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 돈 때문에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바로 무상의료다. 영국은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고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대표적인 무상의료의 나라다. 의료 서비스의 질과 재정 문제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60년 넘게 무상의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불평등과 의료시장 민영화 등 한국사회 의료 문제의 해법을 영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
취재: 송재걸 시민기자정리: 박순옥 기자2009년 12월 우리나라는 암 환자의 본인 부담률을 10%에서 5%로 낮췄다. 그렇다면, 암에 걸리면 집안 기둥 뿌리 뽑힌다는 말은 옛말이 됐을까? 그렇지 않다.
올 4월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암환자의 건강보험 보장률은 2006년 71.0%에서 2008년 69.8%, 2009년 67.7%로 점점 떨어지고 있다. 본인 부담률을 낮췄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답은 '비급여 진료비'에 있다. 선택 진료비, 병실료 차액, 주사료 등등이 비급여 처리되면서 암 환자의 본인부담률은 되레 2007년 20.5%에서 2009년 26.7%로 증가했다. 건보공단은 "빠르게 증가하는 비급여 진료비에 대한 공적관리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비급여 진료비 때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인 치료를 꺼리거나 치료비 걱정을 하며 지낸다. 암 환자의 본인 부담률이 5%라는데 여전히 각종 암 보험 광고가 성업을 이루고 갖가지 보험 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항암치료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돈 걱정 없었다"
지난 23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만난 프라디바 초한(Pradibha Chawhan, 55)씨는 2010년 9월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았다.
유방암은 영국에서 발병률이 높은 암 중 하나로 매해 4만 6000명의 여성들이 이 병에 걸린다. 때문에 영국 정부는 50~70세 여성을 대상으로 3년마다 정기 검진을 실시하고 있다. 그 수만 해도 160만 명에 달하는데 초한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유방암 진단 이후 그는 6개월 동안 6번이나 선행 항암화학요법을 받았다. 항암 치료로 종양 크기를 줄인 다음 종양제거수술을 받기로 한 것. 항암치료는 그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간호사가 주사를 놓으러 매일 우리 집으로 찾아 왔습니다. 한 3일 정도는 견딜 만했어요. 하지만 나머지 4일은 무척 고통스러웠어요."우리나라에서도 항암치료를 받을 때는 입원을 하지 않고 외래를 이용하기도 한다. 여기에 영국에서는 환자가 병원을 찾아가지 않고 집에서도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입원 병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환자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 가족들에게 돌봄을 받는 게 투병에 더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초한씨가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의 힘이 컸다.
"항암 주사가 어찌나 독한지... 너무 힘들었어요. 먹지도 못하고 성격도 예민해졌어요. 하지만 가족들은 저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는 가끔씩 가족들에게 화를 냈죠(웃음)."힘든 6개월이 지나고 초한씨는 종양 제거수술을 받았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이후 방사선 치료가 3개월 동안 이어졌다. 항암치료와 종양 제거술, 방사선 치료를 거치면서 초한씨는 탈모와 식이장애 등 소위 부작용을 경험했다. 유방암에 걸린 많은 여성들이 우울증 등 정신적 어려움을 경험한다. 하지만 초한씨는 무척 밝고 긍정적이었다. 왜 일까?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정말 친절했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환자들과 소통했어요. 아무 격식 없이요. 농담 따먹기도 자주 했어요(웃음)."초한씨는 자신이 충분히 '케어(돌봄)' 받고 있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그는 유방암 발병 사실을 전하던 의사가 얼마나 친절하게 자신을 위로해 주고 걱정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한 친절함은 투병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절한 영국 의료진에 대한 칭찬은 인터뷰 내내 이어졌다.
"내가 영국에 산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또 그가 영국 의료 서비스에 만족하는 이유는 바로 '무상'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무 걱정됐어요. 하지만 돈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어요. 저는 영국에서 40년 넘게 살고 일해 왔거든요."모든 환자가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NHS(National Health Service)의 나라 영국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초한씨에게 큰 안도였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는 1년 가까이 유방암 치료를 받으면서 돈 한푼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처럼 유방암과 싸우는 여성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미국의 일부 여성들은 비용 때문에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한다는 것도.
"미국의 상황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잔인한 일이지요. 치료비가 없어서 사람이 죽는다는 건 절대 일어나서 안 됩니다."우리나라에서도 유방암은 치료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암으로 꼽힌다. 올해 초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 발표에 따르면, 2001~2005년 암 진단을 받은 30만 4681명 가운데 유방암 사망환자의 총 진료비가 2079만 원으로 가장 많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방암 환자는 2005년 5만 8000여 명에서 2009년 8만 8000여 명으로 급격한 증가 추세에 있다.
초한씨는 "국가가 개인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며 "국가가 그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주위에도 암에 걸린 사람이 많지만 대부분 NHS 의료 서비스에 만족한다고 전했다. 치료비 부담이 없어 환자들의 정신적인 부담이 줄어든다는 것.
초한씨는 아직 유방암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저는 아직도 유방암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어요. 하지만 전보다는 좋아졌죠. 매순간마다 열심히 싸우는 거죠."<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 남소연·박순옥 기자, 송주민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