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버락 오바마가 앞으로 4년간 침몰위기에 놓인 '미국호'를 이끌 새로운 선장으로 등장했다.
그의 등장만으로도 전 세계는 다른 눈으로 미국을 바라보고 있다. '미국에서도 흑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구나'라는 감탄의 이면에는 '새로운 미국, 달라진 미국'을 기대하는 정서가 깔려 있다.
이라크 침공과 금융위기가 여실히 보여주듯 미국의 독선과 실패는 미국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좋든 싫든, '건강한 미국'이야말로 지구촌 전체의 중요한 생존 조건이 된 것이다.
지구촌의 많은 문제들이 미국 때문에 생겼거나 미국과 무관하지 않듯이, 미국 없이 이들 문제를 푼다는 것 역시 생각하기 힘든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부시의 미국'의 역주행에 전세계는 분노와 실망을 나타냈고, 결국 부시 대통령은 이번 대선의 최대 패배자로 남으면서 쓸쓸하게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할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이처럼 국제사회가 오바마의 등장에 환호와 기대를 보내고 있는데, 한국의 청와대는 불안한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본격적으로 걸려고 하는데 정작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 '수정' 열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 비준에도 빨간불이 커졌다. 무엇보다도 '김정일과 조건 없이 만나겠다'는 지도자가 나타나, 대북정책 전환에 대한 압박도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하면, 이명박 정부에게도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대신에 북한과 손을 잡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는 새로운 경제모델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두 정상의 임기가 2012년으로 겹치는 시기동안 한미공조의 틀을 새로 짠다면,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고 반세기를 훌쩍 넘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역사적 과업을 이룰 수 있다. 오바마 취임까지 남은 77일간의 시간은 이명박 정부에게는 절호의 시간인 것이다.
오바마의 등장이 역사적인 기회인 이유일각에서는 오바마의 대북정책이 2007년 이후 부시의 정책이나 매케인의 정책과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1994년 클린턴 행정부가 북폭을 추진한 사례가 있듯이, 민주당 정권이 오히려 더욱 강경하게 나올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맞으면서도 틀린 말이다.
'오바마의 미국'이 한반도에게는 절호의 기회라는 주장의 핵심에는 오바마의 세계관과 리더십이 자리 잡고 있다. 오바마의 정치적 성향은 "실용적이고 탈이념적인 인물"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그는 미국의 가치와 이념을 중시하면서도 이를 근거로 국제관계를 '선과 악의 대결'로 보거나, 미국식 가치를 국제사회에 강제하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강조하면서 다자적 협력과 외교적 해결 원칙을 강조하는 한편, '적대국가 지도자와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서겠다'는 공약은 이러한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그는 또한 법학도답게 국제무대에서도 규범의 준수를 강조한다. "어느 누구도 국제 규범을 준수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없고, 미국이 예외주의를 관철하려고 하면서 다른 나라에게 국제 규범을 준수하라고 요구할 수 없으며, 슈퍼파워인 미국이 국제적 합의에 따라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데 자제력을 발휘하게 될 때, 다른 나라에게도 국제 규범을 준수할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오바마의 리더십 스타일도 주목된다. 그는 신중하고 사색적이며 지적인 호기심이 많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역지사지의 태도로 타자의 얘기를 경청하면서 토론을 즐겨하고, 신속한 결정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의에 기초한 결정을 선호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게 하고 활발한 토론을 거쳐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방식이다. 이견이 불거지면,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기보다는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최소한의 합의점을 찾아 합의 기반을 넓혀가는 것이 그의 리더십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이러한 그의 기질은 자연스럽게 화해와 통합을 통한 변화의 리더십을 구축하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워싱턴 정계 진출 4년 만에 '슈퍼파워' 미국의 최고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오바마의 개인적, 정치적 성향은 그의 대외정책 수행에 어떻게 반영될까? 우선 오바마는 이념보다는 실리를 선호하는 실용주의자라는 점에서 북한, 이란 등 적대국가는 물론이고 러시아, 중국과 같은 잠재적 경쟁자에 대해 이념적, 도덕적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국제질서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보면서 '내 편이 아니면, 적이다'라는 부시 행정부의 세계관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유엔을 무력화하고 '민주주의 동맹체'를 결성해 미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을 꿈꾼 매케인의 노선과도 대비된다.
또한 주위 참모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는 동시에 상대국의 처지와 미국의 이익을 함께 고려해 '신중하게' 정책 결정을 내리고, '신속하게' 집행하려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특히 적대국가와의 협상시 '게임의 규칙'과 '득실관계'를 명확히 제시하면서 상대방의 협력과 약속 이행에 따른 상응조치 제공에는 과감하면서도, 상대방이 이를 거부하거나 약속한 사항을 위반한다면 단호한 압력과 제재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오바마의 성향은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궁합이 잘 맞을 공산이 크다. 최근 북한을 방문해 고위층을 두루 만나고 온 한 인사는 "북한은 오바마를 선호하고 있고 그의 당선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강력히 추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북한의 뜻을 대변하고 있는 조총련계 신문 조선신보는 6월 9일 "조선반도와의 관계에서 본다면 부시 정권의 잘못을 엄하게 비판하고 조선의 지도자와 조건 없이 만나겠다고 공언해 온 오바마가 '부시의 아류'이자 네오콘의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매케인보다 낫기는 낫다"고 말한 바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공식 출범하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가 상당한 탄력을 받을 것임을 예고해주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오바마의 미국에 희망을 걸 수 있는 요소들은 많다. 민주당이 상하원을 싹쓸이 한 것은 클린턴 행정부 때 미국 의회가 대북정책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 되풀이 되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또한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 당선자를 비롯해 대북정책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인물들이 많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무지로 6년을 허송세월한 것이 되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무엇보다도 오바마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처럼 딴 생각, 즉 '북한위협론'을 이용해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과 동맹 재편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별로 없다. 6자회담의 핵심적인 당사자인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적대감이 덜 하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오바마와 부시의 '너무나도 중요한 한 가지 차이'오바마의 대북정책은 2007년 이후 부시 행정부의 정책과 대단히 흡사한 것은 사실이다. "부시의 대북정책 계승자는 매케인이 아니라 오바마이다"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이다. 그런데 한 가지 중대한 차이가 있다. 바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이다. 북미정상회담은 한반도 비핵평화라는 목적지로 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김정일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원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와병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최근 축구 경기 관람과 군부대 시찰에 나선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치가 불가능한 상황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김정일의 초청으로 추진되었던 클린턴의 방북은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부시가 당선되면서 무산되었고, 부시는 김정일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감을 버리지 못해 성사되지 못했다. 클린턴 때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고, 부시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오바마는 상황도 괜찮고 마음도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클린턴과 달리 레임덕을 걱정할 위치에 있지 않고, 9·19 공동성명의 2단계 이행조치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출범하게 된다. 오바마 자신도 북미정상회담에 적극적인 편이다. 그는 김정일을 비롯한 적대 국가 지도자와 "조건없이 만나겠다"고 공언해왔다. 다만 정상회담을 위해서는 "적절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오바마 임기 내, 그것도 이른 시일 내에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6·15 선언과 10·4 선언의 존중과 이행 의지를 밝히지 않아, 남북정상회담은 물 건너가고 그 자리를 북미정상회담이 차지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에서 한국이 왕따 당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한미공조' 맹신하기 전에 대북정책부터 전환해야
일단 이명박 정부로서는 또 다시 통미봉남을 걱정해야 할 상황에 몰리고 있다. 정부에서는 "오바마가 당선돼 북핵에 대해 획기적 조치를 취해도 한미간 공조 위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맹신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지 않는 한, 이는 무늬만 한미공조인 '짝사랑'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미일 동맹을 최우선했던 부시 행정부조차도 일본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 하물며 국제주의를 강조하는 오바마 행정부가 MB 정부의 처지를 고려해 북한과의 협상에 미온적이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오히려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과 러시아처럼 한국 정부에게 남북관계 개선을 주문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남북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미국 내 강경파들에게 공세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우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MB 정부의 대북정책 전환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선택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대북강경책을 고수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의 '훼방꾼(spoiler)'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오바마 행정부의 유무형의 압력과 정세 변화에 떠밀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대북정책을 바꾸는 듯한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주변인(outsider)'이 되는 것이다. 셋째는 오바마 행정부 등장에 따른 역사적 기회를 '선제적으로' 포착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도모함으로써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의 '촉진자(promotor)'가 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세 번째 선택이 가장 합리적이고 가능성이 높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MB 정부의 선택은 두 번째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현실적으로 MB 정부는 6자회담과 북미관계 개선에 제동을 걸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점에서 첫 번째 선택은 가능하지 않다. 반면, 세 번째 선택은 MB 정부의 한계를 볼 때 현재로서는 기대하기 힘들다.
MB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북관계 개선시의 전략적 이익과 남북관계 악화시의 전략적 손실에 대해 극히 둔감하고 무지하다는 것이다. 무관심과 무위와 무능의 대북정책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결코 지속되기 어렵다.
북한에 대해 혐오감과 적대감으로 똘똘 뭉쳐 있던 부시 행정부조차도 2007년부터 대북정책을 대폭 전환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부시가 처한 안팎의 상황이 대북강경책을 고수할 수 없게 만들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나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화를 해보니 성과가 나오더라'라는 깨달음이다.
MB 정부도 이러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제2의 부시'가 아니라 '제2의 YS'로 귀결될 것이다. 냉온탕을 왔다갔다 하다가, 실질적인 협상에서는 배제되고 제네바 합의에 따른 대부분의 비용은 떠안은 참담한 결과가 되풀이될 공산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6자회담을 비롯한 여러 회담에서 주변인으로 맴돌다가 정작 계산서에는 자신이 사인하게 되는 결과를 막기 위해서는 MB 정부의 창조적 발상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된다.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역이 될 것인가? 오바마의 당선을 보면서 이명박 정부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덧붙이는 글 | 기자가 대표로 있는 평화네트워크에서는 11월 6일 오전 10시 30분부터 '미국 대선이후의 세계질서와 한반도'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www.peacekorea.org 를 방문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