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의 무리를 먹였다는 이른 바 '오병이어'의 기적이 발생한 직후였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과연 얼마나 사실적인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예수가 보여준 기적이 군중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군중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기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6장 14~15절)
여기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군중들은 예수를 단순히 종교적 선지자로만 떠받든 게 아니라 그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고까지 하였다. 예수를 정치적 지도자로 옹립하려 한 것이다.
군중들은 단순히 먹을 것 때문에 예수를 옹립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땅에서는 정치적 해방을 위한 저항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대중적 인기를 늘려가고 있던 예수는 당시 민중들에게는 유력한 정치적 메시아의 후보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민족의 정치적 필요에 부응할 만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간결하고 쉬우며 신선한 메시지로 짧은 시간에 그토록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한다는 것은 그 어느 정치 지도자도 모방하기 힘든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메시지는 서민적이었기 때문에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서민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스라엘민족의 정치적 열기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은, 예수가 죽은 지 30여 년 후에 이스라엘에서 반(反)로마 저항운동이 일어나 예루살렘성이 로마군에 의해 멸망하는 사태를 초래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만큼 이스라엘에서는 정치적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임금 삼으려하자 산으로 떠난 예수
이처럼 정치적 열기가 달아오르는 분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군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 한 것이다. 만약 예수가 세속적인 사람이었다면, 그 같은 정치적 열기에 편승해서 이스라엘인들의 왕이 되려 했을지도 모른다.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 하였으니,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그런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군중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분위기를 보이자, "혼자 산으로 떠나가"버렸다고 요한복음은 전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속세와의 단절'을 상징하는 '산'으로 도망가 버렸다. 정치적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다. 한두 마디 말로 겸양의 덕을 보인 게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거부의사를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보기에 따라서는 비판을 받을 소지도 충분히 있다. "민중에게 보다 더 절실한 것은 어쩌면 종교적 구원보다는 정치적 구원일 수도 있는데 그 같은 절실한 바람을 냉정하게 뿌리쳤다"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다. 현실도피라는 비판을 들을 소지가 충분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에 대한 열의가 높았던 가룟 유다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예수의 모습이 참으로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의 판단은 달랐다. 그는 '사랑의 메시지로 인류를 구원하자면 세속적인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인간 사이의 혹은 나라 사이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매이면 보편적인 사랑의 메시지로 인류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인식한 것이다.
예수의 판단이 옳은지 어떤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예수의 결정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몫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치적 중립에 관한 예수의 결정을 반드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바로 예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세례를 받고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을 끼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 말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예수의 길을 따라 나선 사람이라면, 스승이 생각한 대로 생각하고 스승이 행동한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예수가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자 했다면, 예수의 제자들 역시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신의 믿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예수의 결정이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예수의 제자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선언해 놓고 정작 예수가 행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만약 '정치중립에 관한 예수의 결정은 옳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예수를 따르겠다'고 결심했다면, 정치중립에 관한 예수의 결정에 대해 명확한 비판을 가한 다음에 조건부 신앙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일부는 정치중립에 관한 예수의 본보기를 따르지도 않고 또 그것을 비판하지도 않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 일부는 교회 간판을 내걸고 공식적으로 정치에 간여하면서도 여전히 예수의 제자임을 자처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도 '참여정치'의 신봉자이기 때문인가?
목사가 개인적으로 특정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목사가 목사의 명의로 신도들을 교회 버스에 태워 정치적 장소에 동원하는 모습을 곧잘 목격할 수 있다. 서울시청 앞과 여의도 등등에서….
그리고 한국교회 일부가 내거는 구호 역시 가히 '비성경적'이다. "하나님과 천국 만세!"라는 구호는 못 외칠망정 "미국과 부시 대통령 만세!"라는 구호가 목사가 잡은 마이크에서 울려 퍼지기까지 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국내의 특정 정치세력에게도 노골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게다가 대통령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한국교회 일부의 정치개입은 한층 더 노골적이 되려 하고 있다. 일부 목사들이 이미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것은 언론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특정 경선후보 '당부 말씀' 전하는 목사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교회 밖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나는 정치개입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정치개입이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일부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특정 경선후보의 '당부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또 목사가 고개 숙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아니라, 자기 앞에 있는 수십 혹은 수백 또는 수천 명의 '유권자'에게 한 표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 후보를 위한 그런 기도는 아무리 들어봐도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아니라 유권자에 대한 기도라고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스승인 예수는 군중들이 임금 삼으려 하는데도 이를 뿌리치고 산으로 도망갔는데 그 제자인 일부 한국교회 목사들은 임금도 아닌 '선거운동원' 자리도 단호히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이 진정 예수의 제자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세속적·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신앙의 순결성을 보호하려 한 예수의 정신과 결단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런 예수의 태도를 본받지 못한다면, 이는 예수의 정치중립에 실망하여 예수를 고작 은 30량에 팔아버린 가룟 유다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배은망덕'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신앙의 순결성을 지키고 예수의 참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세속의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떠나 상징적 의미의 '산'으로 도망가야 할 것이다. 세속적·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고 오로지 사랑의 메시지만이 살아 숨쉬는 '산'으로 도망가지 않는다면, 한국교회 일부는 그저 선거연락사무소나 유세장의 지위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도 산으로 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대선의 정치적 열기에 편승하지 말고 산으로 가야 한다. 왜냐하면, 대선 현장에는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