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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구, <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
강홍구, <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 ⓒ 황금가지
우리에게 가장 자주 혐오감을 주는 것은 바로 상가 간판이다. 저자는 이를 '시각적 비명의 집합'이라고 표현한다. 소리없이 아우성치는 거대한 옥외 전광판처럼. 그것은 소음과도 다른 성격이다. 상가 간판이 혐오스러운 것은 밤낮 구분 없이 우리의 시각을 괴롭히고, 필요 이상으로 점점 비대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고 비대한 포털 사이트나, 이런 사이트에 걸리는 팝업 광고, 요란한 배너 광고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싸구려 스펙터클과 요란한 광고물은 마치 1회용 제품처럼 어딘가로 버려진다. 도시 속에서의 자연 또한 1회용 면도기이고, 1회용 장식품이고, 의사 자연이며, 키치가 된다. 전기줄이 가로수를 지나면 가로수 가지는 흉하게 잘려나가고, 화단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밤이 되면 가로수는 꼬마 전구에 친친 감기고, 차도 확장 공사로 생을 마감한다.

우리는 고층 스카이라운지에서 돈을 내고 이런 도시의 싸구려 스펙터클을 감상한다.

돼지의 희망이 삼겹살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젖소의 희망이 버터가 아니듯 답은 빤하지 않는가. 인간은 지금까지 꽃들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묻는 최소한의 예의라도 갖춘 적이 없으므로 한 번쯤 묻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에서 공터는 금세 쓰레기장이 된다. 도시에서 주택이나 상가는 늘 임시 공간이기 때문이고, 이런 의미에서 공터는 그 자체로 한시적인 쓰레기장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쓰레기는 언제라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버리면 되고, 공터엔 언제 그랬냐는 듯 새 빌딩이 들어선다. 온라인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공터를 만들고, 쓰레기를 방치한다. 우리가 방치해 버린 휴면 계정이 얼마나 많고, 이 공터에 쌓여 있을 쓰레기들은 과연 얼마나 많을까.

청테이프, 찌라시, 까만 비닐 봉지가 없다면 도시는 깨끗해질까.

키치가 반드시 고급 예술품에 대비되는 대중 문화 상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품 가치에 좌우되고 대중의 얄팍한 애호에 기대는 건 모두 키치이며 키치적이다.

아마도 키치의 생산과 소비량은 사람들의 비만도와 자동차 배기 가스량과 정비례할 것이다. 키치는 우리 시대의 운명이다. 좋든 싫든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멍석은 본래의 용도로 쓰이는 한 절대로 키치가 될 수 없는 물건이지만, 젠체하는 화가의 작업실이나 전원 카페 바닥에 깔리면 키치가 된다.

도시가 시골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의,식,주를 포함한 모든 것이 교환 가치로만 평가되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도 옷도 집도 이제 모든 것이 교환 가치로서만 그 존재 의미를 갖는다. 이 중에서도 아파트라는 존재가 가장 뚜렷하다.

아파트는 콘크리트로 된 거대한 텐트이다. 아파트는 전통적 의미의 집이 아니다. 단지 교환 가치를 가진 공간일 뿐이다. 아파트를 벌집에 비유하는 건 벌집에 대한 모독이다. 아파트는 거대 권력과 거대 자본이 거대 이익을 보면서 던져준 떡밥이다. 아무리 아파트 투기를 해서 돈을 불려도 그것은 결코 거대 자본이 되지 못한다. 아파트는 떡밥처럼 부패한다. 부패해서 주위의 물을 썩힌다. 아파트 평수란 떡밥의 크기이다. 평수는 삶의 질과 무관하지만 삶의 위상을 결정짓는다. 아파트는 또한 질 낮은 스펙터클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살고,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려든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읽으며 한 번 생각해 본다. 도시에 사는 나는 키치인가, 아닌가.

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 - 우리 시대 일상 속 시각 문화 읽기

강홍구 지음, 황금가지(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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