북쪽의 항의로 일정이 30여분간 지연되기도 했다.

▲ 천지 안에 있는 관리사(천지 산천어 양식 등 관리).
ⓒ 최성민
북쪽은 남쪽 국회의원들의 투쟁에 숙소와 교통편의 어려움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 평양까지는 비행기로 가더라도 평양에서 묘향산이나 단군릉 등 평양 주변 관광지로 다닐 버스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 백두산에 와 있는 버스들이 얼마전 남쪽 언론사 사장단 실어나른 버스로 북쪽의 최고급 관광버스를 거의 동원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버스들이 평양에서 백두산까지 오는 데 3박4일이 걸렸으니 다시 평양까지 돌아가 남쪽 관광객을 실어나르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마침 당시가 노동당 창당 기념일과 겹쳐 행사준비와 전국에서 올라오는 대표들로 숙소가 차 있다는 것이었다.

▲ 백두산 천지 삭도(케블카). 노약자를 위해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 바닥까지 삭도가 놓여 있다. 물론 계단도 있다.
ⓒ 최성민

ⓒ 최성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쪽은 남쪽 관광단 일부의 백두밀영 관광 거부 주장을 받아들여 반이나 남은 일정의 방향을 평양쪽으로 바꾸어 주었다. 남쪽 사람들의 막연한 짐작이나 선입견과는 달리 북쪽 사람들이 얼마나 유연하고 상대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는가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평양 순안공항에 내려 30분 가량 고속도로를 달려 묘향산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묘향산호텔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평양 주변 시골의 모습을 잘 볼 수가 있었다. 고속도로는 거의 차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적했다. 도로 곁으로 큰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강가엔 낚시질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특히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눈에 띄는 게 있었는데 강물 물살이 센 물목 곳곳에 커다란 몇 겹의 수차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북쪽 안내원은 강물 수차를 이용해 전기를 발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들판엔 남쪽에 비해 갸름한 모습으로나마(아마 비료가 부족해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곡식이 익어가고 있었고 들녘 사잇길로 소수레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 미리에 들짐을 이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 북쪽 사람들이 남쪽 관광객들을 위해 백두산 소백수 초대소 이깔나무 숲에서 통감자구이 등으로 전통음식 잔치를 열어 주었다.
ⓒ 최성민
후반기 일정에서 인상적인 것은 묘향산에 있는 국제친선교류관이었다. 각각 지하층을 위주로 두 건물을 지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외국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고스란히 보관 전시해 놓은 곳이다. 임기가 끝나면 임기 중 받은 대부분의 선물 챙겨가기에 바쁜 남쪽 대통령들과 비교됨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입구는 한식 기와집으로 되어 있고 묘향산의 외관을 훼손하지 않도록 건물의 대부분은 지하로 앉혔다. 한 층의 높이는 10미터이다. 놀라운 것은 건물의 규모, 전시품의 양, 가치였다. 한 사람이 한 전시품을 1분씩 보고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두 곳의 전시관 중 한 곳을 보는데만 8일이 걸린다고 한다.

전시품은 중국,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으로부터 온 것들도 있지만 캄보디아, 쿠바, 중동과 아프리카의 여러나라 등 제3세계로부터 온 것들이 많았다. 제3세계 국가들이 북쪽의 인민과 지도자에 대한 인정과 존경을 나타내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조선관도 있는데 최근에 현대가 김정일 위원장에게 준 그랜져 등이 다 거기에 가 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본 내 기억으로는 북녘 국제친선교류관이 규모에 있어서 루브르에 뒤지지 않고, 루브르가 그리스와 이집트 등지에서 약탈해 온 골동품 위주라면 국제친선교류관은 외국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이뤄진 최고 고가의 귀중품들이라는 것이다.

▲ 단군릉 안 단군 부부의 관. 평양 가까이에 있는데 능 안은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으나 북녘 안내원의 묵인하에 찍은 것으로 아직 별로 공개된 일이 없는 장면이다.
ⓒ 최성민
국제친선교류관 김일성관에 김일성방이 있다. 그 방엔 중국이 선물한 김일성 주석의 밀랍상이 실물처럼 서 있는데, 앞을 향해 한 손을 반 쯤 들고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다. 방 앞엔 북쪽 인민들이 줄서서 관람을 기다리고 있고 방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훔치고 있다. 남쪽 관광객들은 안내원을 따라 특순으로 그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안내원이 간략한 설명과 함께 그 방을 구경시켜 주는데는 채 2~3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국회의원들의 단식투쟁을 겪은 경험에서 남쪽 사람들로부터 ‘돌출행동’이 나오지 않을까를 걱정했을 것으로 짐작됐다.

▲ 백두산 삼지연에 있는 동상.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이름이 '천리마 나팔수상'이라던가? 인민의 일체감과 단결, 약진을 상징하고 있다.
ⓒ 최성민
마지막날은 단군릉에 갔다. 평양에서 40분쯤 거리에 있다. 단군 유골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북쪽이 민족사의 정통성과 민족적 자존심 확립을 위해 조성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관광(구경)거리임에는 분명하다. 단군릉 직전에 소변을 위해 차가 멈췄다.

그런데 남쪽 관관객중 유도금메달리스트 한 사람이 버스 앞에서 노상방료를 했다. 버스 안에는 북쪽 여성 간호사를 포함해서 북쪽 안내원 4명이 있었다. 그들은 물론 나머지 남쪽 사람들이 민망해서 차에서 쉽게 내리질 못했다. 그 메달리스트는 며칠 전에도 북쪽 안내원들이 보는 앞에서 무슨 불만을 나타내며 동행한 등산가와 함께 ㄷ대학 ㅎ교수를 상대로 ‘막말’ 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

이렇듯 백두산 관광은 주마간산하는 금강산 관광과는 다른 면이 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는 데에 남북 양쪽이 이론이 없다. 거기에 더해 북쪽으로서는 백두산이 항일투쟁의 성스러운 산이자 항일투쟁기에 김정일 위원장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백두산엔 남쪽이 갖지 못한 생생한 항일투쟁 흔적이 있어서 좋은 의미에서 역사적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반공 수구기득권자들에겐 심각한 거부감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당시 일정에서 국회 문공위 3당 간사들의 단식투쟁, 남경필 의원의 곤장덕 대한민국만세 , 한 금메달리스트의 단군릉앞 노상방료 등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백두산(북한) 관광의 특수성에 대한 상징물로 보인다.

난생 처음의 백두산관광에서 느낀 점은 북녘 사람들이 손님을 매우 정중한 예절로 대한다는 것, 그들의 행동양식이 인륜과 신의를 원칙으로 하고 자존심을 중히 여긴다는 것, 그리하여 남쪽에서는 구태의연하게 들리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북녘에서는 지금도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북녘은 전력과 에너지가 매우 부족하고 따라서 생필품 수준이 조악하여 남쪽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 모든 기초적인 생필품의 초보적 단계-이는 또한 남쪽 공산품의 무궁무진한 시장이라는 것, 따라서 남쪽의 자본과 기술, 북쪽의 노동력과 시장이 환상의 앙상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주변 환경은 물론 북녘은 적화통일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 금강산 관광 들머리 장전항. 백두산 관광은, 이곳으로 들어가 철조망길을 지나 산만 구경하고 오는 금강산 관광과는 달라야 한다.
ⓒ 최성민
남북이 관광을 비롯한 각 분야의 교류의 폭을 넓혀 휴전선을 허물고 나아가서는 중국 몽골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까지 달려가는 날이 오면 한반도의 나머지 반쪽 ‘섬’에 살던 우리의 시야와 심성의 옹졸함이 벗겨질 것이 분명하다. 항일 자립으로 가난하지만 민족적 정기를 내세우는 북녘과, 친일파 득세와 미국식 자본주의로 민족 정기에서 뒤지고 물질에서 앞서는 남쪽이 교류하면서 정신적 원칙(이념이 아닌, 인륜, 신의, 민족정기와 자존심 등에 무게를 두는)과 물질의 장점을 보완적으로 나누는 마당이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단 백두산 관광이 천지에 가서 점심만 먹고 오는 주마간산이 아닌, 먹고 자고 만나고 보듬어보고 오는 일정이 되는 것에서 이런 일이 출발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최성민 기자는 지난 2000년 9월 22일부터 6박 7일동안 '백두-한라 교차관광 사업' 취재기자단의 일원으로 백두산을 방문한 바 있습니다. 이 기사는 최근 백두산 관광사업 발표에 맞춰 당시 상황과 감흥을 전달하기 위해 최 기자가 작성한 연속 기사의 마지막 4회이며 기사에 사용된 사진은 2000년 당시에 촬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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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창간발의인, 문화부 기자, 여론매체부장, 논설위원 역임. 곡성 산절로야생다원 대표.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소장. 철학박사(서울대 교육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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