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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 동상.
 김해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 동상.
ⓒ 김해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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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존여비 사상의 잘못된 사례이지만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부인이나 가족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기피하였다. 오히려 미덕인 양 칭송되고, 어쩌다 언급할라치면 '삼불출(三不出)'이라 매도되었다.

시대를 리드하는 큰 선비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남명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22살 때 남평 조씨 충순위 조수(曺琇)의 딸과 결혼하였다. 부인의 이름도 알려진 바 없다.

이들 부부는 아들 조차산(曺次山)과 딸을 낳았다. 아들은 일찍 죽고 딸은 만호 김행(金行)에게 시집갔다. 36살 때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홉 살 때에 요절했다. 남명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한 편의 시로 달랬다.

아들을 잃고서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네 신세 중과 비슷하고
약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
한 평생 보내다보니 어쩔 수 없었는데
남은 해 돌아보니 흰 눈처럼 어지러운 내 머리. (주석 1)

당시 사대부들은 물론 백성들도 소실 또는 후실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명은 1548년에 후실이 아들 차석(次石)을 낳고 1557년에 둘째 아들 차마(次磨)를, 다음 해에 셋째 아들 차정(次叮)을 낳았다.

그리고 1545년 11월에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남명은 아버지 산소의 동쪽 언덕에 장사 지내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1568년 7월에 부인 조씨가 세상을 떠났다. 동생 환(桓)과는 막역하게 지내었다.

남명은 아우 환과의 우애가 심히 돈독하였다. 형제는 지체(支體)라 하여 헤어질 수 없다하여 한 담장 안에서 동거하며 같은 문을 출입했으며 밥상을 맞대고 이불을 같이 덮어 늘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가산을 줄여서 형제 중 가난한 사람에게 갈라주고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들지 않았다.

남이 궂은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마음 아파하며 달려가 물불을 구하듯 돌보았다. 공(公)은 세상을 차마 잊지 못하여 늘 나라를 걱정하고 생민들을 불쌍히 여겼다. 매양 맑은 하늘, 밝은 달밤을 맞이하면 홀로 앉아 슬픈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마치자 눈물을 흘리곤 하였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은 공이 왜 그랬는지 알지 못 했다. (주석 2)

남명은 1528년 10월 아버지 3년 상을 치르고 부친의 묘갈명을 썼다. 아버지의 신조는 청렴이라고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새겼다.

벼슬살이를 20년 동안 하였지만 돌아가셨을 때 예를 갖출 수 없었고, 집에서는 먹고 살 길이 없었다. 자손들에게 남겨 준 것은 분수에 만족하라는 것 뿐이었다.

두 임금을 내리 섬기면서 특히 수고하고 힘썼지만 품계는 삼품(三品)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가 세상에 구차하게 아첨하여 영화를 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높은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조정의 고관들이 공에게 의지해서 하루라도 공이 없으면 안 될 정도였으니, 한 시대에 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도 알 수 있다. (주석 3)


주석
1> 허권수, 앞의 책, 76쪽.
2> <행장 및 사적>, 389~390쪽.
3> 정우락, <남명문학의 현장>, 62~63쪽, 경인문화사, 2006.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조식평전#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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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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