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
가난한 사람들에게 겨울은 늘 을씨년스럽다. 이들에게 작은 온정이나마 나누고 싶은 마음을 갖는 건 누구나 인지상정이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면 응분 그러해야 한다. 스산한 세밑을 그나마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풍경이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 구세군(救世軍)이 운영하는 빨간색 자선냄비다. 엄마 손잡은 고사리손이 냄비에 가 닿는 순간, 누구나 자연스레 무장해제 된다. 나눔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구세군은 영국 감리교 윌리엄 부스 부부가 창시(1865)한 개신교 한 교파다. '세상을 구원하는 하느님 군대'를 표방하며 교인이 되는 것을 입대, 찬송가는 군가, 교회는 영(營), 교칙을 군율, 성직자를 사관, 신학교를 사관학교, 교인을 병사로 부르며 계급을 부여하는 등 군대식 조직체계로 운영된다.
이런 엄중한 규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복음 전파와 신앙 공동체 형성, 빈곤과 악을 타파하고 사회 개혁을 내세운다. 주로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사회선교사업과 교육, 기초 의료사업 등을 실천한다. 전 세계 구세군을 총지휘하는 '만국 본영'과 각 지역(나라)에서 구세군 사업을 지원하는 '지역사령부'를 둔다. 우리나라엔 '구세군 한국 본영'이 있다.
식민지확장과 1차 세계대전 영향으로, 서구에선 독점자본에 착취당하고 인간으로서 권리를 누리지 못하던 노동자들이 구세군 운동에 큰 호응을 보인 적도 있었다. 이렇듯 구세군은 사회 개혁운동과 궤를 같이하면서 성장해 왔다.
군대로 오인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한다. 뒤이어 정미7조약으로 나라는 껍데기만 남고, 군대 해산으로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창시자 명령으로 한국 선교가 시작된다. 호가드 등 4인이 '개척대'로 서울에 도착(1908.10)하여, 돈의문 인근 평동에 본영을 설치한다. 초창기엔 '길 전도'라 부르는 길거리 집회를 열어 무작위로 입교를 권유하는 방식으로 선교한다.
의병이라는 시대 상황이 군대식 위계를 가진 조직체계와 부합해 큰 호응을 얻는다. 이런 영향으로 타 교파가 10년 걸려 이룩한 선교를, 구세군은 1년 남짓에 달성하게 된다.
여기에 웃지 못할 현실이 숨어있다. 통역을 맡은 조선인은 영어 설교가 서툴다. 선교사가 '보혈 속죄'를 말하면 '국권 회복'으로, '회계 성결'은 '나라 독립'이라 통역되는 형편이다.
이렇듯 기울어가는 나라에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상황에서, 가슴 뜨거운 젊은이들이 통역사 말을 듣고 입교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여기에 군복 입은 영국인들이 '입대'를 권유하니, 마치 의병에 지원하듯 지원자가 몰려든 것이다.
치외법권에 기대는 심리도 작용한다. 심지어 충청도에서 '구세군에 입대하면 군복과 신식무기를 준다'는 방이 붙고, 이렇게 '병사'를 모집해 군사훈련을 하기도 했다.
일제 감시기구가 작동해 선교사 길 전도의 위험성과 오해가 해소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길 전도가 잦아들고 '구세신문' 창간호(1909.07)를 통해 교인의 정치참여를 강력하게 경고하게 된다.
의병에 몸 담으려는 각오로 몰려든 청년들이 떠난다. 애국적 연설을 통해 길 전도를 주도한 통역사도 떠난다. 그러함에도 평동에서 시작(1910)된 사관학교는 매년 10∼20여 명 사관을 배출시킨다.
조선인 배척사건
만국 본영 2대 사령관 브람웰 부스 칠순(1926)을 예비하여, 한국 본영도 대대적 행사를 개최한다. '미주 순회단(1925.12)'이 북미를 돌면서 칠순 기념사업 모금을 마치고 귀국(1926.06)한다. 8월엔 5대 한국 사령관 토프트가 부임한다. 11월엔 만국 본영 사령관 브람웰 방한도 계획되어 있다. 모두 축제 같은 일이다.
하지만 한국 본영 내부는 전혀 다른 갈등을 안고 있었다. 오랜 시간 영국 사관의 공공연한 인종차별이 만국 본영 사령관 방한을 기화로 터져 나온 것이다. 교인 김덕준이 '인종차별'에 항의하고 나선다.
그는 '조선인을 무시하거나 야만시하는 영국인 사관의 태도를 고칠 것, 작전 운영(교회 운영)에 조선인을 참여시킬 것, 선교사업에 조선인 사관에게도 주요임무를 맡길 것' 등을 담은 진정서를 토프트에게 제출한 것이다. 토프트는 즉시 그를 면직시켜 버린다.
이에 김덕준에 동조하는 조선인 사관이 집단으로 항의한다. 브람웰 방한(11월) 시 직접 전달할 진정서를 20개 조항으로 확대 작성한다. 조선인 사관의 브람웰 면담을 토프트가 원천 봉쇄한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브람웰 전도 집회(11.07) 때 설교 대에 올려놓은 진정서를 토프트가 압수해 간다. 그러자 조선인 사관이 북 치며 노래 부르고, 집회는 난장판으로 끝나고 만다. 이틀 후 아현동 군영에서 개최된 사관 집회에서도, 조선인 사관들이 예의를 차리지 않고서 행동으로 항의한다. 이로써 브람웰 방한은 '항의 농성'으로 일단락되고 만다.
브람웰은 13일 출국하면서 '군율로 처리하라' 명한다. 이로써 20명 남짓 조선인 사관이 '명령 불복종' 사유로 면직당하는데, 이는 총 조선인 사관의 1/3에 해당하는 수였다. 이들은 '조선구세군 개선연결대(改善連結隊)'를 구성, 개혁을 촉구하고 나선다.
주일마다 사관들 출입을 놓고 옥신각신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마침내 경찰이 출동하여 농성 중인 조선 사관을 연행해 간다. 경찰개입으로 일부는 '회개'하고 복직되지만, 많은 젊은 사관이 떠나고 만다. 이로 인해 5개 영과 13개 분영(分營)이 문을 닫아야 했다.
이 사건 당사자로 지목된 영국인 사관이 서인도제도로 전출(1927.06)되고, 토프트 사령관이 별세(1928.06)하는 원인이 된다. 나아가 후임 조셉 바 사령관이 부임하여, 조선 사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계기로 작동하기도 하였다.
본영 사령관 칠순 선물
고종이 승하하고 3.1운동이 지난 후 일제는 본격적으로 덕수궁을 훼철하기 시작한다. 역대 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덕수궁 선원전을 헐어 창덕궁으로 옮겨버린다. 선원전 일대를 차례로 매각하면서, 미국 공사관을 지나 정동교회까지 연결되는 도로를 개설(1922)한다. 선원전 터에 방송국과 학교가 차례로 들어서 대한제국이 신성시하던 선원전 일곽(一廓)이 속절없이 사라지고 만다.
구세군은 배척사건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기업가들 모임인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가 소유하던 땅 2,813㎡(851평)를 매입(1927.06), 선원전 부속 건물을 헐고 730㎡(220평) 규모로 '사관학교' 신축에 들어간다. 이렇듯 브람웰 칠순 기념 선물은, 미주 순회단이 모아 온 7만 원 기금으로 완공(1928)된다.
2층 붉은 벽돌 건물은 엄격한 좌우 대칭 르네상스 양식이다. 안정감 있는 '수평적 균형감각'을 잃지 말라는 사관학교 특색을 강조한다. 전면엔 4개 토스카나 양식 돌기둥을 세우고, 그리스 신전 박공지붕을 얹어 권위와 위엄을 과시한다. 양 측면에 협문을 두고, 박공지붕 아래 둥근 창과 네모난 창을 순차적으로 배치하였다.
사관학교 교육 기간은 1년이다. 남녀를 엄격히 분리해 교육한다는 원칙에 따라, 내부 공간도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1층엔 기숙사, 식당, 사무실 등이 2층에는 강당과 교실, 선교사 숙소가 남녀용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해방 후 부분 구조 변경이 여러 차례 있었다.
집이 완공되는 시기에 자선냄비 운동도 시작된다. 1938년엔 일제가 신사참배 강요하자, 28기 생도 전원이 거부하는 결의문을 작성해 항거하다 투옥되는 탄압을 겪는다. 1943년 일제 강제 폐교로 건물은 조선교학도서회사에 임대된다. 한국 전쟁 때는 북한 내무성으로 징발당한다. 전쟁 참화에 여러 교인이 순교하는 등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1·2층 일부 증축과 강당 천장을 높인 후 '구세군 한국 본영' 사무실이 입주(1959)하면서 '구세군 중앙회관'으로 이름한다. 사관학교가 과천에 새집을 지어 이사(1985)하고, 건물은 여러 용도로 전용되다 지금은 '정동 1928'과 '구세군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2019.10.04)하여 문화와 역사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세상을 구원하는 하느님 군대'라는 거창한 이름 이면에, 세상을 섬기고 일반 대중사회와 소통하며 늘 낮은 자세로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어느 곳이라도 좋으니, 빨간 자선냄비 종소리만큼은 부디 영원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