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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의식주(衣食住)라고 했습니까? 입고 먹는 것과 눕고 쉴 곳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고 갈등하며 사는 세상살이, 수십 차례 이사 다니느라 주민등록 주소지가 빼곡했던 평화마을 주민들은 난생 처음 집을 장만했다는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발등에 떨어진 생계에 팍팍한 겨울을 지내고 있습니다.

새 집 생활 넉 달째 접어들어 전화 끊긴 집도, 단전 통보에 전전긍긍하는 집도, 기름보일러를 정지한 집도 있습니다. 안정된 생활에 접어들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입니다. 가난한 살림에는 우환도 잦은 법, 중풍을 앓아누운 김씨댁 큰아들이 교통사고 감옥에 갔다 하고, 우씨 아주머니는 산재사고로 전신마비된 남편 병원생활에 아득하기만 하다하고...

어찌됐든 먹는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궁색할수록 먹고 싶은 것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더구나 긴긴 겨울 밤 허기는 더욱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썰렁한 명절을 보낸 주민들이 월례회 겸 대동회(大同會)에 돼지를 잡고 떡국을 끓여내고 막걸리 추렴을 하기로 했습니다.

▲평화마을 어린이들의 합동세배. 할아버지, 할머니 건강하고 오래오래 사세요.
ⓒ 조호진
설 지난 30일 회가 동한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들면서 섬진강 맵찬 바람에 움추렸던 <평화를 여는 마을>이 모처럼 들썩거립니다. 자칫 유야무야 될 뻔했던 잔치였습니다. 없는 형편에 돈 걷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없는 데 어미 없는 쌍둥이 손녀를 키워낸 서춘화(63) 할머니가 억척스럽게 밀어부쳐 걸판진 대동회가 가까스로 성사됐습니다.

속이 헛헛히 비웠던 아이들이 신이 났습니다. 큰 집, 작은 집 찾아 뿔뿔이 흩어진 명절 탓에 마을 어른께 세배를 드리지 못했던 마을 아이들 십수 명이 어른들에게 건강과 장수를 비는 인사로 큰절을 한 뒤 떡국과 돼지고기를 볼이 미어터지게 먹느라 난리법석입니다. 새 중에 가장 무서운 새가 <먹새>라고 했습니다.

원동부락 이장, 부녀회장, 면사무소 직원도 참석했고, 신원주유소 사장님도 찾아와 금일봉을 선뜻 내놨습니다. 누대를 살아온 원주민들과 타관 땅에 이제 막 뿌리를 내린 주민들과의 사귐이 시작됐습니다. 술과 고기를 나누면서 얼굴을 익히고, 손을 맞잡고, 수 틀린 의견은 서로 조정하고 존중하며 윗동네 아랫동네로 엉켜 살기로 했습니다.

▲원동부락 이장님이 막걸리 건배를 외칩니다.
ⓒ 조호진
칠순을 앞둔 원동부락 이장님이 "우리 힘을 합쳐 다압면에서 가장 멋진 부락이 됩시다"라며, 막걸리 건배를 외치고 부녀회장도 음료수를 건네며 "잘 살아 볼 것"을 권합니다. 잘 살아야지요. 암, 이제 밀려나지 말고 새벽을 깨워 부지런히 바닥을 다지며 남부럽지 않게 살아야지요.

모처럼 달뜨게 배부른 주민들이 달집 세운 마을 뒷 편으로 몰려갔습니다. 대나무가 솟구친 달집에 볏짚으로 불을 부치자 붉은 밤이 됐습니다. 마을 최고 연장자인 김원근(68) 어른신도, 홀로 두 딸과 팔순 노인을 모시는 신발장수 정병준(49)씨도,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세원이 엄마도 올해는 좋은 일만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불에 비췄습니다.

▲평화마을 달집태우기. 서러움도 가난도 실직도 모두 타 버려라 까짓것.
ⓒ 조호진

달집을 에워싼 주민들이 손에 손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를 부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봉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집도 고향도 없이 떠돌던 고단한 삶이 불길에 타올랐습니다. 불빛에 붉그적적해진 얼굴들이 보기 좋습니다. 이빨 사이로 돼지고기가 끼고, 돼지기름에 입술은 반지르르하고, 여하튼 오늘은 배도 부르고 즐겁습니다.

▲불빛에 붉그레해진 아이들. 저 아이들이 이 마을에 기둥입니다.
ⓒ 조호진

불길이 환히 번지면서 불씨들이 어둔 밤의 불꽃으로 흩날립니다. 아, 추운 세상의 불빛처럼 따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탈 것들은 타고 수그러든 것은 재가 되는 저 것들, 볏집이 타고 대나무가 타고 가난이 타고 서러움이 타고 실직도 타고 미움도 타고... 탈 것은 타고 새록새록 솟아날 이웃 정만 오는 봄날에 햇볕처럼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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