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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명 조식 선생을 기리는 용암서원 앞에는 1555년 조선 명종이 내린 단성 현감직을 사직하며 뇌룡정에서 쓴 상소문(乙卯辭職疏?을묘사직소)이 새겨져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을 기리는 용암서원 앞에는 1555년 조선 명종이 내린 단성 현감직을 사직하며 뇌룡정에서 쓴 상소문(乙卯辭職疏?을묘사직소)이 새겨져 있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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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의 상소문은 그야말로 폭탄선언이었다.

조정 안팎이 발칵 뒤집어지다시피 소연해지고, 누구보다 왕을 '고아'라 불리고 대비를 '과부'라 호칭된 당사자들이 분기탱천했다. 명종은 승정원에 남명을 '불경군상죄(不敬君上罪)'로 다스릴 것을 명하였다. 군주를 불경하는 죄는 반역죄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리고 이런 상소를 미리 검토하지 않고 올린 대신과 승정원까지 문책하라고 엄명하였다.

이 상소문은 대체로 7가지를 담고 있었다. 첫째, 명종이 다스리는 현 조정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둘째, 그렇게 된 원인은 관리들의 파당과 이욕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왕실의 무능 때문이다. 셋째, 이같은 조정이 어떻게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겠는가. 넷째,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가 속속 국가적 위기의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섯째, 진정으로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 의지가 있다면 지엽적 제도나 율령으로 할 것이 아니라 임금 자신의 정신부터 고쳐야 한다. 여섯째, 그러자면 임금이 학문을 닦고 치도(治道)를 밝혀 대비나 척당·간신들에게 이끌리지 말고 왕이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일곱째, 이러한 정치풍토가 이루어진다면 나도 왕의 신하가 되어 관직에 나아가겠다는 결연한 선언이었다.

명색이 민주공화제의 나라에서 대통령을 비판하면 검찰이 수사에 나서고, 입틀막이 가해지는 등 온갖 독선이 자행되는 터에, 500년 전의 상황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왕의 명령은 사관과 경연관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사관의 평을 보면 조식은 일사(逸士)로서 야에 있는 자다. 비록 작록보기를 부운 같이 하나, 오히려 임금을 잊지 않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언사에 나타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른 말, 옳은 말을 솔직하게 하였으니 과연 그 이름을 헛되이 얻은 자가 아니다.

그야말로 어진이로다. 이러한 조 모의 소에 대해서 우답(優答)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글귀를 책잡아 승정원에게 평죄를 하라 명하니, 언로를 막는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고, 왕의 인격을 깎아 내림이 이보다 큼이 없다.

왕명(王命)이 이같이 나가면 이는 곧 일국의 입을 틀어 막는 것이 되어 아무도 감히 말할 수 없게 하는 일이니 애석하기 그지 없다 하겠고, 또 경연시 독관 정종연은 과부니 고아니 한 말은 조식의 생문(生文)이 아니라 중국 송나라 때에도 신하가 군주에 대해 쓴 일이 있음을 들어, 용어 문제로 인한 왕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고 오히려 직언직간한 조식의 소는 국가의 홍복이니 우대해야 한다고까지 상주했다. (주석 1)

당시 사간과 경연관들의 올곧은 직업윤리가 돋보인다. 비판 언론을 옥죄이고 생존권을 박탈하려는 권력자나 그 부역자들의 행위와 크게 대비된다. 이와 함께 남명의 학덕과 고결한 인품이 '불경군상죄' 따위의 그물로 묶기에는 너무 큰 인물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남명 선생 동상과 신도비, 을묘사직소 국역비 등이 남명기념관 앞에 세워져 있다.
 남명 선생 동상과 신도비, 을묘사직소 국역비 등이 남명기념관 앞에 세워져 있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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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 사람(남명을 일컬음 - 필자)은 유일지사(遺逸之士)이다. 옛 제왕은 산림에 묻혀 있는 처사를 대할 때 조정에 서 있는 신하와 달리 했다. 상(上)께서 임하(林下)의 선비 대하는 것이 옛 제왕과 같지 아니한다면 사기는 떨어지고 말 것이다.(…)조식의 소가 이토록 직재함은 이 나라 선비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니 또한 국가의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석 2)

남명의 상소문 파동은 임금이 벌주기를 거두어서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사림의 언로가 크게 신장되었고 사림사회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그의 위상이 한층 빛을 발했다.
 
뇌룡정(雷龍亭) 남명 선생이 48세 때부터 12년간 학문을 가르치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 뇌룡이란 장자(莊子)의 '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치고, 시체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온 말. 선생은 이 곳에서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일명 단성소)를 지어 올렸다고 함.
▲ 뇌룡정(雷龍亭) 남명 선생이 48세 때부터 12년간 학문을 가르치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 뇌룡이란 장자(莊子)의 '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치고, 시체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온 말. 선생은 이 곳에서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일명 단성소)를 지어 올렸다고 함.
ⓒ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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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연구자는 남명의 상소문에 나타난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위정자가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

통치·행정의 성공 요인은 위정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가 군자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소인을 좋아하는가 등과 같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 즉 최고통치자가 어떻게 처신하는가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결정된다고 한다.

(2) 위정자의 결단, 학문과 수덕이 선행되어야 한다.

위정자가 현실을 인식하고 자각하여, 학문을 익히고 덕을 밝혀,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3) 위정자의 수신을 바탕으로 하여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행정의 성공 여부는 인재 등용에 달려 있는데(爲政在人), 인재등용은 먼저 도로써 수신하고, 그 수신을 바탕으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즉,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해 등용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참 모습을 알려면 먼저 자신의 수양을 통해 명철한 마음을 기르고, 그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인재를 선발해야 실수가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심을 바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수신을 바탕으로 인재 등용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먼저 위정자가 마음을 바로잡은 후(正心), 이러한 바탕 위에서 백성을 다스리고, 수신을 하여 올바른 판단력을 얻은 후 인재를 선별하여 등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4) 출처에 대한 견해 : 먼저 위정자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남명은 먼저 위정자가 변화하여 굳은 마음을 가지고 왕도를 실현될 수 있게 되면, 벼슬길에 나아가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출사할 만한 상황이 아닌 때에는 출사하지 않는 것을 정의로 여겼던 유자들의 출처 의식을 남명이 철저히 지키려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직(官職) 선택의 기준을 호구지책에 두는 것이 아니라, 관직 본래의 의미를 실현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석 3)


주석
1> 앞의 자료, 380쪽.
2> <조선왕조실록>, 명종 6년 조.
3> 박승용, <남명 조식의 행정사상연구(상소문을 중심으로)>, <조기홍 고희기념 논문집>, 327~328쪽, 2002.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조식평전#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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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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