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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는 오마이뉴스 게릴라 기자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울산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기사를 쓰면서도 '한편 회사측은' 식의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사람이지요. 그래도 저는 제 글들이 '노동운동가가 쓴 노동 기사'가 아니라 '기자가 쓴 노동 기사'로 읽히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기자로서가 아니라 노동운동가로서 쓰는 글입니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어설프게 기자의 중립성을 지키기에는 제 속이 너무 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두 차례에 걸쳐 저는 SK(주) 정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가족들의 싸움에 대한 기사를 썼습니다.

저는 그 기사에 나오는 미망인의 남동생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농성 사실을 전해들은 날은 3월 7일이었는데 그 전날 밤새도록 비가 쏟아부었습니다. 그 비를 맞으며 온 식구가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천막을 지켰을 것을 생각하니 제 마음까지 스산해졌습니다. 그날로 천막을 찾아갔지요.

유가족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산재 전문 단체와 근로복지공단, 산업안전 보건원 등을 찾아다니고, 전문의 소견을 듣기 위해 부산, 포항, 경주까지 다녔습니다.

3월 중순 이러한 노력 끝에 애초의 불승인 결정이 유보되고 역학조사가 결정되자 해정 언니가 농성 시작하고 처음으로 환히 웃더군요.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옳다는 생각,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믿음.

하지만 천막 농성은 벌써 50일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해정 언니의 생일도 지나갔고, 형부의 사십구재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하루하루 날짜만 더할 뿐입니다.

천막농성 50일이 되도록 유가족의 싸움은 지역 언론에 한 번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방송사는 취재까지 해가서는 보도하지 않았고, 어떤 신문사의 기자는 "나중에 산재 인정되면 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어제 한 달 가까이 망설이던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회사가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근무이력서가 임의 작성되었다는 증거를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이 정도면 기자회견을 해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자실까지 직접 찾아가서 보도자료를 드렸고, 일일이 전화 통화까지 했습니다.

기자회견 전날 해정 언니와 가족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를 겁니다. 그 동안 모아왔던 온갖 자료들, 거의 100여 장에 이르는 그 자료들을 8시간에 걸쳐 일일이 복사하면서도 "기자가 아무도 안 오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일 아침. 새벽부터 쏟아진 비로 천막 안은 흥건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단체의 대표자들이 참석해주셨습니다. 유가족의 친지와 친구들도 삼삼오오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기자는 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지쳐 결국 기자회견을 시작했을 때 주변을 둘러싼 수십 명의 사람 중 기자는 딱 두 명이었습니다. 한 명은 노동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일간지의 기자였고, 또 한 명은 지역 일간지의 기자였습니다. 세 개의 방송사 중 단 한 군데도 오지 않았고, 작년 말 벤젠으로 인한 암 사망 사건을 1면 탑으로 다루었던 중앙 일간지의 기자도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어제 참석했던 한 지역 일간지의 사회면을 펼쳤습니다.

탑 기사는 <'맥도날드 사거리' 이름 빈축-특정회사 광고 의혹>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엄마 친구를 가장해서 열쇠를 받아다 상습 절도를 일삼은 20대가 덜미를 잡혔고, 남부초등학교에서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급식해서 식중독에 걸렸다는 기사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유가족들의 싸움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쓰여져 있지 않았습니다.

울산 지역 기자들의 양심에 묻고 싶습니다.

SK(주)라는 거대 기업 정문에 창사 이래 처음으로 유가족들이 천막을 치고 두 달 째 농성중입니다. 유기물질로 인한 암 사망의 직업성 여부가 논란이 된 것은 울산 석유화학단지 안에서 처음입니다. 벤젠과 암의 상관성을 알기 위해 역학조사를 실시하는 것도 화학 업종에서 최초의 사례입니다.

유가족들이 제보를 받아서 SK(주)의 암 투병자, 사망자가 20여 명에 이른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회사에서 산재 신청 서류를 임의 작성했음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도 확보했습니다.

대답하세요. 이래도 아무런 기사의 가치가 없습니까? 울산 북구에 사는 장아무개 씨가 올해 첫 모내기를 했다는 것은 기사가치가 있어도, 이 가족들의 싸움은 정말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까? SK(주)가 사랑의 도시락을 나눠준다는 사연은 보도되는데 왜 젊은 가장의 죽음을 둘러싼 이 논란은 보도되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카메라와 펜을 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대답하세요. 저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해정 언니의 수첩 맨 앞에는 사진 한 장이 끼워져 있습니다. 생전의 형부와 언니가 두 아이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입니다. 그 옆에 언니가 '2001년 11월 00이 첫 돌 기념-마지막 가족사진' 이렇게 써 놓았더군요. 2001년 11월에 찍은 사진이니까 형부가 완치 판정을 받고 복직해서 회사에 다닐 때입니다. 이 사진을 찍고 세 달 후 형부는 암 세포가 뇌로 전이되어서 두 아이만 덜렁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그 뒤로 또 세 달째입니다. 이제 언론이 나서야 합니다. 유가족의 편을 들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자의 자존심을 걸고 취재할 권리와 취재할 의무를 행사해 달라는 것입니다. 유가족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면 그 눈물이라도 보도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자의 양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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