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본인 소개를 하자 상대방도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는 김형직 사범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하고 현재 시인으로 창작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경심 시인이라고 했다. 나이는 서른 일곱이니까 69년생으로 나와는 같은 닭띠인 셈이었다. 내가 띠동갑이라고 하자 그녀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남쪽에서는 같은 띠를 가진 사람들끼리 이런 말을 쓴다고 했더니 재미있어 했다.
박 시인은 키가 작달만하고 통통한 삼십 세 후반의 전형적인 중년 티가 나는 여자의 몸매를 하고 있었다. 말과 행동이 활달한 편이어서 질문에도 솔직하고 시원스럽게 답해 주었다. 평양 시내에는 윗옷을 벗고 런닝셔츠 바람이거나 단추를 열어놓고 다니는 남자들의 옷차림이 많이 보였다.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더우니까 아예 웃통을 벗은 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박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성 동무들 팔뚝도 울퉁불퉁 하고 보기 좋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얼마나 웃었던지.
서울은 여자들의 심한 노출이 문제가 되지만 평양의 여자 옷차림은 아주 단정하고 반듯했다. 민소매도 없었고 무릎 위로 올라가는 치마도 찾아 볼 수 없었으니 아직 유교적인 관습이 상당 부분 한국보다 정연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평양의 남편들은 집안일 잘 도와주느냐는 질문에는 짧게 망설이더니 잘 도와준다고 대답했는데 거짓부렁 같았다. 웃는 것도 그랬고 자신감이 모자란 대답이었다. 그녀도 내게 평양에 온 소감을 물었다. 순간 나는 서영채 교수와 나누었던 대화처럼 솔직히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헷갈리고 있어서 이런 대답을 주고 말았는데 그녀가 다 이해했는지는 미지수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무지무지 기쁘다. 그리고 반갑고 너무 좋다. 그런데 심란하다."
이렇게만 대답해 주었는데 그 '심란' 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녀도 시를 쓰는 사람이므로 나의 그 복합적 심란의 의미를 대강 알아들었으리라. 공항까지 20분 정도 밖에 안 걸리는 거리인데도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위의 대화 외에도 박 시인이 남쪽은 너무 미국에 경도되어 있다는 의견을 말했고, 우리 어머니가 원산 명태를 좋아하셨는데 평양에서도 그것이 유명하냐고 물었다.
또 전승기념행사와 당 창건 60돌 기념 준비로 바쁘다는 말, 더 나아가 한국에서의 고부 간의 갈등에 대한 내 말을 듣더니 '부모는 당연히 봉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되물어 나를 당혹케 했다.
광복 60주년 기념식에 북쪽에서도 오기로 했다는 소식도 말해 주었으니 20분간의 대화는 알뜰하고도 쉴 새 없이 이어졌던 모양이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면서 내 시집 한 권과 스타킹을 선물로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시집 속에 미국이 조선을 '악의 축' 이라고 비난한 것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 ' 로 비유한 시구를 찾아서 보여주었다.
공항 대기실에서는 남북 문인들이 서로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통성명을 하고 악수도 나누고 옆에 있는 이들을 소개하고 인사하였다. 조선에서는 주로 조선작가연맹의 간부급 문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버스에서 내 옆 자리에 앉았던 박경심 시인이 제일 젊은 축에 속하는 참가자인 것으로 보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조선작가동맹에 속해 글을 쓰는 문인의 수는 한국에 비하면 훨씬 적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그 중 홍명희 선생의 손자로 이번에 창작과 비평사에서 주는 만해문학상을 받은 홍석중 소설가가 우리에겐 제일 유명했고 강진이 고향인데 가족과 헤어져 북에 있는 오영재 시인도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비행기 좌석은 표기가 별도로 되어있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순서대로 앉으면 되었다. 안내양들을 보니 인천공항에 왔던 여성 동무들이어서 반갑게 인사하고 장난도 치고 하였다. 비행기는 11시 30분에 신속하게 이륙했고 바로 점심은 곽밥이 제공되었다. 명태전과 김치, 쌈장과 남새와 토마토 등이 들어 있는 점심을 아침이 소홀했던 나는 다 비웠다.
삼지연 공항은 해발 1300m 백두산 중턱쯤에 있는 공항이었다. 청사나 시설은 세 동 밖에 없었고 활주로도 대형 여객기가 오기에는 어렵다고 했다. 현대그룹에서 지난 번 김정일 위원장과 백두산 여행을 합의할 때 현대측이 공항 활주로 공사를 위해 콜타르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한다.
백두산 베개봉 호텔로 우리를 태우고 갈 소형 버스가 공항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버스는 평양의 버스에 비해 훨씬 노후된 것이어서 에어컨도 없고 유리문도 잘 열리지 않았다. 우리는 더워서 천장에 있는 밀어 올리는 창을 열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김창규 형은 이번 여행길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예의 넘치는 활기와 개인기로 우리를 웃겼고 즐겁게 해주었다. 삼지연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홀연히 ' 백두산의 온갖 풀과 동물들도 우리를 반긴다' 로 시작되는 시로 도착성명을 대신하더니 백두산 올라가는 비포장 길에서는 다정하게도 하모니카로 섬집아기, 고향의 봄, 나그네 설움 등을 연주해서 박수갈채를 받았다. 백두산에 오르며 그와 나눈 대화는 열정에 가득 차고 희망에 넘치는 것들이었다.
비포장 도로긴 해도 그런대로 잘 닦인 길이었다. 처음에 나는 바로 베개봉 호텔로 가는 줄 알았더니 중요한 교육 코스가 하나 더 끼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김일성 주석이 항일무장 투쟁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김정일 위원장의 생가가 있는 밀영 유적지였다. 삼지연읍을 통과하자 혜산 72km라고 적힌 조그만 이정표가 보였다. 아, 혜산이 여기구나. 6·25 전쟁 중 북진 선발대가 압록강 물을 떠갔다던 그곳이 여기서 72Km만 가면 되는 곳이라니 우리는 과연 국경의 끝자락에 와있는 것이다.
백두산의 날씨는 워낙 변화무쌍해서 그 일출을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기로 유명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누가 아니랄까 해가 쨍쨍하던 날씨가 갑자기 하늘이 우중충해지더니 소낙비가 후드득 거리며 유리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버스는 울퉁불퉁한 길을 올라가는데 비는 내리고 갑자기 깊은 산골짝에서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 중간쯤에서 개는 척 하더니 밀영에 도착했을 무렵엔 아주 소나기가 잘도 내렸다.
이곳에 있는 안내원들은 여기를 자연스럽게 백두산 고향집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생가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아주 친근감이 묻어나는 별칭이라고 여겨졌다. 남과 북의 대표단들은 밀영에서 화장실도 다녀오고 담배도 피우며 비를 피했다. 화장실에 전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산골짝에는 전기가 안 들어오는 것 같았다.
우리 조의 김원일 선생님은 원래 말수가 없으신 분인데 가끔 넌지시 한 마디씩 던지시는 말에는 의미있는 웃음이 묻어났다. 밀영에 내린 일행들이 여기저기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애연가이신 김원일 선생님이 당신이 다 피운 꽁초에 불을 꺼서 담배갑에 다시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김종해 선생님이 농으로 칭찬을 하자 김원일 선생님은 "이런 성지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니!"라고 응수하여 우리는 속으로 많이 웃었다. 여럿이서 여행을 하다 보면 힘들고 짜증날 때도 더러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서로 조금씩 이해하고 격려하는 사이에 금방 정이 드는 것을 보면서 여행의 참맛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