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광복절 아침 신문에 독립기념관의 운영실태를 힐난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16년간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자사 윤전기가 철거된 지 5일만의 일이다.
그러나 이번 <조선> 기사는 자사가 망신을 당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비쳐져, 비판 기사로서의 정당한 평가마저 깎아먹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선>은 15일자 사회면에 <국민 발길 돌리는 독립기념관>이라는 제목의 톱기사를 게재했다. 기사 작성에는 <조선>에서 인턴기자로 실습중인 부산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학생 1명도 참여했다.
<조선>은 광복절 기념식을 앞둔 독립기념관 풍경을 전하며 "독립기념관이 광복절 행사장으로 잠깐 활용되는 '반짝 기념관'이 된 것 같다"는 한 관람객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90년대 초반부터 관람객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내용의 '연도별 그래프'와 함께 "20∼30대 젊은 관람객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전시관 내에 즉석스티커 사진기가 있다' '매점에서 술을 판다' '홈페이지 내용이 부실하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기사의 표면적인 메시지 '독립기념관이 후세 교육을 위해서라도 더욱 잘 꾸며져야 한다'만 놓고 보면, 반론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당연한 지적이다. <조선>은 92년 광복절에도 '잊혀진 독립기념관 / 광복절도 "썰렁"'이라는 제목의 비판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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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비판기사를 작성한 시점이다. <조선>은 지난 3.1절만 해도 사외보에 큼지막한 크기로 이문원 독립기념관장의 인터뷰를 내보낸 바 있다.
<조선>이 독립기념관 비판기사를 내보낸 15일, 공교롭게도 독립기념관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윤전기를 일반에 처음 공개했다. '신문과 독립운동'이라는 부제가 붙은 '하와이 윤전기' 자리는 일주일 전만 해도 <조선>이 일제를 찬양한 기사들을 찍어내던 윤전기가 전시되어 있던 자리였다.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www.joase.org 이하 조아세)' 등 안티조선 단체들은 일찌감치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며 윤전기 철거를 주장해왔다. 조아세 등의 주장에 독립기념관 이사회도 뒤늦게 문제를 시인하고 지난 3월 철거를 결정했다.
<조선>은 어떻게든 결정을 뒤집어보려고 했다. 지면 하나를 할애해가며 정부와 조아세를 싸잡아 비난했다. 이사회에서 철거 여론을 주도한 김삼웅 성균관대 겸임교수는 나중에 안티조선 모임에서 "<조선> 보는 사람과는 결혼 안하기 운동을 벌이자"는 '농담'을 했다가 <조선> 기사로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친일'이라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조아세의 압박과 내부 반발로 인해 이 관장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철거를 집행했고, <조선>은 이 사실을 지난 7일자 신문에 짤막하게 보도했다.
그후 8일 후. <조선>의 독립기념관 비판 기사를 어떻게 봐야 할까?
<조선닷컴>(www.chosun.com)에 올려진 기사에는 14일 오후 5시30분 오전 10시 현재 모두 29건의 100자평이 붙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조선> 기사에서는 윤전기의 '윤'자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독자들은 '윤전기'를 놓고 의견이 갈려 있다. 글을 중복해서 올린 사람과 중립적인 사람을 빼고는 <조선>을 비판하는 의견이 15건, 옹호하는 의견이 8건이었다.
전부 소개할 수는 없고, 추천수가 많은 의견 4개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ㅋㅋㅋ 조선일보윤전기를 철거했다고 해서 금방 비판적인 기사를 쓰고있네.....속보인다 조선일보. (ID 김인석)
민족, 자주, 외세반대, 미군철수 외치는 인간들은 뭐하나? 독립 기념관 폐관하게 생겼다 이것들아! 주둥아리만 살아서 나불나불.... 꼴 좋다! (ID 김홍일)
볼게 없으니 발길을 돌리는 거다... 제발 전시물좀 바꾸고.. 새롭게 단장해봐라!!!!!! (ID 석두영)
1939년 <봉축천장절> 이라는 사설에서 "천황 폐하의 생일을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경축한다" "천황폐하의 가없는 은혜와 드넓은 어지심에 새로운 감격이 깊어짐을 깨닫는다" "충과 의를 다하여 일념으로 천황폐하와 일본제국에 보답한다는 결심을 금할 수 없다"고 떠들었던 조선일보. 그런 신문사 윤전기가 독립기념관에 있어야 한다고 지랄을 떨다 개망신 당하니 열 받느냐? (ID 정대현)
이외에 "독립기념관은 개봉관이 아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장소다"라며 "자녀 교육이 필요한 사람만 오라, 내 아들은 대 한국인으로 바뀌었다"는 김정배씨의 '쓴소리'도 눈에 띄었다.
주목할 점은, <조선>에 대한 찬반 의견 중 어느 쪽이 많으냐를 떠나서 대다수 독자들은 '윤전기 철거'와 이번 기사를 연계해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가장 많이 본다고 자찬해온 <조선>이 자신이 당한 일에 앙심을 품고 독립기념관을 난도질하고 있다는 것이 대다수 독자들의 생각이다. 족벌사주가 지배하고 있는 신문이 지면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세간의 우려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의도가 뻔히 보이는 기사로 늘씬 매를 맞고도 이문원 관장 이하 간부들의 반응은 조용하다. 예전 같으면 '악의적인 폄하보도' 어쩌구하면서 정정·반론보도를 요청했을 텐데,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은 '기념관측 멘트' 하나를 짧게 딸 게 아니라 김용주 독립기념관 노조위원장의 다음과 같은 해명을 진지하게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도 관람객 편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합니다. 그러나 자기들 윤전기 있을 때는 비판기사가 거의 없다가, 윤전기 없어지자마자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너무나 속이 보이네요.
독립기념관이요? 매년 광복절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기념식이 열렸고, 그때마다 의전 경호가 까다로웠습니다. 올해는 그나마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로 치러졌는데, 왜 하필 지금 문제를 삼는지?
관람객 수 줄어들었다는 그래프도 그래요. 우리나라의 박물관, 기념관치고 자발적 관람객들이 많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학생들이 단체로라도 와서 봐야할 곳들이 몇 군데 있죠. 아이들과 노인단체 관람객들이 없다면 독립기념관은 문을 닫을 판이라뇨? 독립기념관만 단체관람객 위주로 받나요?"
김 위원장은 "<조선>을 위해 독립기념관이 존재하나? 메이저신문이 이런 기사를 내는 것은 점잖지 못한 대응"이라고 꼬집었다. 김 위원장의 항변을 듣는 동안 기자는 "윤전기 철거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내일 KBS에서 일제시대 <조선>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한다고 하니, 독립기념관과 <조선> 중 어느 쪽이 더 문제인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