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
음식에 술을 곁들여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은 대체로 즐거운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날만은 달랐다. 지금까지 와인을 마시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순간은 아내의 비명으로 시작되었다.
"으악!"
"왜 그래?"
"와인 맛이 갑자기 이상해. 한번 마셔 봐."
잔을 건네받아 조금 마셨는데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비린 맛이 감지되었다. 같은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유독 아내 잔의 와인만 이상한 것이다. 그 거북함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해서 차라리 푸세식 화장실 냄새가 낫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이거 정말 심한데?"
"조금 전까지 멀쩡했는데 왜 이렇지?"
"혹시 짐작 가는 것 없어?"
"모르겠어. 안줏거리가 떨어져서 미역줄기볶음 남은 것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같이 먹었는데 그때부터 그러네."
미역줄기볶음이라는 단어를 듣고서 비체험형 지식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오크 숙성을 한 와인이 비린내 나는 음식과 만나면 그 비린내가 증폭된다.' 저가 와인은 스테인리스 혹은 시멘트로 제조된 탱크에서 발효 과정을 거치지만, 고급 와인은 대체로 오크 통에서 숙성한다. 그런데 이 오크 숙성 와인과 비린내 나는 음식이 만나게 되면 그 비린내가 불쾌할 정도로 강화된다는 얘기다.
비체험형 지식 하나가 확인되는 순간
미역줄기볶음의 냄새를 맡아보니 마트에서 구입하고 며칠 지난 녀석이라 비린내가 좀 올라오고 있었다. 싱싱한 녀석이었다면 그럭저럭 괜찮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쨌든 아내의 시도 덕분에 관념적 지식이 드디어 구체적인 현실과 연결되었다.
아내의 잔에 담긴 와인은 싱크대에 죄다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잔에 비린내가 배어있어 세제를 묻혀 부드러운 수세미로 빡빡 닦으니 그제야 냄새가 가셨다. 와인와 비린내 나는 음식을 함께 섭취했다가 봉변당하는 일은 드물지 않아서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면 다양한 사례를 접할 수 있다.
예컨대 한 와인 유튜버는 친구들과 먹태구이에 와인 두 종류를 곁들여 먹는 영상을 찍다가 비린 맛에 당황하는 일이 벌어졌다. 저렴한 칠레 화이트 와인은 오크 풍미가 적어서 그런지 문제가 없었지만, 가격이 서너 배 비싸고 오크 풍미가 강한 미국 나파 밸리 화이트 와인을 마시니 비린 맛이 심했다. 참고로 와인 숙성에 사용되는 225리터 크기의 프랑스 오크통은 가격이 미화 800달러에서 2500달러에 이를 정도다. 그러니 오크 숙성한 와인이 더 비쌀 수밖에.
오크 숙성 와인이 음식의 비린 맛을 강화한다는 지식이 널리 알려지는 데에는 와인 애호가들이 즐겨보는 만화 <신의 물방울>의 역할이 크다. 이 만화의 2권과 3권에 걸쳐 굴 요리와 샤블리 와인의 조합에 관한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비린 맛 얘기가 나온다. 참고로 샤블리 와인은 프랑스 부르고뉴 샤블리 지역에서 샤르도네 품종의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굴과 사블리 와인은 프랑스에서 최고의 조합으로 여겨진다. 와인 한 방울 마셔 본 적도 없는 챗GPT가 이렇게 말할 정도다.
'굴과 샤블리 와인의 조합은 참으로 유명하고 요리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해산물과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클래식 페어링으로 간주됩니다. 은은한 짠맛과 부드러운 질감을 지닌 굴은 샤블리 와인의 산뜻한 미네랄 특성을 보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의 물방울> 주인공인 와인 평론가 토미네 잇세는 생굴 요리와 샤블리 와인을 함께 내놓은 한 프랑스 음식점에 대해 혹평을 남긴다. 음식은 맛있지만 와인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챗GPT도 알 정도로 최고의 궁합인데 왜 그럴까?
음식점에서는 신경 써서 오크 숙성한 고급 샤블리 와인을 내놓았지만, 앞서 언급했다시피 오크 숙성한 와인은 생굴의 비릿한 맛을 한층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또 다른 주인공인 맥주회사 직원 칸자키 시즈쿠가 등장해 식당 주인을 도와주는데, 페어링하는 와인으로 오크 숙성하지 않은 저렴한 샤블리 와인을 선택한다. 다시 식당을 방문한 평론가 토미네 잇세는 개선된 조합을 체험하고서는 좋은 평가를 한다.
와인과 비린 맛에 얽힌 소재를 다룬 만화는 또 있다. 단행본으로 100권이 넘게 출간되어 요리 만화의 원조이자 원로로 대우받는 <맛의 달인>에서는, 내가 직접 확인한 것만도 16권 <요리사의 열등감> 에피소드, 54권 <일본술의 실력> 에피소드, 74권 <황홀한 와인> 에피소드 이렇게 세 번이나 등장한다.
예를 들어서 16권 <요리사의 열등감>에서는 주인공 야마오카 시로가 콧대 높은 프랑스 음식점 요리사와 생굴에 어울리는 술이 무엇인지 대결을 펼친다. 요리사는 프랑스 식문화의 정석대로 생굴에 고급 샤블리를, 시로는 자신이 준비한 사케를 곁들이는데 참가자들이 하나같이 생굴과 고급 샤블리의 조합에서 비릿한 맛을 감지하고서는 사케가 더 낫다는 판정을 내린다.
요리사도 패배를 인정하며 자신이 프랑스인들의 권위에만 얽매였다고 반성한다. 눈치챘겠지만 <맛의 달인>은 <신의 물방울>과는 결이 달라서 아예 와인이라는 술 자체가 일본인이 즐기는 해산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비린 맛과 철분의 상관관계
아무튼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대체로 오크 숙성 와인이 비린 맛을 강화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미역줄기볶음과 연관된 개인적 경험을 통해 그것이 확증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다양한 자료를 조사하다가 진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일부 와인이 비린 맛을 증폭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인 연구자들이 2009년에 발표한 이 논문에서는 와인이 함유한 철분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논문이 여러 번 인용되고 해외 언론에서 논문의 연구 결과를 뉴스로 다룬 것을 보니 상당히 공신력을 인정받는 것 같았다. 참고로 이 연구원들은 1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와이너리 샤토 메르시앙 소속이며, 샤토 메르시앙은 일본 주류회사 기린의 자회사이다.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논문을 읽어보았다. 실험 참가자 7명이 말린 가리비를 69종의 와인과 함께 먹으며 비린 맛의 강도를 다섯 단계(0점:느낌이 없다, 4점: 매우 강하다)로 나누어 평가했다. 그 평가 결과와 와인에 함유된 다양한 성분 사이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는데 그중에서 철분이 강한 상관관계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와인의 철분 함량을 아는 것이 음식의 선택에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논문 저자들은 와인의 철분 함량을 예측하는 게 어렵다고 얘기한다. 철분 함량은 와인의 종류나 생산국과는 관계가 없으며 포도가 재배되는 토양, 포도 껍질에 묻은 먼지, 포도를 수확 및 수송하고 파쇄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기계 등 양조 전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구나! 오크 숙성 와인이 비린 맛을 증폭시킨다고는 하지만, 생선회에다가 오크 숙성한 화이트 혹은 레드 와인을 아무렇게나 마셔도 의외로 비리지 않았던 적이 있다.
오크 숙성하지 않은 화이트 와인이라 괜찮겠지 싶어 가리비찜을 곁들여 먹었건만 살짝 비린 맛이 올라오는 일도 있었다. 와인에 함유된 철분이 비린 맛 강화의 주요 원인이라면 이러한 일이 이해된다. 철분의 유입 경로를 오크 숙성만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물론 오크 숙성 와인이 대체로 비린 맛을 증폭시킨다고 얘기되는 걸 보면, 다른 양조 과정과 비교해 오크 숙성 과정에서 철분이 유입될 여지가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객관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고 보니 <맛의 달인>은 1983년, <신의 물방울>은 2004년에 연재를 시작했다. 이 논문이 발표되기 전이라 그런지 <맛의 달인>에서는 애먼 유기산염이 비린 맛 강화의 원인이라고 하고, <신의 물방울>에서는 오크 숙성 여부가 핵심 요인으로 언급된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정보를 유포했다며 비난할 일은 아니다. 고대의 유명한 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것은 우주의 중심으로 향하기 때문에 물체가 낙하한다고 하지 않았나.
과학이 관련 사실을 밝혀내기 전에는 역사에 길이 남는 대학자조차 아무 말 대잔치를 하게 된다. 다만 새로운 와인 만화가 연재된다면 이제는 비린 맛 에피소드를 다룰 때 철분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