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은 연산군 때에 태어나 중종→명종에 이어 그가 68살 때에 선조가 즉위하였다. 중종이 헌릉참봉에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명종이 종부시 주부에 임명했으나 사양했다. 다시 명종이 단성현감을 내렸으나 상소를 통해 거부하고, 역시 명종이 상서현 판관을 내렸으나 대궐에 나가 숙배하고 사양하였다.
1567년 67살이 된 면암은 선조가 즉위하여 11월에 교서를 내려 특별히 불렀으나 상소를 하고 나가지 않았다. 12월에 다시 불렀으나 사양했는데, 선조는 이후에도 종친부 전첩 등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했다. 국정개혁이나 그동안 닦아온 경륜을 펼 자리가 아니었다.
사림파 인사 중에는 면암이 출사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그동안 각종 사화로 참사를 겪고 희생당한 사림들의 진혼과 명예회복을 바랐다. 심지어 퇴계까지도 이에 동조하였다.
징사(徵士, 전정의 부름을 받고 나가지 않은 선비인 남명을 가리킴)의 글은 창고(蒼古)하고 준위(峻偉)하여 진실로 자상합니다. 다만 격식과 준례를 따르지 않는 일이 왕왕 있으니, 이는 비록 산림에 있는 처사가 세상의 좋아하는 바를 따르지 않는 높은 뜻이나, 높은 각명(刻銘)은 후세에까지 전하는 것이니, 이에 만일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후세에 지적하는 자들은 장차 붓을 잡을 자에게까지 언급하면서 "어찌하여 서로 따르기를 이와 같이 하였는가" 라고 말할 것입니다.(주석 1)
역대 임금은 남명에게 지극히 인색하였다. 관직을 내리면서 중용하지 않고 미관말직을 제시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이 때문에 출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면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으로 보아 국정개혁이나 문란한 조정을 일신할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율곡 이이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이렇게 진단하였다.
지금 나라의 형세는 만간(萬間)의 큰 집이 여러 해 지나도록 손질을 하지 않아 옆으로 기울어지고 위에서 빗물이 새며 대들보와 석가레는 좀이 먹고 썩어가며 단청은 다 벗겨졌는데 임시로 바쳐주고 잡아 끌고 하여 구차하게 아침 저녁을 넘기고 있는 것과 같다. (주석 2)
남명이 바라보는 시국관과 유사했다. 깨어 있는 지식인들은 나라의 형편이 대단히 어려움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종 10년 34살에 문과에 급제한 조광조는 대사헌이 되어 소격서 폐지와 정국공신들의 토지를 회수하여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해야한다고 국정개혁을 추진하다가 훈구파에 몰려 사약을 마셔야 했다.
조광조의 개혁이나 율곡의 개혁이 빛을 볼 수 없었던 것은 훈구파의 완강한 저항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주자의 가르침은 태양이 하늘 한 가운데 있는 것과 같다. 이것에 대해 감히 이의를 갖고 있는 자가 바로 사문난적이다." (주석 3)라고 선언했다.
윤휴가 그를 비판하자 송시열은 다시 "윤휴의 주자를 능멸, 모욕하는 죄가 역모의 죄보다도 더 크다." (주석 4)라고 몰아쳤다. 주자에 대한 비판이나 다른 해석을 역모보다 더 크게 다스리는 상황이었다.
남명은 이즈음의 심경을 <되는 대로 미루어>라는 시에 담았다.
하늘의 바람이 큰 사막에 진동하고
이 같은 구름 어지러이 가렸나 흩어졌다 하네
솔개가 날아오르는 건 본래 당연하다 해도
까마귀까지 치솟아 무얼 하려는 건가. (주석 5)
그리고 이즈음 <무제>의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용을 죽이는 커다란 재주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세속의 짐승을 잡는 푸줏간에 들어가지 않고
천하를 다스릴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
패도가 횡행하는 도읍의 땅을 밟지 않는다. (주석 6)
주석
1> <퇴계전서> 6, <이강이에게 답함>, 퇴계학 역주 총서.
2> <율곡전서>, 권 3.
3> 이민수 역, <동국 붕당원류>, 늘 유문화사, 1973.
4> 같은 책, 부록 권 14.
5> 허권수, 앞의 책, 4쪽.
6> <남명집>.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