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술에 대해 좋은 기억이 없었다. 첫 만남부터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으니까. 1993년에 대학교에 입학하니 신입생 환영회에서 '사발식'이란 걸 했다. 일종의 통과의례였는데, 거대한 짜장면 사발에 막걸리를 넘칠 듯 말 듯 찰랑찰랑 채워놓고는 단숨에 들이키라는 게다. 내가 마시는 척하며 술을 흘릴까 봐 한 선배가 능숙하게 사발 하나를 밑에 받치던데, 당신들은 다 촘촘한 계획이 있었구나. 바로 이어진 소주 삼배주. 에휴… 글을 쓰면서 당시 장면을 떠올리니 당겨진 방아쇠에 총알이 튀어 나가듯 장탄식이 나온다.
은연중 그 문화에 젖어 든 나는 이듬해 사발식 시범 조교로 활약했지만, 솔직히 술이 맛있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냥 분위기 맞춰 취하게 만드는 게 술의 기능이자 역할이라고만 여겼다. 대체로 맛은 쓰고 불편했지만, 뭐 얼큰하게 취해서 왁자지껄 떠드는 것 자체는 나름 흥겨웠으니까. 하지만 공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적성에 맞지도 않은 직장생활 및 사회생활을 하면서 각자도생의 스산한 인간관계에 치이니, 알코올 기운 빌린 억지웃음이 난무하는 분위기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안 그래도 맛있다고 느껴본 적도 없는데 그 사회적 기능성과 역할까지 상실하니, 술은 내 인생에서 그 존재감을 시나브로 상실해갔다. 그동안 내 인생도 많이 달라졌다. 대학원에서 반도체 소자를 전공한 경력을 살려 연구원으로 일하던 나는, 5년 남짓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쓰는 작가로 변신했다.
직장 시절만큼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니 다행히 삶에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다. 삶의 지향과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새로이 인간관계를 맺으니, 알코올 기운이 넘치는 술자리에서 다시 흥겨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만 여전히 술이 맛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휘청휘청 흐느적거리는 분위기에 젖어들 뿐.
그러다가 서력 2015년 9월 6일(나에게는 와인력 1년 1월 1일) 우연히 한 와인을 만나고 그 풍미와 매력을 아는 몸이 되었다. 성경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원래 예수 믿는 이들을 비난하고 핍박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이가 신비로운 종교 체험 후 목숨을 걸고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변신했다는데, 와인이 종교라면 내가 딱 사도 바울이구나. 신(술)을 믿지 않고 꺼리던 내가 특정 신(와인)을 접하고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진심과 성심을 다해 귀의하게 되었으니.
생계형 사회과학 작가에게 여유롭고 호화로운 와인 생활은 애초에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고 애절하게 마셨다. 할인가라는 말에 사로잡혀 눈탱이 밤탱이를 당하기도 하고, 와인이 변질된 줄도 모르고 꿀껄꿀꺽 마셔대고, 큰맘 먹고 산 비싼 와인이 입맛에 맞지 않아 좌절도 했다.
하지만 맨땅에 헤딩했던 그 시간 덕에 와인 초심자에게 가장 필요한 사항들을 뼛속 깊이 체득할 수 있었다. 그 노하우를 오마이뉴스에 '임승수의 슬기로운 와인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으니 바로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이다.
이 책은 와인교에 귀의한 한 사내의 좌충우돌 신앙생활을 솔직담백하게 담고 있다. 첫 만남의 그 신비로운 체험에서 시작해 고진 박해(아내의 등짝 스매싱)와 경제적 어려움(가산탕진)을 이겨내며 자신의 믿음을 견지하는 신실한 성도의 모습을 거짓 없이 유쾌하게 그려낸다.
우리가 믿는 신(와인)은 극도로 섬세한 쾌락주의자이기 때문에 그 은혜를 온전히 영접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숙지해야 할 교리와 십계명이 있다. 그것을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신은 절대로 우리에게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수백 회의 영적 체험을 통해 몸소 확인했다. 이미 신을 영접한 이들에게는 이 책이 훌륭한 간증서가 될 것이며, 이제 갓 신도가 된 이들에게는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안내자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와인 정가에 속지 않는 법부터, 가성비 와인 리스트, 와인에 맞는 안주 고르는 법과 와인 잔 선택하는 법, 라벨 읽는 법, 더 맛있게 와인을 마시는 꿀팁까지 당장 와인을 마시는 데 필요한 알짜 정보들로 가득 모았다. 어렵고 방대한 기존의 와인 이론서와는 다르게, 맨땅에 전속력으로 헤딩한 박장대소할 에피소드들을 통해 누구나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와인 책으로 완성했다.
대학 시절 공학도였던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영향이 학창 시절을 넘어 직장생활 내내 계속되어, 결국에는 연구원 생활을 때려치우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사회과학 서적을 저술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런데, 그 마르크스 <자본론>에 버금가는 충격을 준 것이 바로 와인이다. 내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말과 글로 진보적인 사상을 전파하듯, 와인교 사도가 되어 신의 매력을 알리려 책까지 쓸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인생, 내가 생각해도 참 재밌다.
이 책이 독자들의 슬기로운 와인 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저자로서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독자 한 분 한 분과 와인으로 건배를 나누고 싶지만, 여건상 그럴 수 없음을 이해 부탁드린다.
어젯밤 마신 피노 그리지오의 여운을 음미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