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9 04:49최종 업데이트 24.01.1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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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통령님께 유럽의 반도체 회사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이하 STM)라고 하는 유럽의 종합반도체 회사입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두 반도체 회사가 합쳐진 회사인데 본사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습니다.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싱가포르에 반도체 웨이퍼를 생산하는 팹이 있고 유럽과 아시아 몇몇 나라에 반도체 조립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그야말로 글로벌 반도체 회사입니다.

매출이나 영업이익 규모로 보면 독일의 인피니온, 네덜란드의 NXP와 함께 유럽 반도체 회사의 선두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회사입니다. 임직원은 5만 명이 넘는데 주로 만드는 제품은 마이크로컨트롤러(MCU), 자동차용 반도체, 전력 반도체, 사물인터넷(loT)에 쓰이는 시스템반도체입니다. 지금 제가 일하고 있는 회사라 조금 더 잘압니다.


생뚱맞게 STM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회사가 최근 두 건의 투자 계획을 연이어 발표했는데, 이게 미중 반도체 갈등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하고 있는 대통령님이 참고할 게 많은 사례라서 그렇습니다.

각 나라의 팹 유치 경쟁
 

STM과 GF가 프랑스에 합작하여 프랑스에 반도체 웨이퍼 팹을 짓는 계약에 사인을 하고 있습니다. ⓒ STM

 
지난 5일, STM은 미국의 파운드리 회사 글로벌파운드리(이하 GF)와 합작해서 프랑스 크롤 지역에 300mm 웨이퍼를 생산하는 팹을 건설하겠다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작년 7월 양해각서를 교환한 후 근 1년만의 성과입니다. 팹 건설에 75억 유로(약 10조원) 정도가 쓰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걸 두 회사가 반반 부담하는 게 아닙니다.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럽에 유치하겠다며 EU가 만든 "유럽반도체법"과 프랑스 자체적으로 미래산업에 향후 5년간 300억유로(약 41조원)를 투자하겠다는 "프랑스2030계획"에 의해 상당액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GF는 미국의 파운드리업체로 미국, 독일, 싱가포르에 팹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번 계약체결로 프랑스에도 팹을 운영하게 됐습니다. 국적도 사업 영역도 서로 다른 유럽과 미국의 반도체 회사가 EU의 대규모 지원을 받아서 최첨단 팹을 프랑스에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번 계약 이전에 독일 역시 미국의 인텔 팹을 자국에 유치하기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팹 하나가 들어서면 유관산업과 지역 경제에 끼치는 영향은 말 그대로 어마어마합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에 20조 원을 들여 만드는 팹 하나가 향후 20년동안 지역사회에 10조 원 이상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고, 2만여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기며, 공장이 들어서는 도시의 세수도 1조 원 이상 늘어난다는 미국 컨설팅 업체의 보고서가 공개된 적이 있습니다. 팹과 연관된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에게 주어질 새로운 사업 기회는 말할 것도 없구요.

글로벌 반도체 회사들은 본사가 어디에 있느냐와 상관없이 팹을 운영하기 좋은 곳이면 세계 어디든 찾아가서 팹을 짓습니다. 그 사정을 아는 각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팹 유치 경쟁을 합니다.

미국은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회사에 보조금을 줘가며 미국에 팹을 짓게 하고, 유럽은 미국의 반도체 회사가 유럽에 팹을 짓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싱가포르에도 마이크론, GF, STM, UMC, SSMC 등 세계 주요 반도체 회사들이 다 팹을 운영하고 있고, 대만의 UMC는 지금도 300mm 팹을 싱가포르에 건설 중입니다. 반도체 팹 경쟁에서 밀려났던 일본도 마이크론과 TSMC의 팹을 유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외국 반도체 회사들을 한국에 끌어들이려 하는 노력을 하고 있나요? 그런 거 없죠? 대신 삼성전자가 용인에 팹을 지으면 그 옆에 일본의 소부장 업체나 데려오겠다고 하고 있지 않나요? 앞서 말했듯이 팹을 지으면 다른 분야에 끼치는 경제적 효과가 큽니다. 그 효과를 해당 지역의 소부장 업체들이 누려야 마땅한 거고 그걸 위해서 각국은 팹을 자국에 유치하려고 하는 겁니다.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은 팹에 비하면 다른 산업이나 지역경제에 주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팹을 만들면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이 그 주변에 자연스레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대통령님은 어렵게 만든 우리 팹 옆에 일본 소부장업체를 데려다 그 과실만 가져가도록 하겠다니 반도체 업계에서만 30년 일한 저로서도 대통령님이 어떤 깊은 생각을 하고 그러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윤 대통령 집권 후 엉망된 반도체
 

STM이 중국의 사난 옵토일렉트로닉스(Sanan Optoelectronics)와 합작회사를 만들어 중국 충칭에 반도체 팹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 STM

 
STM의 두번째 투자계획은 좀 더 눈여겨 봐야 합니다. 현지 시간 지난 7일, STM이 중국의 사난 옵토일렉트로닉스(Sanan Optoelectronics)와 합작회사를 만들어 중국 충칭에 32억달러(약4조원) 규모의 반도체 팹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합작 회사에는 충칭시 정부도 자금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미국이 14nm 이하의 시스템반도체의 경우 장비와 기술을 중국에 판매하지 못하게 했지만 STM의 새 팹은 28nm라 그 규제를 피할 수 있습니다. 새로 만들어질 팹에서는 실리콘카바이드(SiC)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입니다. 대부분의 반도체는 실리콘 웨이퍼를 이용하는데 실리콘과 탄소를 화합한 물질인 실리콘카바이드 웨이퍼를 이용하면 전력 효율성과 내구성이 뛰어나서 전기차용 반도체, 산업용 전력 반도체 제조 등에 쓰이며 차세대 반도체로 불리고 있습니다. 중국은 전기차 산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어서 관련 반도체의 수요가 높은데 유럽 반도체 회사인 STM이 중국에 합작회사를 만들어 그 수요에 대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갈등 속에서 대통령님이 연일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중국에 있는 우리 기업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을 때 다른 나라들은 중국과 싸우는 대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국에 투자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중갈등 이후 더 이상 서방의 반도체 회사들이 중국에 반도체 회사를 세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기업들은 기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 갑니다.

대통령님은 지난 8일 반도체 국가전략회의를 주재하면서 "반도체 산업은 우리 수출의 약 20%, 제조업 설비투자의 55%를 담당하는 명실상부한 국가 기간산업"이라며 "반도체 경쟁은 산업 전쟁이고, 국가 총력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7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반도체 국가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반도체 수출 비중이 대통령님 취임 당시 21.4%였던 건 맞는데(2022년 6월), 지난해 8월 이후 10개월 연속으로 역성장하여 지난 5월에는 14.1%로 확 줄었습니다. 명실상부한 국가 기간산업이 대통령님 집권 이후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 자료를 토대로 만든 2021년 이후 반도체 수출액과 전년동기대비%. 2022년 8월 이후 10개월째 역성장 중입니다. ⓒ 이봉렬

 
반도체 경쟁이 국가 총력전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대통령님은 중국과 사사건건 다툼을 벌이며 우리 기업들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고, 그 와중에 유럽은 중국에 팹을 짓고 중국의 산업 수요에 적극 대응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국가 총력전은 유럽에서 하고 있고 대통령님 이하 우리 정부는 안 그래도 어려운 상황의 우리 기업들 발목만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이 말하는 국가 총력전이 우리의 반도체 주요 수출 대상인 중국과 험한 말로 대립하는 거라면 이제 그 정도에서 그쳐 주기를 바랍니다. 동냥은 못해도 쪽박은 깨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통령님께 하고 싶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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