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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관 현판
옥류관 현판 ⓒ 정용국
탑의 입구에는 세계 각국의 주체사상 연구회나 국가의 정상들이 보내온 축하 현판을 모아 벽을 다 채워 놓았다. 안내원의 설명에 집중하지 않고 대동강 경치 구경이나 하면서 사진들을 찍자, 민화협 안내원이 조장들에게 설명을 잘 듣도록 하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겐 너무 재미없는 사상교육일 뿐이었다. 그저 안내원의 말이 끝나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같이 사진이나 찍자고 달려들었다. 주체탑 자리는 아무튼 대동강을 관망하기에는 명당이어서 여럿이서 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옥류관은 이미 남쪽(아니다, 이제부터는 나만이라도 ‘한국’ 과 ‘조선’ 이라는 호칭을 써야겠다. 남쪽 북측 등 이런 용어가 너무 안타깝기 때문이어서 그렇다. 서로 자기의 이름에 ‘남’ ‘북’을 붙이는 식의 고집은 버릴 것! 이 명칭을 사용함으로 야기될 손익은 서로 감수할 것! )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름이다.

베이징에 있는 옥류관 분점에서 또는 평양에 들러본 사람들이 다 옥류관 냉면 이야기를 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대동강을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자리가 일품이고 새로 세운 주체탑이 보이니 조선에서는 더욱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옥류관 앞에서부터 벌써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기다리는 이들로 붐볐다. 그릇을 들고 오가는 이로 보아서는 사가지고 가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냉면이 나오기 전에 주는 녹두지짐과 돼지고기 찜
냉면이 나오기 전에 주는 녹두지짐과 돼지고기 찜 ⓒ 정용국
어제 고려호텔에서도 점심으로 냉면을 먹었지만 옥류관이라는 유명세는 평양에서도 대단한 것 같았다. 입구에서 기다리는 이들만 해도 많은 숫자였으니 평양의 대부분 식당이 거의 일부의 관광객들이나 드나드는 것에 비해 옥류관은 그 이상의 규모였다.

특별히 대표단은 김정일 위원장이 식사를 한 적이 있다고 안내판이 붙은 방으로 가니 창밖으로 대동강이 잘 보였다. 녹두지짐과 돼지고기 찜으로 허기를 달랜 뒤 냉면이 나왔는데 고려호텔 것과는 육수가 조금 맛이 달랐다. 나처럼 음식을 가리지 않는 이들은 거의 같은 맛이었지만 ‘최고의 냉면이다’라고 해주었다.

민화협 안내원 동무와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정말 천천히 얼마나 냉면을 맛있게 먹는지 몰랐다. 옥류관은 1관, 2관이 있는데 육수 맛이 약간 차이가 있어서 평양시민들 중에서는 그것까지도 구분해서 다닐 정도로 냉면 맛에 예민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면이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100그램 정도를 추가로 더 주는데 나는 그것까지 받아먹고야 젓가락을 놓았다.

나는 한국에서도 가늘고 질긴 함흥냉면보다는 구수하고 면이 부드러운 평양식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잘 먹었는데 함흥식을 선호하는 서울 사람들의 입맛을 고려해서 그랬는지 이곳의 면발은 생각보다는 질겨서 서울 을지로에 있는 우래옥의 면발보다도 쫄깃쫄깃했다.

마주 앉은 안내원 동무가 평양소주를 몇 순배 돌리는 바람에 반주를 겸하고 나서 우리는 강변 난간으로 몰려가 다시 사진을 찍었다.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세느강에 실망을 해서 역시 우리 한강 정도는 되어야 도시의 강으로서 역할을 하겠다 싶었는데 대동강도 평양을 휘돌아 나가는 규모가 대단했다.

추가로 더 줄 때 100그램 정도의 면을 얹어내는 새끼 냉면 그릇
추가로 더 줄 때 100그램 정도의 면을 얹어내는 새끼 냉면 그릇 ⓒ 정용국
워낙 서울의 기온이 공기 오염, 차량의 매연가스로 등으로 심하게 높고 나빠서 평양에 오면 조금은 시원하지 않을까 했는데 평야의 더위도 만만치 않아서 늘 부채를 들고 다녀야 할 정도로 무더웠다. 우리는 강행군의 일정에 치여 개선문으로 문인묘소로 지하철 탑승으로 바빴다. 대표단은 두 팀으로 나뉘어져서 일부는 문인묘소로 갔고 우리는 위의 일정대로 움직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순안 비행장에 내려 김정일 위원장과 동승한 채 달렸던 장면 중에서 큰 문아래로 내달리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개선문이었다.

1925년, 1945년 두 연도가 각각 기둥에 새겨진 개선문은 김일성 주석이 무장항일투쟁을 끝내고 광복된 조국에 돌아온 것을 기념해서 세운 문이라고 하였다. 처마 부분에 ‘장백산 굽이굽이’ 로 시작되는 노랫말이 새겨져 있어서 이경자 선생이 노래를 한 번 불러보라 했더니 여성 안내원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자세를 고치고 결연한 모습으로 노래를 불러 주었다.

아스팔트 위의 그늘 한 점 없는 곳이어서 우리는 서둘러 지하철 부흥역으로 들어갔다. 평양의 지하철역은 서울의 지명이나 유명 학교 등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과는 달리 ‘부흥’ ‘영광’ ‘건국’ 등 추상명사로 지어져 있는 것이 특이하였다. 이미 텔레비전에서 본대로 부흥역도 아주 깊은 곳에 있어서 에스컬레이터로 굉장히 오래 내려가야 했다.

지상의 도로도 차량이 많은 편이 아니듯이 지하철 이용객들도 별로 없어서 4량의 객차가 가끔 오갈 뿐이었다. 깊은 곳으로 내려오니까 별도의 에어컨 시설이 없는데도 시원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일행 중에서 큰소리로 ‘반갑습니다, 서울에서 왔습니다!’ 하자 마주 오는 편의 시민들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대동강변 명당에 자리한 주체탑
대동강변 명당에 자리한 주체탑 ⓒ 정용국
지하철에서는 잠깐 오가며 만나거나 내리고 타기 위해 스쳐 지나가며 시민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지만 예정된 일정이거나 계획된 행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신선함을 느꼈다. 안내원들은 바짝 긴장하는 듯 했지만 반대로 우리들은 느긋하게 그들을 보았다. 김창규 시인은 지나가는 이들과 악수도 하고 어린이의 손을 잡아 보기도 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한 어린이는 빨간 머플러를 둘렀는데 김시인이 악수를 청하자 그 자리에 서서 처음엔 당황스런 표정을 짓더니 바로 그 멋진 거수경례(손을 머리 위로 들어 보이는 날샌 동작)보여 주며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그랬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은 다들 평양의 시민들과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공통된 욕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가 단 번에 자연스러운 의사를 소통하기에는 너무 높은 벽이 우리들 사이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 벽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무너질 것인가. 우리만 옳고 저들은 마냥 그르다고 한다면 벽은 더욱 견고해지고 높아질 것이요,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고 현상을 인정하려 하는 낮은 자세만이 그 벽을 빨리 무너뜨릴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소련 체제의 빠른 붕괴와 독일의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통일의 후유증을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일정은 너무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한꺼번에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확실한 자기들의 주장을 알아듣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디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한 것인가. 우리도 강압적인 시대를 거치며 지금은 상대방에 대하여 그 이해도와 깊이가 넓어지긴 하였지만 아직 시퍼런 법들과 정리되지 못한 생각의 갈래들이 줄줄이 엮여진 상황이 아닌가. 이것을 풀 수 있는 길은 남과 북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적절한 상황 조성에 힘써야 되며 또한 주변국들의 이해를 도출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들의 올곧은 신념으로 잦은 교류와 왕래를 지켜내야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평양 지하철역 내부 모습
평양 지하철역 내부 모습 ⓒ 정용국
마지막 일정으로 평양이 자랑하는 학생소년궁전을 돌아보게 되었다. 하루 오천 명의 학생들이 학과와는 별도로 특기교육을 할 수 있는 국가적 차원의 기관인 셈이어서 그들에게는 한국의 사교육비 문제에 대해 ‘우리는 국가가 다 해 준다’ 하는 식으로 선전할 수 있는 장치였으니 안내원은 신이 나서 이곳저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설명에 바빴다. 우리와 같은 시간 대에 일본에서 온 듯한 조총련계 학생들과 몇몇 외국인들이 거의 같은 시간에 시설과 교육내용을 구경했다. 수많은 방을 들락날락 하며 돌아보게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김부자의 사진이 정연했고 설명에도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학생들의 총체적인 교육내용을 모은 대공연이 공연장에서 6시에 있어서 외국인들과 함께 관람했다. 체조, 춤, 노래, 교예 등 잘 짜여진 공연이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곡으로는 ‘우리는 하나’를 들으며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들과 구체적인 생각과 방편이 다를지라도 ‘통일’ 과 ‘조국’ 이라는 명제는 결국 하나이기 때문이라서 그럴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당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통일과 조국을 논할 수도 없고 이야기 자체를 피하는 상황이므로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단어를 가지고 속은 감춘 채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껍데기 말만 할 수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지 않은가?

학생소년궁전에서 있은 공연의 마지막 장면.
학생소년궁전에서 있은 공연의 마지막 장면. ⓒ 정용국
어린이 공연이기는 하였지만 서양악기를 사용하고 서양 음계를 쓰더라도 국악이 들어가 함께 할 때는 우리의 악기와 가수를 앞세워서 강한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려는 연출이 돋보였다. 모든 예술 분야에서도 고유의 것을 간직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그것이 단순히 ‘미국’을 반대하는 역작용으로서 강조되어진 면이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좋다. 우리가 어린이 공연자들과 함께 손뼉을 치고 더러는 눈물도 찔끔거렸다 한들 나쁜 게 무엇이 있겠는가 ‘조국은 하나’라는 노래 속에 사상적 냄새가 나면 또 어떻고 우리가 이 밤만이라도 조금 그들의 선전을 들어주는 척 하더라도 용서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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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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