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 표지
책 표지 ⓒ 웅진 지식하우스

이 책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지구 위를 이사하는 법 (Educating Alice: Adventures of a Curious Woman)>이라는 도발적인 제목도 그렇고, '세계에서 가장 핫한 도시들을 떠돌며 자신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들을 하나씩 배워나간다'는, 이름 하여 'Learning Travel'이라는 여행의 방식도 그랬다. 이 여행은 사치스러운 여행으로 느껴졌다.

 

호기심 많은 남성의 모험

 

"프랑스 파리 리츠 호텔에서 쿠킹 클래스 듣기,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양치기 개 길들이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예술 강좌 듣기, 영국 윈체스터에서 제인 오스틴 따라 걷기, 일본 교토에서 전통 춤과 다도 배우기, 체코 프라하에서 글쓰기 수업 듣기, 프랑스 아비뇽에서 프로방스식 정원에 탐닉하기."

 

그녀가 수강한 일곱 가지 강좌목록을 보면서 나의 이질감은 일곱 배로 더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질적으로 느껴질수록 왠지 더 궁금해진다. 낮선 곳일수록 더 가보고 싶고, 낮선 사람일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것이 여행자의 본능이기 때문일까. 여행에 있어서 새로운 곳, 새로운 방식은 그래서 중요한가 보다.

 

'사치스럽다'는 판단도 성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치스러운 여행이라면 '베니스 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여 세계적인 배우들의 얼굴을 직접 보고, 대사관에서 제공하는 가이드를 따라 로마관광을 하는, 4박5일 일정의 천오백만 원짜리, 영진위 지원 문화관광 패키지' 정도는 돼야 진정한 사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 대상을 달리해서 생각해 봐도 그렇다. 한 달의 시간 동안 전국일주를 떠난다고 할 때, 버스와 기차로 전국을 한 바퀴 도는 여행은 검소하고, 한 도시에 머물며 수준 높은 강좌를 듣는 것은 사치스러운 것인가? 배낭 메고 풍천노숙하며 유럽 20개국을 도는 것은 검소하고, 유서 깊은 도시에 장시간 머물며 고급스러운 강좌를 듣는 것은 사치스러운가?

 

그 동안 여행기중독자의 생각이 짧았고, 가슴이 좁았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평생 좋아했던 어떤 일을 정식으로 배워보는 일, 오매불망 가고 싶었던 도시에서 잠시나마 그곳 주민이 되어 생활하는 일, 천천히 걸으며 인생의 지난날들을 추억하는 일, 선생님들을 보며 일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을 알아가는 일, 각국의 동료 수강생들과 우정을 쌓아가는 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Learning Travel'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책을 펴보니 호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일단 이런 종류의 여행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여행기중독자는 사진이 강조된 여행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 이유는 여러분이 예상하는 바와 유사할 것이니 늘어놓지 않기로 한다). 또 저자가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라는 점도 눈에 띄었다. 이것저것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런 강좌에서는 뭘 듣는 걸까. 퓰리처상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받는 것일까. 사람들이 이런 핫한 도시들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여성적 감성으로 쓴 여행기의 매력은 무엇일까.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여행기가 뭔가를 궁금하게 만들기 시작했다면 그 여행기는 끝까지 읽게 된다. 말하자면 이 책의 원제가 '호기심 많은 여성의 모험'이듯이, 여행기중독자는 '호기심 많은 남성의 모험'을 떠나게 된 것이다.

 

기자본색

 

저자 '앨리스 스타인바흐'는 20년 동안 '볼티모어 썬'지의 기자 겸 칼럼리스트로 활동한 바 있는 기자출신 작가이다. 1995년에 맹인 소년에 대한 특집기사 "A Boy of Unusual Vision"으로 그해 퓰리처상 '특집기사부문'을 수상했고, 그 후 휴직을 하고 여행을 갔다 와서는 첫 여행기 <앨리스 30년만의 휴가 Without Reservations(2000)>를 썼다. 그녀는 결국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 '퓰리처상 수상기자'의 프리미엄을 버리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세계를 여행하고 나서 책을 쓰기 위해 기자 일을 잠시 쉬고 나니, 오랜 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무척 힘들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직장을 그만두고 내 개인적, 직업적 열망 세 가지를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 세 가지 열망이란 바로 배움, 여행, 글쓰기이다. -  저자 서문 중에서 "

 

그녀는 전업 작가로 들어서며 기자생활과 단절하기보다 그 생활을 좀 더 넓게 확장하고자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정열적인 취재본능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재나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모든 것에 반응하면서 '새로운 발견'을 향해 노련하게 접근한다. 

 

그리고 카페나 숙소에 돌아와서는 '새로운 발견'을 재생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내면의 농밀한 변화를 기록한다. 이것이 그녀가 기자와 전업 작가를 넘나드는 풍경이고, 취재와 창작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그녀의 여행기는 진취적이면서 진솔하고, 감각적이면서 따뜻했다.

 

일곱 번의 배움, 일곱 번의 여행

 

기자와 작가, 그리고 학생과 여행자의 행복한 만남을 잠시 살펴보자.

 

'파리 리츠 호텔의 요리강좌 듣기'에서는 저자의 파리 스케치와 호텔 주방장들의 장인정신이 인상적이다. 파리, 요리, 일류호텔의 조합은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다. 호텔 지하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스탭들의 모습을 훔쳐보며 기자본색을 발휘하고, 요리와 도시문화의 기저를 관통하는 프랑스인들의 원칙을 찾아낸다.

 

'스코틀랜드의 목장에서 양치기개 길들이기'라는 강좌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과목이지만 읽고 보니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사람과 개와 양들이 벌이는 기싸움이 유머러스하게 펼쳐지고, 자연의 본성에는 물론 자신의 본성에도 충실하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알게 된다. 저자가 자연 속에서 생활하며 떠올리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의 추억들도 아름답다. 기자본색은 이 여행에서도 쉬지 않는다. '양떼 몰기 대회'에서 인터뷰하기 가장 까다롭다는 참가자를 만나 그의 속내를 알아내고야 만다.

 

'피렌체에서 예술 강좌 듣기', '윈체스터에서 제인 오스틴 따라 걷기'는 지성과 감성이 잘 어우러진 여행이다. 개인적으로는 도대체 몰입할 수 없었던 제인 오스틴의 작품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 큰 소득이었다. 책을 배우는 것보다 사람을 배우는 것이 쉽다는 말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제인 오스틴이 살던 곳에서 그녀의 비극적이었던 삶을 돌아보고나니 그녀의 소설에 다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한편 '교토에서 전통춤과 다도를 배우기'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무래도 서양인들은 일본에 대한 환상이 과한 것 같다. 종이학 접기를 '종이공예'라고 하는 것도, 게이샤의 정체를 끝없이 파고드는 이유도 공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작가는 '체코 프라하에서 글쓰기 수업 듣기'에 이르러 그녀의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신뢰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서, '배움과 여행과 글쓰기'가 결합하여 일으키는 화학작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글쓰기 강좌의 풍경과 헌책방에서 발견한 사진 한 장으로 저자가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빛나는 연금술'이라는 이 여행의 소제목이 아깝지 않다.

 

그리고는 '프랑스 아비뇽에서 프로방스식 정원을 탐닉하는 여행'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다양한 '비밀의 정원'에 대한 묘사가 아름답고, 정원에 담긴 자연의 순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당장 가꿀 정원은 없지만, 계속 정원에 관심을 갖는다면 가까운 공원 한 구석에 나에게 맞는 나무그늘 하나쯤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을 때쯤, 여행기중독자가 애초에 품었던 궁금증들이 스르륵 풀려 있었다. 퓰리처상을 받은 그녀는 진취적이면서도 진솔한 사람이었다. 어떤 강좌에서든 우리는 심오한 진실과 아름다운 추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사람들이 왜 이 도시들을 선호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도시의 외양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원칙과 정서의 산물이다. 따라한다고 해서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며, 그 이전에 우리의 원칙과 정서를 잘 가꾸어야 할 일인 것 같다. 여성적 감성?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니 이 책에 대한 느낌으로 한정하자면) 재치 있고 따뜻했다. 때로는 외롭고, 그래서 때로 뜨거웠다.

 

일생에 한 번, 한 달의 자유 시간

 

책을 읽는 내내 여행기중독자는 아내를 생각했다. 'Learning Travel'은 개고생 여행을 지향하는 여행기중독자보다는 가사와 육아로 자유 시간을 잊은 지 오래인 아내에게 더 좋을 것 같다. 일단 여자 혼자 가더라도 사전준비만 잘 한다면 안전하고 유익할 것이고, 여행 중에 낭패를 볼 가능성도 낮을 것이다. 물론 남편과 자녀가 없으니 공부도 더 잘 될 것이다.

 

저자처럼 일 년 반 동안 전 세계를 순회하지는 못하더라도 일생에 한 번, 한 달 동안만이라도, 가보고 싶었던 도시에서, 좋아하는 내용의 강의를 들으며,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는 여행, 생각만 해도 설레인다. 어쩌면 그 동안 방치해온 숨겨진 재능이 꽃을 피울지도 모를 일이고, 인생의 전환점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생에 걸쳐 가장 특별한 추억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곳곳에서 출현하는 잘 생긴 남자들이 복병이긴 하지만 여유가 생긴다면 정말 큰맘 먹고 한 번 가볼만한, 보내볼만한 여행이다. 일단 생각만 해도 즐겁고 뿌듯하다면 가야 할 도시는 어디이고,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국내와 국외를 막론하고 찾아볼 일이다. '당장'은 아니고 '언젠가는'이라서 씁쓸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모든 여행은 언제나 '언젠가는'으로 시작되는 법이니까. 봉 보야지 마담~ .


한 달에 한 번씩 지구 위를 이사하는 법

앨리스 스타인바흐 지음, 김희진 옮김, 웅진지식하우스(2009)


#한 달에 한 번씩 지구 위를 여행하는 법#웅진 지식하우스#앨리스 스타인바흐#LEARNING TRAVEL#세계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