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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비가 찔끔찔끔 오더니, 오늘은 날씨가 말끔하고 시계(視界)가 좋아 북한 연백까지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오늘은 김춘식 할머니 장례식이 있는 날입니다. 7년 동안 중풍으로 쓰러져 하반신을 전혀 못쓰고 고생하시다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남편 되시는 박흥산 할아버지는 올해 83세입니다. 중풍으로 쓰러져 꼼짝 못하시는 할머니를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두 분은 아들은 없이 딸만 여덟을 두셨습니다. 딸만 열을 낳아서 둘은 죽고 여덟이 남았습니다.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고부터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수족이 되어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온갖 궂은 일과 할머니 병 수발을 하면서도 한 번도 불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 마실을 왔다가도 혼자 계신 할머니가 걱정되어 금방 가시곤 하셨습니다.
"박 목사, 내가 무신 팔잔지 모르겠시다. 내가 우리 병든 마누라보다 오래 살긴 살아야겠는데 그게 맘대로 될지 모르겠시다. 그래야 마누라 건사를 해줄 수 있지 안겠신까?"
김춘식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진 후 박흥산 할아버지는 만 4년 동안을 할머니 병수발을 하셨습니다. 팔순이 다 되신 노인이 병든 아내의 아픔과 시련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할머니 병세가 점점 심해지자 3년 전 부천에 있는 다섯째 딸네가 부모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3년 전 어느 봄날, 교동을 떠나시면서 할아버지가 우리 집엘 들르셨습니다. 마침 주일날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두 눈에 눈물이 맺히셨습니다. 내 손을 꽉 잡으시며 "목사 양반 그동안 신세 많이졌시다. 내 목사양반 은혜 못 잊어. 그 은혜를 잊으면 사람도 아니지. 그나 저나 우리 마누라 위해서 기도 많이 해줘요. 불쌍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씀을 남기시고 교동을 떠나셨습니다. 두 분이 교동을 떠나시고 할아버지가 살던 빈 집 앞을 어쩌다 지나가게 되면, 할머니가 마루에 걸터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모습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첫배로 장례 차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침 9시 조금 지나서 김춘식 할머니가 묻힐 산으로 갔습니다. 포크레인의 요란한 굉음과 운구하는 사람들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는 길에 박흥산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내가 달려가서 할아버지 손을 잡았습니다.
"할아버지 저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누구시더라?"
"저, 지석교회 목사예요."
"그래 맞아. 박 목사, 목사 양반이구먼."
할머니가 묻힐 양지바른 무덤가에 서서 잠시 묵상기도를 하고 바다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연백의 너른 평야와 산야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할머니 마지막 유언이 "나 죽으면 절대로 화장하지 말고, 가시나무가 있는 곳도 괜찮으니 바다가 보이는 쪽에 묻어줘"라고 하셨답니다. 김춘식 할머니는 78년을 이 땅에서 사시다 가셨습니다. 한 인간의 삶이 오늘 날씨만큼이나 말끔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잠시 조문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박흥산 할아버지를 또 만났습니다. 친구인 듯 다른 할아버지 세 분과 논두렁에 나란히 앉아 계셨습니다. 이번에는 저를 알아보시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가셨으니 이제 혼자 쓸쓸해서 어떻게 하지요?"
"그러게 말잇시다. 병들어도 살아있으면 좋은데, 나는 그래도 3년은 더 살 줄 알았지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시다."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그리고 교동에 종종 오세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60년을 함께 살다 짝을 잃고 혼자 되신, 외기러기 박흥산 할아버지를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김춘식 할머니, 하느님 나라에서 평안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누라 일어나면 춤이라도 추겠시다!"
지석교회에 부임해 와서 한 달이 훨씬 지나, 부임심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생각에는 장로님들과 심방대원들을 대동해서 하루 한 속씩 심방을 할까 했는데, 모내기가 끝났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바쁜 철이라 그게 쉬운 일이 아니겠다 싶었습니다. 또 하루에 한 속씩 심방을 '해치우는 식'의 심방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지요.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내 아내와 둘이서 시간 나는 대로 임마누엘 속부터 차례로 심방을 하는데, 가능하면 그 집안의 가정사와 생활형편, 집안의 분위기, 자녀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 위해서 적어도 한 집안에서 한 시간 정도는 얘길 나누기로 한 것입니다.
그중 첫날 심방중, 힘들고 고달프게 살아가지만,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정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과연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조심스럽게 그 잔잔한 감동을 나누고자 합니다.
박흥산 할아버지는 올해 76세의 노인이십니다. 박 할아버지는 올해 3월, 중풍으로 쓰러져 자리를 보전하고 계신 김춘식 할머니와 지금까지 해로(偕老)하셨습니다. 도합 딸만 여덟을 두셨지요. 박 할아버지 댁에는 3번째 방문이었습니다. 다행히 할머니는 지난 어버이날 때보다 병세가 많이 좋아지셔서 저도 알아보시고, 또렷한 발음으로 대화하기에 조금도 불편이 없었습니다.
간단히 심방예배를 마치고, 우리 내외가 할머니와 몇 마디 얘길 나누는 사이, 할아버지는 부엌에서 무언가 뚝닥거리시더니 예쁜 쟁반에 수박을 보기 좋게 썰어 담아 들어오셨습니다.
"뭐 잡수실 게 잇가네, 이거래도 잡숴보시겨. 내가 이 나이에 우리 마누라 며느리됫시다. 그래도 우리 딸들과 있는 것보담 백번 낫시다. 대소변 못가리는 우리 마누라 뒷치닥거리하면서 이렇게 살고 잇시다."
수박을 한입 우거적 씹을 때마다 할아버지는 침묵을 깨뜨리시고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요즘 같아선 살아도 걱정, 죽어도 걱정잇시다. 살면 병든 마누라 수습해야 될 거고, 마누라 죽으면 새 장가도 들 수 없을 것이고, 또 외로와서 어찌 살겠시까?"
박흥산 할아버지는 6.25전쟁 직후, 갯벌에서 지뢰를 밟아 그 파편에 잘린 것이라며 손가락이 셋이나 잘린 손을 내밀면서 그간의 고단한 삶의 흔적을 주저 없이 내보이셨습니다.
"우리 마누라 마비된 한쪽 팔 떼내고, 그 자리에 내 멀쩡한 한쪽 팔 붙여서 성한 두 팔 만들었으면 좋겠시다."
박 할아버지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시면서 병든 할머니 때문에 겪으시는 삶의 고초에 대해 한마디 불평도 안 하시고, 할머니가 전보다 나아지셨다고 좋아하셨습니다.
"내가 이래봬도 지석리에서 제일 마음 편하게 살고 있시다."
할아버지는 76성상의 인생고초를 조금도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잠자코 불안한 자세로 앉아 계시던 박 할머니는 "우리 영감 딸 여덟 낳았다고 한번도 날 타박한 일이 없시다. 술도 안 자시고 내 똥오줌 받아주고 고생 많시다"하시면서 할아버지에 대한 미더운 정이 듬뿍 담긴 환한 웃음이 얼굴에 피어올랐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몇 마디 권면의 말씀을 드리자, 앞으로 중단했던 속회예배도 다시 드리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 마누라 일어나면 내 펄쩍펄쩍 춤이라도 추겠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박흥산 할아버지의 막히거나 구부러지지 않은 말씀에 감동되어 '이 어르신은 지금껏 살아오시면서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살아오셨구나!'는 느낌을 단박에 받았습니다.
술도 입에 대지 않으시고, 병든 할머니의 수족이 되어서 언제나 따스한 보살핌으로 꿋꿋하게 살아가시는 박흥산 할아버지! 나는 어줍잖은 목회를 해오면서, 그 어느 한 사람에게 그만한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아내의 건강을 위해, 내 아내의 아픔이나 말못할 속사정에 대해 작은 관심이나 정성도 보여주지 못했지요.
이 각박한 시절, 어느 한 사람에게 한줌의 위로가 되어 준다는 것, 힘이 되어 준다는 것, 그것만큼 세상에 아름다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박흥산, 김춘식 두 노인의 깊은 사랑을 끝까지 지켜볼 작정입니다. 그저 가만히 사랑의 목격자가 되어서, 당신들의 사랑을 메마른 가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습니다.
돌아오는데 김춘식 할머니는 간신히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 창 밖을 향해 연신 손을 흔드셨습니다. 어느 시인의 '별이 빛나고 있는 것은 이렇게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싯귀가 생각났습니다.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