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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0일 오후 2시 경 울산 남구 SK(주) 정문 앞. 베옷을 입은 30대 여성과 덥수룩한 수염에 역시 베옷을 입은 20대 청년이 서 있다. 청년은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남성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다. 주변에는 피켓이나 유인물을 든 젊은이들이 서성이고 있다.

2시 20분경 SK(주) 통근 버스가 정문으로 다가온다. 원래 정문 앞에 차를 세우는 모양인지 젊은이들이 익숙하게 차로 다가선다. 그러나 버스는 그대로 정문을 통과하려고 한다. 젊은이들이 버스를 막아서고 한 사람은 아예 드러눕는다. 실랑이 끝에 결국 버스는 들어가 버리고, 젊은 미망인의 몸이 순간 휘청한다.

"올 봄에는 이상하게 비가 많이 오죠? 비가 올 때마다 혹시 그이가 저 위에서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참 바보 같죠?'라고 묻는 듯 수줍게 웃는 김해정(35세) 씨의 얼굴이 까칠하다. 이 곱고, 자그마한 사람이 SK 정문 앞에서 '창사 이래 최초의'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다. 환갑을 앞둔 아버지부터 고시를 준비중이던 막내 남동생까지 온 가족이 천막 생활을 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김해정 씨의 남편인 고 송은동 씨는 지난 2월 25일 서른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고인은 94년 SK(주)에 입사해 생산직 사원으로 근무하다가 2000년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조혈모 세포 이식 수술 후 완쾌되는 듯했지만 2002년 1월 재발하였고, 결국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혼수상태에서 사망했다.

"남편이 재발하고 나서 외국에라도 나가 치료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산업재해 신청을 하기로 했어요. 남편이 근무하면서 벤젠, 톨루엔, 자이렌 같은 유기용제를 다루었는데, 이런 유기용제가 발암 물질이라는 건 다 알려져 있잖아요. 그래서 회사에서 산재 담당하는 분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지요. 담당 의사 소견서도 받아다 드리고 모든 걸 믿고 맡겼어요."

그런데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근로복지공단 울산지사로부터 산재 불승인 결정 통보서가 도착해 있었다.

"이해가 안 되더라구요. 근로복지공단을 찾아가서 회사가 제출한 자료를 보여달라고 요구했어요. 그 자료를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유기용제와 림프종이 인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담당 의사의 소견서도 쏙 빼놓고, 남편이 근무했을 당시의 작업환경측정 결과표도 쏙 빼놓고 별 의미가 없는 자료만 제출했던 거죠. 왜 불승인 결정이 났는지 그제야 알겠더라구요."

장례를 치른 직후인 3월 4일, 정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천막 옆에 "SK(주)는 고 송은동 사원의 직업병 사망 진상을 밝혀라"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산재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책임지고 도와주겠다던 사람들이 그런 엉성한 자료를 낸 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이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산재 은폐 행위 아닌가요?"

이에 대해 회사측은 지난 3월 21일 노사협력본부 상무 명의로 전 사원에게 메일을 발송하여 입장을 밝혔다. 즉 최근 수년간의 작업환경측정 결과가 거의 유사하여 최근 2년에 해당하는 자료만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족은 "최근의 작업 공정도는 고인이 근무하던 당시와 같지 않다. 예를 들어 회사는 VOC 시스템이라고 기록된 작업 공정도를 제출했으나 이 시스템은 고인이 휴직한 후에 새로이 도입된 것이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3월 18일 유가족은 근로복지공단 울산지사를 방문하여 이종철 보상부장을 만났다. 회사가 미비한 자료를 제출했음에도 더 이상의 자료를 요구하지 않은 점, 단 한 명의 자문의 소견만으로 결정을 내린 점, 유기용제 취급으로 인한 림프암 발병의 경우 선례가 없음에도 전문 역학조사를 의뢰하지 않은 점 등은 공단 측의 직무유기라는 것이 유가족의 주장이었다.

이에 근로복지공단은 유가족의 의견을 수용하여 애초의 불승인 결정을 유보하고 역학조사 실시 이후 다시 판단하기로 했다.

한편 지난해 말 근로복지공단 여수 지사는 LG화학에서 벤젠 취급 업무에 종사하다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조모(당시 52세) 씨에 대해 역학조사 결과 산재 승인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또한 포항지사는 포항제철에서 코크스 오븐을 다루다가 백혈병과 림프암으로 사망한 문모 씨, 박모 씨에 대해서도 산재를 인정했다. 코크스 오븐에는 벤젠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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