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부의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침해와 광장공포증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경찰의 서울광장 경찰버스 봉쇄가 이어지고 있고, 서울시는 문화행사 이외에는 사용 제한을 내걸었습니다. 광장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시민사회와 야당은 광장의 위기에 맞서 주민직접발의라는 직접민주주의의 방법으로 광장을 시민의 품으로 찾아오는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와 공동으로 '광장을 열어라'는 주제로 공동기획을 진행합니다. 독자여러분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
광장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었다. 물론 독재자도 광장을 필요로 한다. 광장 가득 사람을 채워 놓고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장면은 민주시민들에게는 소름이 끼치지만 독재자 개인에게는 참으로 짜릿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곳, 그러나 평시에는 비어 있는 곳, 이것이 광장이다. 사람이 있어야 재미있고, 사람이 많아야 자꾸 가고 싶은 곳, 그곳이 광장이다.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는 광장의 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화문 광장에서부터 청계 광장, 시청 앞의 서울 광장, 남대문 앞 광장, 서울역 광장에 이르기까지 5개의 광장이 연이어 있다. 남대문 앞 광장에서는 특별히 집회를 해 본 경험이 없지만 다른 곳들은 유달리 굴곡진 한국 현대사 덕에 시민단체 활동을 활발히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몇 번 씩은 그곳에서 벌어진 집회에 참석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들 광장 중 광화문 광장, 청계 광장, 서울 광장을 둘러볼 것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모두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광장은 도시공학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만든 공간이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현대사는 오랫동안 광장을 빼앗겼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은 여의도의 5.16광장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군사 반란의 날짜를 붙인 흉측한 이름처럼, 이 광장은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곳이 아니라 정권을 찬양하는 자들만이 모이거나, 또는 그들이 소집한 집회나 열리는 곳이 되어 버렸다.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유신시대에는 연례행사처럼 5.16광장에 마포부터 걸어가 김일성 허수아비를 불태우곤 했다. 이 시절 광장은 동원된 사람들이 가던 곳이었다. 언제 무슨 집회가 있는지를 찾아 사람들이 제 발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들던 21세기의 광장과는 그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광장을 빼앗겼던 시대
유신시절은 정말 숨이 막혔었다. 억울하게 사형당한 인혁당 가족들이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우표 딱지만하게라도 좋으니 제발 제발 자기네 억울한 사정을 신문에 실어 달라고 부탁을 했건만 어느 신문도 그런 사연을 실어 주지 않았다. 대학 캠퍼스 내에조차 사복 경찰 수백 명이 벤치에 앉아 있고, 로마 병정 같은 진압복을 입은 경찰들도 십여 대씩 차를 대 놓고 있던 실정이었다. 소통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학내 시위조차 중형으로 다스려지던 시절, 일부 대학생들은 그럴 바에야 각 대학이 연합해서 광화문에서 데모를 하자고 모의했다. 1978년 6월 26일 광화문에서는 서울시내 대학생들의 연합시위가 개최되었는데, 워낙 경비가 삼엄하여 데모랄 것도 없이 진압되고 말았다.
그때 아스팔트를 밟았던 사람들 중 잡혀간 학생들 20여 명은 1년 내지 2년의 징역을 살아야 했다. 1964년 '6·3사태' 이후 학생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는 개별 학생들이 광화문에 모여 있다가 기습적으로 시위를 단행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아스팔트를 밟은 것이 죄가 되어 1년 이상 콩밥을 먹어야 했으니, 광화문은 그렇게 엄청난 곳이었고, 유신은 또 그렇게 지독한 독재였다. 그 박정희가 죽고 나서도 학생들이 광화문을 다시 밟은 것은 반년 이상이 흐른 다음이었다.
유신의 긴 겨울이 끝나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왔건만, 학생들은 가두 진출을 놓고 오랜 논쟁만을 벌이고 있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면 군을 자극하게 될 것이고, 군이 뛰쳐나올 명분을 줄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논쟁이 가열되어도 결론은 나지 않던 차에 일부 대학생이 거리로 나섰다. 학생들의 가두 진출이 기정사실화 되고 나서 다음날인 5월 14일에는 서울 시내의 모든 대학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의 봄'이라는 특수한 상황 탓이었는지, 학생들의 가두 진출을 속으로는 바라고 있던 신군부의 작전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학생들은 그날 저녁 광화문 일대를 휘저을 수 있었다. 다음날도 학생들은 거리로 진출했다. 이번에는 경찰이 남대문 일대에 저지선을 쳤고 학생들은 서울역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이른바 '서울역 회군' 결정이 내려졌고, 이틀 후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광주를 거쳐 우리는 민주주의와 광장을 같이 잃었다.
1987년 6월 항쟁 때 우리는 다시 광장을 밟았었다. 최루탄에 희생된 이한열 군을 떠나보내던 날이었다. 참 악랄했던 군사독재정권은 독재 권력에 항거하다 희생된 분들의 시신을 탈취해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한열 군이 숨을 거둔 뒤에는 그런 두려움 때문에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신촌 세브란스병원 부근에서 이틀씩, 사흘씩 밤을 지새웠다. 그 덕에 숙연한 영결식장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많은 젊은이들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한열이의 영정을 앞세운 영구 행렬을 따라 백만 인파가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6월 항쟁 기간 내내 혹시 한열이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고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군사 정권은 군사 정권대로 마음을 졸였다.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한열이는 직선제를 수용한다는 노태우의 발표, 즉 6.29 선언이 있고 나서야 하늘나라로 갔다. 그 한열이를 보내는 길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백만 인파가 몰렸다. 그 시절 나는 6월 항쟁의 한 달간 최루가스에 단련될 대로 단련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백만 인파의 선두가 시청을 지나 광화문에서 전경들과 대치하기 시작하고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경찰이 페퍼포그를 정신없이 쏴 대기 시작했다. 최루탄 중에서 그래도 견딜만 했던 것이 페퍼포그였건만, 며칠 밤을 지새운 지친 몸은 페퍼포그 한방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렸다. 정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교동 골목으로 도망쳤다가 기운을 추스르고, 혹시 사람들이 다시 모이지 않을까 나와 본 태평로에는 주인 잃은 신발짝만 가득했다.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어찌 한쪽 신발만 신고 걸어갔을까? 1987년 이후 뒤뚱거릴 수밖에 없었던 한국 민주주의의 슬픈 걸음걸이가 떠올랐다.
월드컵과 다시 찾은 광장
군사독재 시절 우리는 오랜 기간 광장을 빼앗겼었다. 민주화가 시작되고도 독재정권에 너무 길들여진 탓인지 광장을 되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평화박물관 대표인 건축가 정기용 선생은 "도심 속에 제대로 된 광장 하나 갖지 못한 시민은 시민이 아니고 주민일 뿐"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우리는 훌륭한 광장이 여러 개나 있어도 거기 발을 딛을 생각을 못하는 길들여진 주민이었을 뿐이다. 광장은 뜻밖에 우리의 품으로 왔다.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된 것이다. 신경림 선생의 싯구처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축구도 모여서 보면 한층 더 재미있는 모양이다. 광화문 네거리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설치한 초대형 스크린이 있어 축구를 즐기기에 너무나 훌륭한 곳이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서울의 한복판에 앉아서 김밥 먹으며 축구를 본다는 게…. 어, 그런데 우리 선수들이 너무너무 잘하는 것이다. 주최국이니 16강은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했지만 8강에, 4강에 승승장구하니 기쁠 수밖에. 예선에서 탈락했다면 겨우 세 번 모이고 말았을 것을 4강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일곱 번이나 광장에 모일 수 있었다. 정부도 시민들이 모여서 즐기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포르투갈전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시민들이 밤늦도록 거리를 쏘다녔다.
사람들은 광화문과 시청을 매운 붉은 물결을 보며 이제 대한민국이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면 대한민국이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시민들, 특히 젊은이들이 광장을 우리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광장에 모여 7번이나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췄던 사람들은 으레 광장은 우리가 모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뜨거운 밤을 보냈어도, 다음날 아침에 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광장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광장을 즐긴 사람들이 뒷마무리도 잘 해 놓은 것이다. 이를 보며 모두들 언제든 우리가 광장을 아무 탈 없이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월드컵의 경험은 레드 콤플렉스를 몰아내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이제 광장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여중생 사건과 광장의 부활
광장은 축제의 장이지만, 토론의 장이고 또한 슬픔을 나누는 장이기도 하다. 월드컵이 기쁨을 함께하여 기쁨을 두 배로 만드는 그런 광장을 찾아 주었다면, 그해 11월과 12월에 열린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된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집회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 위로받고 치유해 주는 공간으로서의 광장을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우리가 월드컵의 열기에 후끈 달아 있던 6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는 미군 장갑차에 길 가던 여중생 두 명이 치어 목숨을 잃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일부 시민운동 단체와 지역의 또래 학생들이 끈질기게 문제 제기를 했지만 전국적인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재판에 회부된 장갑차 운전 미군 병사들이 11월에 이르러 모두 무죄로 풀려나면서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길 가던 아이들이 둘이나 죽었는데 아무의 잘못도 아니라니, 그럼 그 때 그 길을 지나간 아이들 잘못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시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청년이 인터넷으로 두 소녀의 넋을 기리는 촛불집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문에서 앙마는 "우린 광화문을 걸을 자격이 있는 대한민국의 주인들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광장을 잃어버렸던 동안, 우리에게는 또 다른 광장이 생겨났다. 바로 인터넷이었다. 앙마의 제안은 인터넷을 통해 여기저기 퍼져 나갔다. 네티즌들은 이 글을 자기가 자주 가는 카페, 동호회, 커뮤니티, 클럽 등에 부지런히 퍼 날랐다. 아무런 주최도, 준비 단체도, 사전 계획도 없이 첫 번째 제안이 나온 지 사흘만에 광화문에 1만 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생각지 못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시청 앞에서 다시 만났다. 한겨레21은 그때의 광경을 이렇게 적었다.
'즉석에서 앰프를 빌리고, 마이크를 빌리고, 사회자를 뽑고, 마치 양촌리 김 회장 잔칫집 풍경이었어. 프로그램이 뭐가 있었겠어. 그저 말하고 싶은 사람 앞으로 나와 "미군 미워여", "부시 싫어여", "소파 허접해여" 막 이러구 사람들은 박수치고…. 게다가 "앞으로 일주일에 몇 번 모일까여 다수결로 결정합시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거수하고 그거 사회자가 카운트하더니 일주일 한번 집회로 쾅쾅 결정 내리고. 이거 진짜 골 때리는 풍경이었어. 근데 이게 진짜 민주주의거덩. 간접민주주의라는 거 투표권 한장이 고무신 하나랑 맞바꿔지는 웃긴 짬뽕인데, 사람들이 너나없이 발언하고 그 발언이 또 정책결정에 반영되고, 이거 진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삼촌 생전, 연애 수만큼 수백번 집회를 들락거려봤지만 이런 대규모 집회에서 이런 정경은 처음이었다. 이제 2500년 전 아크로폴리스가 광화문에 부활했다는 걸 알겠지' (12/5, 한겨레21 437호, <떠나라, 그 감동의 메아리>) 발랄한 응징이 넘치는 광장
미선이 효순이 추모집회로 광장을 되찾은 대중들은 1년이 조금 지나 다시 광장에 섰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다. 2004년 3월 12일, 탄핵이 가결된 날의 여의도는 절규와 통곡과 몸부림뿐이었다. 1991년 강경대 군이 전경에 맞아 죽고 난 뒤의 분신정국 같은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대중들도 분노와 참담함으로 광화문 네거리에 나왔다. 그런데! 먼저 나온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광장의 분위기는 영 딴 판이었다. 흥겨운 춤판이 벌어져 있고, 무대에서는 '부라보, 부라보, 아빠의 청춘' 같은 신나는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2002년의 촛불시위 때 더 많은 인파가 모였지만,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무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지만 미선이·효순이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가 흥겨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탄핵 때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우리가 다시 찾은 광장과 인터넷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광장에서는 발랄한 보복과 유쾌한 응징이 넘쳐났다. 탄핵반대 집회는 축제였다. 다가올 총선에서 민주주의의 승리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은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탄핵당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했다. 경찰과의 긴장도 별로 없었다. 대중들은 승리를 예매해 놓았으니 느긋했고, 경찰에 대한 지휘권은 대중들이 구하려는 참여정부에 있었으니 대중과 경찰이 충돌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대중들은 밤이 되면 다들 집으로 돌아가 느긋하게 잠을 잤다. 아직 광장은 대중들이 밤도 새고 잠도 자는 곳으로까지 진화하지는 못했다.
2008년의 촛불집회에서 대중과 광장은 정말 새롭게 거듭났다. 촛불은 처음 광장의 막내인 청계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여학생들이 청계광장에서 모이자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을 때 누구도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 명이 모였고, 모임이 발랄하고 재미있다보니 매일매일 모이게 되었고, 모이는 사람의 숫자도 늘어났다. 매일 청계광장에 모이기를 17번, 집회에서 외친 구호마냥 "귓구녕에 공구리를 쳤는지" MB는 소통이 안 되었다고 사과는 해도 대화는 하려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도 17번을 얘기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면 그 사이는 깨지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청와대로 가자고 외쳤고, 대열은 자연스럽게 청계광장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멀리 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블록 옆의 광화문 우체국 앞으로 옮겼을 뿐이다. 경찰이 막아섰는데 대중들은 그것을 돌파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대중들은 경찰저지선 앞에 주저앉았고, 집에 가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중들이 시국토론을 벌이더니 한 쪽에서는 노래자랑 모드에 들어가고 다른 쪽에서는 친구들끼리 편의점에서 맥주캔 몇 개 사다가 홀짝이기 시작했다. 도시의 매연도 가라앉은 늦은 봄의 깊은 밤에 광화문 네거리에 주저앉아 맥주를 마시는 상큼함이라니. 미선이 효순이 추모집회 때도, 탄핵반대 집회 때도 이 광장이 우리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광화문 네거리에 퍼질러 앉아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고 보니 정말 이 광장은 우리의 것이었다. 6월 10일의 촛불집회에는 아마도 광화문 네거리부터 숭례문 광장까지 사람을 가득 채우면 모두 몇 명이나 들어가는지 시험해 보기위해 마련된 집회인 것 같았다.
어떤 카메라의 어떤 앵글도 그날 모인 사람들을 다 잡아낼 수 없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광장이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을까? 통상적인 집회라면 민주노총이니 전교조니 한총련이니 하는 깃발들만 나부꼈겠지만, 이 날은 달랐다. 미선이 효순이 추모집회 당시의 깃발 논쟁이나 촛불집회 초기의 깃발 논쟁은 이미 의미를 잃은 듯싶었다. 정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름도 생소한 인터넷의 다양한 동호회가 저마다 자기네 깃발을 개성있게 만들어 나왔다. 깃발이라도 없다면 저 엄청난 군중 속에서 자기가 속한 동호회를 어찌 찾을 수 있을까?
시위대가 경복궁 앞까지 진출한 5월 31일 밤은 한국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아마도 사상최대의 인파가 노숙을 했던 날일 것이다. 광장이 거대한 국민MT장소로 변했다. 이제 사람들은 아예 캠핑준비를 해서 시청 앞 광장을 찾기도 했다. 집회도 하고, 시위도 하고, 토론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공연도 하고, 동영상도 돌리고, 물건도 팔고, 서명도 받고, 술도 마시고, 잠도 자고, 싸돌아다니기도 하고, 광장은 참으로 별의별 사람들이 모여 별의별 짓을 다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왜 집에 가지 않았을까? 집보다 광장이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도 흉내 낼 수 없는 극적인 역사가 우리 자신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잘못 뽑았지만 광장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우리는 행복했다.
빼앗긴 광장
촛불 시위는 비폭력의 힘을 보여주었다. 비폭력이었기에 경찰도 폭력적인 진압을 하기 어려웠고, 경찰의 폭력이 없는 안전한 축제였기에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나오고, 젊은 엄마들은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나왔다. 안전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참여했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집회는 더 안전해졌다. 이렇게 탄력이 붙어가는 촛불집회를 MB정권은 견딜 수 없었다. 촛불집회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일부 사람들 중에 경찰과의 저지선에서 약간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정부와 수구언론은 이를 빌미로 촛불집회에 폭력집회라는 딱지를 붙이려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핑계였지만 5월과 6월 두 달간의 축제는 경찰이 마구잡이 폭력을 행사하면서 끝나기 시작했다. 경찰의 폭력에 밀려 시민들은 광장을 빼앗겼다. 이제 광장에는 보기 흉한 차벽이 세워졌다. 명박산성은 조롱거리였지만 우리의 광장을 뺑 둘러막아선 버스의 차벽은 우리의 가슴에 아픈 상처를 남겼다. 우리는 다시 광장을 빼앗긴 것이다. 광장을 빼앗긴 것은 대중들의 토론을 빼앗긴 것이고, 대중들의 소통을 빼앗긴 것이고, 대중들의 축제를 빼앗긴 것이고, 우리 모두의 민주주의를 빼앗긴 것이다.
대중들이 이 광장에 다시 선 것은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보내기 위해서였다. 기쁨과 발랄함이 넘치던 광장은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장례기간 내내 차벽이 쳐있던 광장은 이날 딱 하루 열렸다. 1919년 고종황제가 돌아가셨을 때 슬픈 백성들은 이 광장을 찾았다. 그 흉악한 일제도 나라 잃은 백성들이 통곡할 공간마저 빼앗지는 않았다. 그런데 MB정권은 장례식 딱 하루만 광장을 열었을 뿐이다. 장례가 끝난 다음날인 5월 30일 새벽 경찰은 대한문 앞 빈소를 때려 부셨고, 광장에는 다시 차벽을 쳤다. 국상이 끝난 밤, 나는 광장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근 1년 만에 밟아 보는 정든 아스팔트였다. 누군가가 다시 광장에 선 감회가 어떠냐고 물어왔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게 우리 광장인데, 우리 광장에 다시 서기가 이렇게 힘드네요. 노무현 대통령을 바치고서야 우리가 겨우 한번 이 광장을 밟아보네요. 이게 이렇게 비싼 땅이네요." 빼앗긴 광장, 빼앗겨서 더 소중한 광장, 텅 빈 광장의 구석에서 나는 다시 찾을 민주주의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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