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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예술이면서 산업입니다. ‘스크린쿼터제’를 둘러싼 딜레마는 여기서 싹틉니다. 문화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가 팽팽하게 맞서게 됩니다. 서로 전혀 다른 사유체계를 다져온 두 축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습니다.

여기에 분위기를 깨며 나타나는 것이 법 논리입니다. 한국영화 의무상영제가 법률로 규정되어 있고, 이 조항의 위헌 여부가 다투어지는 상황이라, 전혀 생뚱맞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불협화음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악기들이 3중주의 하모니를 얼마나 부드럽게 들려줄 것인지가 이번 감상의 포인트입니다.

3중주의 하모니, 가능할까

사건의 시작은 다소 작위적입니다. 극장 경영자가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는데, 국산영화를 연간 상영일수의 5분의 2 이상 상영하여야 한다는 당시 영화법 제26조와 같은 법 시행령 제20조의3 규정은, 청구인들에게 국산영화를 상영하도록 강제적으로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써 청구인들 직업의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하는 규정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스크린쿼터제가 함축하는 다면적 문제 상황에 비하여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허망할 만큼 단조롭습니다. 단순한 해법은 그 결과가 만족스러울 때 명쾌하다는 예찬을 듣지만, 기대와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면 무식하니 용감하게 도식화했다는 비난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론은 기각입니다. 1995.7.21이 선고일자인데, 존폐 여부에 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헌법적 근거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제도가 도입된 이후 끊임없이 폐지 혹은 축소 논란에 시달려왔는데 이때마다 헌법재판소 결정은 스크린쿼터제 수호를 주장하는 이들의 강력한 논거가 되었습니다. 과정은 조금 아쉽습니다. 문화논리, 경제논리, 법논리가 결정문에 녹아 있기는 하지만, 세 논리의 축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 그 조화를 이룰 방법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헌법상 문화국가원리 설시 부족, 아쉬워

특히 서운한 건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문화국가원리와 관련된 담론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은 점입니다. 물론 헌법재판소는 청구인의 주장을 중심으로 판단할 뿐 학자처럼 세세히 논하지는 않습니다. 허나 영화 관련 사건을 다루면서 예술과 문화에 연관된 우리 헌법상 원리를 제시했다면, 영화가 헌법상 어떻게 위치하는지 정립시키는 이정표를 보여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예술작품입니다. 그래서 개성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은 시장과 자본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독자성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헌법재판소는 문화적 관점을 별개로 논하지 않았습니다. 직업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지 심사하면서, 헌법상 경제질서에 위배되지 않는지 판단하면서 슬며시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제작은 많은 자본과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는 것이지만 그 흥행 여부는 사전에 예측할 수 없고, 가사 예측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예측이 반드시 실제와 부합하는 것은 아니므로 개봉관의 확보 여부는 영화제작의 사활 문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 국산영화의무상영제는 질과 양에 있어서 압도적 우위에 있는 외국영화의 홍수 속에서 국산영화로 하여금 상영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여 주는 것으로서 국산영화의 제작과 상영의 기회를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적정한 방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되지 않는지를 판별하는 중에 ‘방법의 적정성에 관하여’ 부분에서 나타나는 설시입니다. 이런 태도는 분쟁을 낳기도 합니다. 그럼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면 의무상영제를 폐지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방어책인가, 육성책인가

이러한 공세와 반박은 쿼터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성책인지 최소한의 방어막인지 하는 인식의 차이입니다. 가령 텔레비전 토론에 나온 배우 박중훈씨는 영화배급시스템을 설명하면서 스크린쿼터제를 이제 없애자는 것은 신호등을 잘 지키니 없애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는 쿼터제를 방어막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 시장의 논리를 강조하는 입장은 태도가 다릅니다. 그들은 대개 쿼터제를 시한부 육성책으로 봅니다. 한국영화 기반이 너무 취약해 제대로 된 경쟁을 하기 힘든 구조에서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제 힘을 길렀으니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하자고 외칩니다. 이제 젖을 떼야 하지 않겠냐고 다그칩니다.

앞서 인용한 직업의 자유와 관련된 판시만 본다면, 오늘날 한국영화가 중흥기를 구가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스크린쿼터제는 존속할 이유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헌법상 경제질서와 관련해 설시한 부분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헌법 제119조 제2항의 규정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가 개인과 기업의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하도록 하고 있으나, 그것이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입법자가 외국영화에 의한 국내 영화시장의 독점이 초래되고, 국내 영화의 제작업은 황폐하여진 상태에서 외국영화의 수입업과 이를 상영하는 소비시장만이 과도히 비대하여질 우려가 있다는 판단하에서, 이를 방지하고 균형있는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하여 국산영화의무상영제를 둔 것이므로, 이를 들어 헌법상 경제질서에 반한다고는 볼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경제적 관점에 치중해 판단하여서 ‘독점’을 방지한다는 취지로 논증하였습니다. 이를 문화의 눈으로 치환한다면 다양성의 보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물의 종 다양성이 생존의 문제인 것과 같이, 문화에서 있어서도 다양성의 보장은 생존 그 자체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스크린쿼터제는 견제장치가 됩니다.

행복추구권, 공동체 이익과 무관한 무제한의 경제적 이익 도모 보장 안 해

헌법재판소는 직업의 자유와 경제질서를 주요 의제로 다루면서 문화적 요소를 고려했습니다. 문화와 시장이 접하는 단면을 잠시 비춘 것입니다. 법 논리 측면에서는 평등권과 위임입법의 한계 문제를 다루었지만 이를 문화논리, 경제논리와 긴밀하게 연관지어 판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행복추구권이 침해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심사하면서 경제질서와 관련된 설시를 하였습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이 공동체의 이익과 무관하게 무제한의 경제적 이익의 도모를 보장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위와 같은 경제적 고려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국산영화의무상영제가 바로 청구인들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문화다양성협약, 스크린쿼터제에 힘실어

스크린쿼터제는 종종 통상 마찰로 불거지기도 하는데, 국제법상 논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최근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 총회가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협약’을 채택한 것은 스크린쿼터제 유지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찬성 148, 반대 2, 기권 4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미국과 이스라엘만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이 협약에는 문화상품과 서비스 등은 상업적 측면만이 아닌 정체성, 가치, 의미를 전달하는 문화적 성격도 갖기 때문에 그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조항도 명시적으로 들어 있다고 합니다.

개인, 집단, 사회가 누려야 할 기본 권리로서 문화표현 방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는 대부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술을 포함한 문화 품목들의 ‘생산, 보급, 유통, 향유 양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본의 논리를 양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장논리를 전혀 양보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문화패권주의와 일방주의로 이어집니다.

하나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은 불행

우리의 스크린쿼터제는 유럽 등 해외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고 합니다. 스크린쿼터 성공 사례가 문화다양성협약 채택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다양성 확보는 문화주권을 지킨다는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세계 각국이 정신적 자주권을 수립하는데 우리 사례가 그 전범이 될 것입니다.

획일화를 저지하면서도 동시에 교류를 증진시키는 것이 앞으로 남은 과제입니다. 통상마찰로 파열음이 울릴 때는 국제적 역학관계, 즉 힘의 논리까지 개입되어 문제가 더욱 복잡다단하게 얽힐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 논리에 전적으로 지배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이 다룬 헌법재판소 결정은 1995.07.21. 94헌마125] [기각] [판례집 7-2,155~168]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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