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 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
옛 경성재판소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바뀌고 난 후, 어린 딸아이 손을 잡고 전시 중이던 그림을 구경하러 여러 번 이 집에 간 적이 있다. 오르세미술관 전부터 반고흐, 모네 등등으로 기억한다. 어느덧 성인이 된 딸은, 지금 이 집을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북쪽을 향한 집 얼굴은 무척이나 차가운 인상이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가진 집은 죄가 없다. 설령 뱀의 얼굴을 하였을지라도, 이용하고자 의도한 자들이 숨겨진 추레한 욕망을 집의 얼굴과 표정에 그렇게 투영했을 뿐이다.
일제는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가두고 죽이는 도구로 이 집을 지었다. 수많은 독립투사와 애국지사가 이곳에서 억울한 판결을 받아 투옥되거나 불귀의 객이 되어야 했다. 분단된 남쪽의 나쁜 권력은 이 집을 정권 유지 보조 수단으로 써먹었다. 이 집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와 선량한 시민을 또 그렇게 만들었다. 진보당 사건이 그렇고 인혁당 사건이 그렇다. 70∼8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많은 이들도 이 집에서 비슷한 판결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일제와 나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집은 67년 만에 강 건너로 이사했지만, 이 집에서 거리낌 없이 나무망치를 두드렸던 자들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진 건 아니다. 아름다운 그림을 상설 전시한다고, 집에 대한 부끄러운 역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핍박과 저항은 어떤 관계를 통해서도 변치 않는 '상수'라는 사실을 뱀의 얼굴을 한 이 집조차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독일 영사관
서울시청 서소문별관과 시립미술관 인근에 나라에서 세운 최초 근대식 학교 육영공원이 있었다. 갑신정변 후 세워진 육영공원(1886)은 지나친 영어 교육과 양반 자제만을 위한다는 비판과 재정난에 직면해 폐교(1894)되고 만다.
독일과 영국은 같은 날(1883.11.26) 조선과 수교한다. 타 제국과 달리 조선에 소극적이던 독일은 공사관 대신 영사관으로 만족한다. 독일영사관은 수교 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에 자리(1891.11.01로 추정) 잡는다.
아관파천 후 환궁한 고종은 경운궁을 정궁 삼아 제국을 선포한다. 아울러 황제국 위엄에 걸맞은 궐 확장을 꾀하면서 경운궁 주변에 강력한 토지규제 정책을 시행한다. 이 정책으로 많은 선교단체가 정동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
이때 독일영사관 터도 한국 정부 소유(1900.03)로 넘어온다. 정부는 회현동에 영사관 터를 마련해 주나, 독일은 1902년에서야 공관을 지어 이전한다.
한국 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가 덕수궁 돌담길도 폐쇄해 경운궁에 포함하려 시도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양 외교가에 파문(1902.05)이 일어 반대 여론이 비등한다. 고종은 한 발 물러나 계획을 취소하는 대신, 경희궁을 잇던 무지개다리처럼 양쪽을 돌다리로 잇는 방안을 제시한다. 덕수궁 돌담길을 이 다리로 건넜으나, 언제 사라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정동교회를 향해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보면 길이 휘는 언저리에 색다른 담장을 볼 수 있다. 화강석으로 쌓는 여느 사괴석(四塊石, 한 사람이 네 덩이를 짊어질 만한 입방체) 담장과 다른 모양새다. 7단 높이 석축이 궁궐 담장 일부를 이루는데, 이는 덕수궁과 길 건너 언덕을 잇던 무지개다리 흔적이다.
평리원(平理院)
대한제국 최고 사법기관 지위를 가진 평리원이 독일영사관 터에 자리하게 되는 때는 1902년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 최고 사법기관은 의금부였다. 갑오개혁(1894) 때 법무아문 소속 의금사(義禁司)로 개칭, 관원 비리나 죄를 수사 처벌하는 기능을 한다. 요즘 공수처의 기능이다.
그해 말 법무아문 권설재판소로 개칭하여 재판을 담당케 한다. 일제 간섭과 압박으로 이듬해 '재판소구성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 법을 근거로 근대적 재판소가 생기면서 지방·개항장·순회·고등재판소와 특별법원 5종을 둔다. 대한제국 선포 후 법을 개정(1899.05), 고등재판소를 평리원으로 바꾸어 최고 사법기관 지위를 부여한다.
평리원엔 이전에 없던 상급심제도를 도입, 지방·한성부·개항장 및 평양재판소를 총괄한다. 또한 황제 특별지시로 하달된 사건과 칙임관(대한제국 기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최고위 계급 공무원집단) 및 주임관의 구금·심판을 관장한다. 법부대신 결재로 판결효력이 발생하고, 민감한 국사범은 법부대신 지령으로 재판케 하였다. 평리원 구성원은 재판장·판사·검사·주사·정리(廷吏) 등이다.
을사늑약으로 법부와 사법행정 및 재판에 일본 간섭이 본격화 한다. 실질적으로 조선통감부 고등법원에서 평리원 재판기능을 빼앗아 간 셈이다. 아울러 통감부 휘하 정보기관이 정보수집과 경찰 기능을 담당하며 주로 의병 탄압을 주 임무로 삼는다.
일제는 감시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인 법무 보좌관을 평리원에 배치(1907.01)한다. 재판소 왕복 서류나 작성서류 일체를 보좌관 검인을 받도록 조치한다. 또한 검사 기소장이나 판사 판결문에도 그의 동의 도장을 받도록 강제한다. 재판을 좌지우지하는 실질적 사법 장악으로, 한국인 판검사는 보좌관 동의가 없는 한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정미7조약 체결(1907.07) 이전에 벌어진 일이다.
폐단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조선인 형량 차별은 예사였고, 특히 의병 사건 같은 민감한 사안에 일본인과 마찰 및 의견 충돌이 극심했다. 일본인 보좌관이 선고한 형량을 황제가 감형한 사례도 있다. 그나마 껍데기로 남아 있던 평리원 기능도 그해 말(1907.12.23) 폐지되어 버리고, 대심원(大審院)으로 개편되어 일제 손아귀로 넘어간다. 강제 병합 후 평리원 자리에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이 들어서 이곳 서소문동 38번지 언덕을 깔고 앉아 있었다.
일제 사법 타운
총독부는 재판제도를 지방·복심·고등법원의 3계급 3심제도(1912)로 재편한다. 이중 고등법원이 육영공원 터에 1914년 전에 자리한다. 친일파 양성소 및 일제 어용 자문기관으로 전락한 중추원(中樞院)과 함께다. 지금의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일원이다.
경성시구개수 수정(1919) 이후 일제는 사법기관 집적화를 도모한다. 서소문동 38번지 언덕에 대규모 법원을 신축한다.
당시 총독 사이토 마코토 글씨로 확인되는 '정초 소화이년(1927)십일월 조선총독자작재등 실(定礎 昭和二年十一月 朝鮮總督子爵齋藤 實)'이라 기록된 정초 돌이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1927년 즈음에 착공한 것으로 추정한다.
1927년 지도엔 동쪽에 고등법원과 중추원이 자리하고 점선으로 표현된 건물엔 '법원 신축장'이라 쓰여 있다. 1933년 지도 '고등·복심·지방법원'이란 글로 보아 법원완공(1928) 후 총독부 재판소 3계급 3심제도의 완성형이 이 언덕을 차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집은 온전한 정북향이다. 예전 도면으로 확인되는 평면구성은, 중정을 가진 동서로 길게 누운 '日'자 모양이다. 언덕을 차지한 집은 덕수궁과 주변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배치다.
수직으로 늘어뜨린 높다란 창을 낸 3층의 입면은 고압적인 자세를 연출한다. 겉을 황갈색으로 치장하고 1층 전면에 3개 아치가 있는 화강석 포치(Porch)를 두고, 전면 3층엔 4개 아치창을 냈다. 권위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파사드(Facade) 전면을 앞으로 조금 내밀고 3층 위를 약간 높이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무척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차가운 뱀의 얼굴이 연상되는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와 민족 지도자들이 억울한 판결을 받아야 했을까?
해방 후 대법원으로 사용된다. 독재 권력으로 점철된 어두운 우리 현대사 이면을 따라, 이곳에서 일제강점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판결들이 행해진다. 수많은 사법살인이 자행되고, 나쁜 권력이 정적 제거 목적으로 남용한 사법권도 부지기수다.
대법원이 강 건너로 이전(1995)하면서 당시 사법부가 "이 건물만은 꼭 보존해달라" 했다 전해진다. 어떤 근거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의문이나, 그리 자랑스러울 게 없어 보이는 집의 흔적을 간직하고 싶어 한 그들의 속내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조차 하다. 국가등록 문화재인 건물은 전면 파사드와 포치만 남긴 채 알맹이 전부를 갈아치우고 2005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냉혈한의 얼굴을 한 집에서, 그나마 이젠 문화의 향기가 풍긴다. 아픈 기억은 부디 고이 간직하고 맑고 밝은 향기만 오래도록 뿜어내는 집으로 거듭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