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별로 답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요.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어떻게 이것이 사회주의예요? 주주가 주주권을 행사하는 것인데, 자본주의죠."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최근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경영권 박탈에 대해 재계에서 '연금사회주의'라는 지적이 있다고 묻자, 그는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곧장 말을 이었다. "재벌총수들이 다단계 방식으로 계열사들을 동원해서 적은 지분으로 그룹을 좌지우지하는 전근대적인 체제가 자본주의 원리를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장. 유 원장은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시절부터 후진적 재벌 지배구조와 경제 민주화에 꾸준히 목소리를 높여온 진보적 성향의 경제학자다.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주요 경제정책을 만드는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IBK파이낸스타워에서 기자와 오래만에 마주 앉았다. 그는 이날 오후 KDI대학원 동문을 대상으로 한국경제 특강을 앞두고 있었다.
- 오래동안 경제민주화에 대해 이야기 하셨는데, 이번 대한항공 주총을 어떻게 보셨어요.
"우리나라의 총수자본주의라는 시대착오적인 형태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에 균열을 내는 첫 발자국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봐요. 재벌총수가 이렇게 물러난 적이 없었으니까요."
- 이번에 국민연금의 역할이 컸죠.
"과거에도 국민연금에서 (일부 기업 주총에서) 반대 의사를 낸적이 있었죠. 하지만 한진 조씨 일가에 대해선 이미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상황에서, 소액주주 뿐 아니라 기관 투자자 입장에서 도저히 안되겠다는 공감이 이뤄졌던 것이고, 책임을 물었던 거죠."
- 주총 결과가 나오자마자 대한항공 주가가 크게 올랐더군요.
"(웃으면서) 당연히 그럴수 밖에 없죠. 정상적인 회사라면 기업을 잘 경영하고, 주주가치를 높여서 기업 구성원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사람을 (이사로) 뽑는 것이 맞죠. 단지 누구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회사를 이끄는 시대는 아니예요."
- 이번 주총 결과를 두고 기업쪽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고개를 흔들며) 정확히 말하면 기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예요. 재벌총수와 일부 측근들이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인데... 기업 입장에선 오히려 투명성이 높아지면서 스스로 경쟁력을 높일수 있는 기회인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죠."
"재벌 소유지배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때"
그는 촛불시민들의 요구를 들면서 "전직 대통령은 감옥에 가 있는데도, 재벌 총수들은 여전히 그렇지 않은 현실"이라며 "이번 주총은 이같은 현실에 균열을 내고, 변화를 만들어갈수 있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고 말했다. 또 앞으로 재벌 소유지배구조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개혁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이번 기회를 통해 재벌의 소유와 경영에 대한 분리 이야기도 나옵니다.
"여전히 현행법상 재벌 총수 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지분은 적은데 지배권을 뻥튀기할수 있도록 돼 있어요. 제도의 허점을 더 인식하는 계기가 돼야하고, 앞으로 바꿔야죠. 물론 자신이 회사 지분을 100% 갖고 있거나, 51%를 가지면서 소유와 경영을 할 수도 있죠. 예를들어 중소기업이나 동네 가게 사장님이 자기 가게를 맘대로 하더라도 누가 뭐라고 하나요."
- 그렇죠.
"하지만 대기업들은 다르다는 거예요. 자기와 가족들 지분을 다 합쳐도 5%도 안되는데, 황제경영이다 뭐다 하면서 그룹을 좌지우지하고, 또 땅콩회항부터 직원에 대한 온갖 폭행과 폭언 등 갑질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이런 행태를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완을 해야죠."
- 그런 면에서 현 정부의 재벌정책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아쉬운 부분이 있죠. 재벌에 대한 한국경제 의존도라든지, 지배구조의 실상이라든지, 재벌 행태라든지, 과연 얼마나 변화가 있었는가, 국민이 체감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봐요. 물론 공정위도 나름대로 재벌의 일감몰아주기 등을 개선한 부분이 있죠. 하지만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재벌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의 목소리에 비하면 미흡한 것이 사실이죠."
그와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우리의 현 경제상황으로 이어졌다. 최근 국내 주요 경제지표들이 줄줄이 추락하면서 한국경제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유 원장은 "지금은 단순히 경기부양을 할 상황이 아니다"면서 "현 정부가 출범한 지도 2년이 넘었고, 경기에 대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 오늘 강연자료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선제적 뉴딜 정책'이라는 표현인데요.
"지금 우리 경제상황이 통상적인 상황이 아니예요. 요즘들어 OECD부터 한국경제 전망치를 내리고 있잖아요. 우리 경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세계경제가 하락세로 접어들고 있고, 이미 유럽, 중국, 미국도 위험신호가 나오고 있죠. 우리도 수출을 비롯해 투자, 소비 등의 수치들이 계속 하락하고 있어요."
- 통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환자에 비유하면, (우리 경제가) 지금 수술을 해야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라는 거죠. 하지만 아직 체력이 약하고 (수술 할만한) 상황이 안되니까, 우선 영양제를 맞고 체력회복을 하고, 수술을 할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한국경제, 수술 급한데 아직 체력 안되는 상황... 정부가 선제적으로 나서야"
- 영양제라면 재정 투입, 추가경정예산을 말하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현실적으로 IMF(국제통화기금)에서도 정부의 재정 투입을 권고할 정도예요. 물론 정부주도의 경기부양은 잘해야죠. 잘못하면 부작용만 드러날수도 있어요. 과거 이명박정부의 4대강 사업처럼... 글로벌 금융위기 때 정부 재정투입을 통한 경기부양에 대해 지지했었죠. 문제는 토건사업이 아닌 미래를 위한 제대로 된 투자가 이뤄졌어야죠."
- 미래를 위한 제대로 된 투자라면?
"좋은 프로그램을 발굴해야죠. 굳이 말로 하자면, 그린뉴딜, 디지털뉴딜, 휴먼뉴딜 등이예요. 미국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그린 뉴딜정책을 했었죠.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나라 많은 건물과 주택 등이 노후돼 있어서, 에너지 효율면에서 크게 떨어져 있어요. 이것을 보수하면, 고용창출도 되고 주거환경도 쾌적해지고 에너지 효율도 높일 수 있죠. 앞으로 기후온난화는 국가차원에서 대비를 해야하는데, 이런 사업을 많이 발굴할 필요가 있고..."
기자가 '과거 이명박 정부도 녹색성장을 표방했었다'고 하자, 유 원장은 "이산화탄소 배출 문제를 비롯해 친환경과 대체에너지 등은 더이상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린 뉴딜과 함께 '디지털 뉴딜'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사회전반에 걸쳐 디지털 혁신에 대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고, 정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해야 한다"면서 "청년층들이 쓸데없는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지 않고, 디지털 혁신사업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 휴먼뉴딜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
"예를 들면 사람 돌봄 서비스는 전문성을 갖도록 해야돼요. 사회복지 서비스를 한차원 끌어올려야 합니다. 얼마전 <이코노미스트> 보도를 보니까, 선진국에서 매년 인구 6명 중 1명 정도가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들을 위한 정신과의사, 심리상담사가 부족하다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이들 나라보다 훨씬 열악하죠."
- 요즘 주변에서도 정신상담 등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선진국에선 소비에서 가장 만족도가 높은 것이 심리상담이라고 해요. 아무리 좋은 것을 누리면 뭐하겠어요. 마음이 편해야지... 우리 사회가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취약하죠. 예전에 유학시절에 그때에도 미국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학교마다 심리상담사가 다 있었어요. 우리나라도 매년 심리학 등을 공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지금 그 친구들 전부 공무원시험에 매달려 있잖아요."
그는 "국민소득이 3만불이 됐는데, 우리나라도 질 좋고 전문성있는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야한다"고 말했다. 유 원장은 "태어날 때부터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우리 사회의 복지 수준을 올려야 한다"면서 "전문성있는 복지사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혁신의 혁신'을 위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단기적인 성과주의를 넘어서 정부와 기업, 경제주체들이 스스로 사람중심의 미래를 위한 투자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이다.
"이제 우리가 사회가 총체적으로 변해야죠. 산업정책을 봐도 그래요. 우리가 항상 듣는 이야기가 '하드웨어는 강한데, 소프트웨어는 약하다'고 하죠. 왜냐하면 그동안 우리는 자본 축적에만 집중했지, 사람을 제대로 키우지 않았죠. 지금도 우리나라 공장에 가보면, 전 세계적으로 압도적으로 로봇이 가장 많은 나라예요. 그만큼 자동화가 엄청나게 돼 있다는 것인데, 사람을 제대로 쓰지 않아요. 그런데 결국 그것이 부메랑이 되고 있는 거예요. 일자리가 줄고, 청년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으니... 아니 극단적으로,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려면, 노동자가 있어야지 착취를 하지 않겠어요? 착취할 노동자가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