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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일 수능 시험을 마친 뒤 답을 맞춰보는 수험생들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 마이너

언론의 성급한 수능점수 예측보도가 한 재수 수험생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7일 오전 10시 30분쯤, 울산의 20대 재수생 정모(20)씨가 자신의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가채점 결과 수능점수가 작년에 비해서 20점 정도 떨어졌다고 판단한 정씨는 "인생의 낙오자란 말을 듣게 될까 두렵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목숨을 끊었다.

정씨는 수험 당일 TV뉴스와 신문 등에서 "지난 해보다 평균 10~15점 가량 수능 점수가 오를 것"이라는 보도를 듣고 크게 상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사들은 일간지 첫 기사를 믿지 않는다"
"죽은 학생 위해 언론사에 소송 걸자"


▲ 일간지들의 '수능 점수 10~20점 오른다'는 1면 머리기사. 석간신문인 <문화일보>를 제외한 모든 주요일간지가 수능 점수 상승을 예측했다.
ⓒ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다들 올랐다는데 나만 떨어졌다"며 불안에 떤 것은 비단 숨진 정씨만이 아니었다. 수험생과 학부모에게는 가채점 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의 24시간은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서울 모 고교의 한 고3 담임교사는 "수험결과에 대해 '좀 더 두고봐야 한다'며 우는 아이들을 종일 달랬다"며 "일선 교사들은 수능 점수에 대한 일간지의 첫 기사를 아예 믿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한국교육평가원의 예측이 계속 빗나간데다 언론 역시 교육평가원 발표를 바탕으로 기사를 쓰기 때문에 '우선 두고본다'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사는 "제도권 언론에서는 '일단 먼저 나가고 보는' 게 관행화돼 있어서 그런지 수능시험이 끝난 뒤 수험생들의 반응을 취재하는 기자가 없다"고 지적하며 "보도만 제대로 나갔으면 이번 울산의 재수생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김도형 청솔학원 상담실장 역시 "최소한의 표본 조사 등 객관적인 자료조사도 없이 막연히 비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추정기사를 쓰는 것은 언론으로서 무책임한 처사"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김 실장은 또 "대부분의 학원 교사들 역시 엄밀한 검증보다는 대개 눈으로만 문제를 보고 점수동향을 예측한다"며 "실제로 정해진 시간 동안 문제를 푸는 아이들 입장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매년 학원생들에게 언론보도를 믿지 말라고 당부하곤 한다"며 "시험을 치른 후 극도로 과민상태에 있는 수험생들의 입장을 감안, 언론이 보다 신중하게 수능 점수를 보도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 지난 6일 수학능력시험을 마친 뒤 대형 스크린을 통해 답을 맞춰 보는 수험생들
ⓒ 마이너
언론의 에단보도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훨씬 격렬했다. 재수생 정씨의 죽음이 알려진 뒤 신문사 인터넷 게시판에는 "죽은 학생을 위해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고 이 사건을 계기로 부정확한 언론의 보도 방식을 바꾸자"는 학생들의 의견이 오를 정도다.

수능 예측 평균 점수가 발표된 당일에도 각 신문사 인터넷 게시판에는 수험생과 학부모의 항의가 이어졌다. 그들은 "수능 현장에 와서 들어보면 점수를 금방 알텐데 그 많은 기자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라며 기자들의 무성의한 보도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나 언론들은 "평균 2~3점 떨어졌다"는 수능 가채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수험생들의 반응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가채점 결과가 발표되자 언론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충격의 고3 교실' 현장을 앞다투어 취재, 보도했다.

"점수 맞추겠다고 덤빈 '오보' 반성한다"
현장 기자들 자성 목소리 높아


아직도 대부분의 언론은 기사나 사설을 통해 "수능시험 출제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한다"거나 "학력저하를 막기 위해 주입식 교육을 바꾸어야 한다"고 분석할 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발표만을 그대로 받아쓴 자신들의 '카더라 통신'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다.

다행히 일부 언론사에서는 '수능점수 예단 보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 <한겨레> 인터넷사이트 여론조사란에서는 수능 직후 난이도 보도에 대한 설문을 실시 중이다. 8일 저녁 현재 약 90%가 '가채점 이후 보도'에 찬성했다.
ⓒ 인터넷 <한겨레>
<한겨레>는 8일자 '취재파일'을 통해 "결과적으로 거의 모든 신문·방송이 '오보'를 했다"고 '고백'했다. 수능시험 관련 취재를 담당했던 기자는 "이런 보도로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혼란을 안겨줬다면, 이는 분명히 언론의 잘못"이며 "언론이 점쟁이처럼 점수를 미리 맞추겠다고 덤빈 것이 잘못"이라며 '반성'했다.

<조선일보> 역시 "(재수생의) 죽음은 입시기관과 언론의 잘못된 예측과 관련있는 것"이라며 "입시전문기관에 의존해 보도했던 언론의 책임 문제까지 포함해 수험생과 학부모들로부터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수능시험은 오후 5시에 끝나는데 일간지 마감시간은 오후 4시 반이다. 방송의 경우도 매시간 속보를 내놓으려다 보니 자연히 경쟁이 과열되기 마련"이라고 털어놓았다.

이 기자는 또 "기자들이 직접 난이도를 평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육평가원이나 입시학원을 취재해 점수를 예측할 수 밖에 없다"며 나름의 애로사항을 털어놨다.

▲ 수능점수 예측 오보를 반성한 <한겨레> 11월 8일자 '취재파일'
ⓒ <한겨레>
이 기자는 "그러나 앞으로는 다듬지 않은 '오보'를 내는 관행이 사라질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입시 관계자들이 성급하게 자료를 내놓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현장 기자들 사이에서도 수능점수 예측 보도를 신중히 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는 "적어도 이제 수능시험 당일 예상 평균이 숫자로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유경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매체홍보부장은 이번 수능점수 예측 보도와 관련, "입시정보에 민감한 우리 교육환경에서 언론들이 신빙성 없이 자세한 수치까지 제시하면서 단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 부장은 "수능이 끝나자마자 보도가 나온다는 사실에서 이미 시험 당사자의 의견을 파악하지 않는 취재태도를 볼 수 있다"며 "1~2일 늦더라고 광범위한 취재를 통해 보다 정확한 기사를 보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잘못된 수능 분석이 내 딸을 죽였어요"
[인터뷰] 수능성적 비관 투신 정모양 부친

"딸이 이번 수능 시험 평균 점수가 하루만에 다시 낮아졌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살하진 않았을 겁니다. 분석 기관의 잘못된 정보가 내 딸을 죽였습니다".

수능 점수가 생각보다 너무 낮게 나온 것을 비관, 지난 7일 오전 자신의 집인 울산시 남구 H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해 숨진 정 모(20)양의 아버지(48)는 "너무 억울해서 우리 딸을 어떻게 저승에 보내겠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씨는 "수능 360점 정도를 기대했던 딸은 가채점 결과 생각보다 점수가 20점이나 낮자 크게 낙담했다"며 "그러다 사고 당일 조간 신문에 올 수능 점수가 지난해 보다 평균 10∼20점 정도 오를 것이란 기사를 본 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렸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 정보를 믿은 딸은 다른 학생들은 쉬웠는데 자신만 어려웠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극도로 절망했던 것 같다"며 "어제와는 달리 오늘 아침(8일) 가채점 결과 평균 2∼3점 가량 낮아질 것이란 당국 발표에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딸은 지난해 수능을 친 뒤 모 대학 법학부에 합격했으나 의대에 가고 싶다며 재수할 학비를 아르바이트 200만원이나 모았다"며 "평소 심지가 곧고 의지가 강했던 딸의 죽음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일"이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올 수능은 시험이 끝난 지난 6일부터 7일 오전까지 분석 기관에서 평균 점수가 10∼20점이나 오를 것이란 전망을 앞다퉈 내놓았으나 7일 오후 가채점 결과 당국은 지난해와 같았거나 2∼3점 정도 낮은 것이란 분석을 내놨다.

또 지난해에도 수능 시험 직후 16점∼30점 가량 하락할 것이란 분석을 내놨으나 하루 뒤 가채점 결과는 50∼70점까지 하락하는 등 사상 최악의 수능 파문이 일어 그 해 국회에서 까지 문제를 삼았다.

지난 2000년에는 수능 시험 직후 4∼5점 정도 떨어지겠다는 분석을 완전히 뒤엎고 전국에서 만점이 66명이나 나오는 등 점수가 급상승하는 등 당국의 수능 점수 분석이 해마다 수능 시험 이후 하루를 사이로 널뛰기를 했다. / 연합뉴스=이상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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