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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치는 대륙의 정세
명나라의 정정(政情) 불안은 조선으로 하여금 또 한 번 시험에 들게 했다. 명나라가 대륙의 패자로 부상하던 고려 말. 친원과 친명을 오락가락하던 고려는 국론이 분열되었다. 의리를 지켜 원나라에 머리를 조아리자는 수구세력과 대륙의 별로 떠오른 명나라에 부복하자는 신진세력이 극렬하게 대립했다. 이 논쟁은 단순한 세력 다툼이 아니라 국운을 건 승부였다.
명나라가 대륙의 맹주를 자처하던 원나라를 북방으로 밀어내고 있을 무렵 고려는 원나라에 기울었다. 의리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수구세력의 이익이 원나라와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안위는 안중에 없고 부와 명예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이익이 걸려있다는 점에서 미국에 매달리는 오늘날의 수구세력과 흡사하다.
남경에서 용트림하던 주원장이 대륙을 평정했을 때 고려는 명나라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약소국의 서러움에 괘씸죄가 추가된 것이다. 명나라의 침공에 두려움을 느낀 고려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색, 첨서밀직(僉書密直) 이숭인을 하정사로 파견해 왕관(王官)으로 나라를 감독해 주기를 원하는 감국(監國)을 청했다. 요샛말로 풀이하면 신탁통치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라를 바치며 신탁통치를 원하는 부끄러운 하정사 일행에 서장관으로 참여한 태종 이방원은 약소국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한 시련과 시험이 자신에게 닥친 것이다. 남경의 황제가 위기를 극복할 것인지? 북경의 연왕이 천하를 손아귀에 넣을 것인지? 요동치는 명나라 정정은 안개 속 이었다. 격랑이 일고 있는 대륙은 태종 이방원으로 하여금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 선 태종 이방원
이러한 상황에서 태종 이방원에게 조언해줄 원로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정몽주도 없고 정도전도 없었다. 화급한 태종은 소요산에 머물고 있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개경으로 돌아가자는 태종의 청을 뿌리친 태조 이성계는 소요산에 눌러앉아 별전공사를 시작했다. 아예 소요산에 눌러앉을 속셈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우선 명나라와의 말(馬)무역을 중단하라 권했다. 당시 말은 최대의 전략물자였다. 원나라와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명나라는 상당수의 말을 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서 조달했다. 보전(步戰)이 전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당시의 말은 기동력의 상징이었다. 개경으로 돌아온 태종에게 의주 국경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귀국하던 축맹현이 요동에서 입국을 거절당하고 돌아왔으며 명나라의 장수 임팔라실리(林八剌失里)가 군사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와 입국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명나라의 황제가 조선에 파견한 사신이 자신의 나라에 입국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북경 연왕(燕王)군의 남경 공격으로 대륙의 판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태종은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기 위하여 2품 이상의 신료와 기로회의를 소집했다.
"임팔라실리가 3000여 호(戶)를 이끌고 도망 올 때 황군 하지휘(河指揮)가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니 임팔라실리가 다 죽여 버렸다. 심양에 있던 군사가 추격하니 또한 그 반수를 죽이고 국경에 와서 입국을 청한다. 아직 강변에 머물러 두고 그들의 움직임을 볼 것인가? 강을 건너오도록 허락하여 각처에 나누어 둘 것인지? 경들의 의견을 듣고 싶소."
의견은 분분했다. 강변에 머물러 두고 그 움직임을 보자는 사람이 23명, 식량이 떨어지고 형세가 궁해지면 난(亂)을 일으킬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니 강을 건너오도록 허락하여 각처에 나누어 두자는 사람이 12명이었다. 핵심은 연왕(燕王) 진영에서 반란군으로 보는 임팔라실리를 받아들였을 때 연왕의 추궁이 두려웠다.
임팔라실리가 끌고 온 만 5000여명은 난민이었다. 그중에는 요동에 살고 있던 동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임팔라실리는 연왕의 군대를 살상하고 도망 왔다. 여기에서 태종 이방원의 고민이 있었다. 인도적인 견지에서 받아들일 단순한 난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의주목에 있는 장천호(張千戶)로 하여금 임팔라실리를 만나보게 했다.
"정료위(定遼衛) 군관은 모두 연(燕)에 붙었소. 우리들은 이미 황제군에 충성했기 때문에 연(燕)을 따를 수 없소. 포주 강변(鋪州江邊)에서 우리가 농사를 짓도록 허락해 주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각도에 나누어 백성을 삼아 주시면 조선에 충성하겠소."
자신은 황제의 군관으로서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연왕에게 충성할 수 없어 조선에 투항했다는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우선 그 충성심을 높이 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받아들이기에는 정치적인 결단이 필요했다.
고민에 빠진 태종은 북경에서 잠간 만났던 연왕을 떠올렸다. 통이 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야심가 연왕이 그렇게 쫀쫀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태종은 강상인을 보내어 받아들인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이것이 태종의 패착이었다. 인상과 국가의 정책은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투항한 임팔라실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국경을 넘은 임팔라실리는 스스로 무장을 해제했다. 임팔라실리가 휴대한 병기를 바쳤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태종은 그를 왕도 개경으로 초치하라 명했다. 사람의 됨됨이를 직접 파악하여 재목으로 쓰고 싶었다. 아버지 이성계에게 투항하여 평생을 변치 않고 충성한 여진족출신 이지란을 떠올렸다. 그를 왕궁으로 초치하여 임금이 면대하자 신하들 사이에 격론이 일었다.
"내가 명나라와 맞서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불(火) 속에서 빠져나와 살기를 구하니 이를 어찌 못 본채 할 수 있겠느냐? 지금 명나라에서 추격한다 해서 돌려보낸다면 반드시 죽이고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니 그래서 받아들였던 것이다."-<태종실록>
"여러 재상들이 돌려보내라고 하오나 대의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도승지 박석명이 맞장구를 쳤다. 임팔라실리에 대한 인도적인 견지는 여기까지였다. 명나라 연왕군 진영에서 임팔라실리를 압송하라 요구한 것이다. 소국이 대국의 요구에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더구나 연왕군은 꺼져가는 불꽃같은 황제군이 아니라 대륙에 솟아오르는 불꽃이 아닌가.
"이들도 역시 우리나라 사람이라 의리상 돌려보내지 않아야 옳겠지만 나를 보고 섶을 지고 불에 들어간다 할까 염려된다."
임팔라실리가 끌고 온 난민 중에는 요동지방에 살고 있던 최강(崔康)등 조선계 동포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임팔라실리와 주동자를 돌려보내기로 했다. 이것이 대명외교의 한계다. 사대외교에서 찾으려 했던 한 가닥 민족의 자존마저 접을 수밖에 없었다.
명분도 국익도 없는 사대외교
국가 간의 외교란 국익이 최우선이다. 명분은 후순위다. 이러한 위상도 동등한 관계가 정립되었을 때 동력을 얻는다. 헌데 명나라와 조선은 사대국과 조공국의 관계다. 국익도 명분도 버리고 일방적인 굴종만을 요구하는 것이 사대외교다.
형조전서(刑曹典書) 진의귀가 임팔라실리(林八剌失里)를 요동으로 압송하여 명나라에 넘겨주었다. 인도적인 명분을 내세웠지만 명나라의 압박에 굴복한 것이다. 임팔라실리를 명나라로 돌려보낸 태종은 나머지 난민을 풍해도(豐海道)에 나누어 배치했다. 임팔라실리 문제를 일단락 지은 태종은 하륜을 불러 명나라 문제를 숙의했다.
"명나라에 병란(兵亂)이 일어났사오니 마땅히 서북면에 성을 쌓아야 합니다."
서북면은 명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오늘날 평안도다. 하륜에 이어 이무가 말했다.
"평양, 안주, 의주, 이성, 강계 등 다섯 성을 쌓음이 옳겠습니다."
이무가 지목한 곳은 명나라가 조선을 침공할시 주 공격로다.
"지금 명나라는 매우 어지럽고 우리나라는 무사하오니 이때에 성을 쌓아야만 됩니다."
김사형이 유비무환의 대비책을 강구하자고 주장했다. 태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을 쌓으라 명했다. 있을 수 있는 명나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껄끄러운 대명외교에 돌출한 임팔라실리 문제를 일단락 짓고 긴장을 풀기 위하여 평주온천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또 다시 국경에서 비보(飛報)가 날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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