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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법사·정보위원회 소속의 최재천 의원(서울 성동 갑·열린우리당)이 지난 19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1차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에서 채택된 공동 발표문에 규정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한 긴급 기고문을 보내왔다. 최 의원은 공동발표문을 면밀히 분석한 이 글에서 발표문에 담긴 7개 쟁점을 조목조목 짚고 '전략적 유연성'의 전면 수용은 참여정부 외교안보정책의 전면 폐기라고 주장했다. 최 의원이 지적한 7대 쟁점을 2회에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주>
▲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왼쪽)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19일 워싱턴 국무부에서 제1차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를 가진 후 기자들을 만나고 있다.
ⓒ AP/연합뉴스
1. 참여정부 외교안보정책의 전략적 실패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은 단순히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의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와 동북아 운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한미동맹의 핵심 현안이다. 나아가 참여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성패를 결정하고, 먼 훗날 (혹은 가까운 시일 내에) 정치적, 역사적 책임까지도 거론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1월 19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에서 한미 양국은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 합의했다. 이로써 가장 좁게는 '동북아 균형자론'은 전면 폐기됐다. 더 나아가 참여정부 국가안보전략 기조인 '동북아 평화번영 정책'과 '다자안보추진', '균형적 실용외교'까지도 사실상 철회된 것이 아닌가 하는 근본적 의문을 갖게 한다.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환경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일극주의에 기초한 미 동북아 전략의 하부 체계로 편입되고 만다. 결국 참여정부만의 독자적인 외교안보 정책은 설 자리가 없다.

새로운 한미동맹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참여정부 초기의 역동성은 찾아볼 수가 없다. '남북공조'냐, '한미동맹'이냐의 택일을 강요하던 보수파들의 이분법적 압박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남북한 관계와 한미동맹 관계, 나아가 동북아시아 전반을 아우르는 전략적 관계 설정에 실패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2. 수용이냐, 거부냐의 문제가 아니다

전략적 유연성의 합의를 바탕으로 이제 한미동맹은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었다. 냉전시대의 한미동맹이 한반도 방위만을 목적으로 했던데 반해, 새로운 한미동맹은 미국이 추구하는 세계군사전략 변환의 논리를 수용하게 됨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한미동맹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역시 이 문제도 '수용이나 거부냐'는 이분법적 차원으로 접근할 위험성이 있다. 전략적 유연성의 수용 거부를 한미동맹에 대한 거부로 몰아붙일 위험성도 있다. 하지만 이래서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냉전 시대 주한미군에 주어졌던 역할만을 수용하라고 미측에 요구할 경우, 당장 주한미군의 대폭 감축 내지는 철수 논의로 직결될 것이다. 지난해 10월 도널드 럼스펠트 미 국방장관이 방한 당시 "국익을 위해서는 하나의 군사력만이 존재하며 미국 국민들은 한 나라의 방위만을 목적으로 하는 병력 주둔은 감당할 수 없다"고 발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칫 미군 철수 문제가 공론화됐을 때 여전히 이데올로기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이를 감내할 여건이 충분히 구비돼 있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그래서 자주국방은 여전한 우리의 과제이다.

엄중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감안할 때 명시적이고 무조건적인 반대는 오히려 치명적이다.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되 '대중외교'(Public Diplomacy)를 지향하고 국민 참여를 핵심 절차로 삼는 참여정부답게, 참여정부의 독자적인 평화번영정책에 기초를 두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면서 이해를 구할 것은 구하고 진실만은 분명하게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이번 공동성명은 그런 점에서 전혀 참여정부답지 못했다. 지난 3년간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를 국민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왜 갑자기 '수용'으로 돌아섰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참여정부의 독자적 외교안보정책과 어떻게 논리적 일관성, 정합성을 갖는지도 설명되지 않는다. 진실은 여전히 저 너머에 있다.

3. 동북아 지역 분쟁에 주한미군이 개입하는 것을 한국은 전혀 제어할 수 없다

▲ 청와대 홈페이지에 게시된 '전략적 유연성’관련 설명 자료.
ⓒ 청와대 홈페이지
정부는 주한미군의 해외 파견을 원칙적으로 허용하되 주한미군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될 경우 사실상 한국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최근 들어 외교 당국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창조적 모호성'이다. 동의 여부에 대한 어떠한 확실한 설명도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다음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게시된 공동성명의 일부분이다(강조는 필자).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다음은 이 문장의 영어 원문이다.

"In the implementation of strategic flexibility, the U.S. respects the ROK position that it shall not be involved in a regional conflict in Northeast Asia against the will of the Korean people."

그런데 <중앙일보> 1월 22일자에 실린 공동성명 내용은 좀 다르다.

"전략적 유연성을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미국은 주한미군이 한국인들의 의지에 반해서 동북아의 지역갈등에 개입하면 안된다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조선일보> 1월 22일자에 실린 내용은 이렇게 돼 있다.

"미국은 (주어 생략)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 녹색연합, 민교협, 민중연대, 참여연대, 평화네트워크, 평통사, 황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 20여명은 23일 오전 청와대앞 합동청사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로 인해 한반도가 미국의 군사행동을 지원하는 전초기지가 될 것이라며, 동맹 재편에 관한 국민적 토론과 의견수렴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정부 발표를 기준으로 보자.

첫째, 한국은 주한미군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반대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사실상 주한미군은 전출이 자유롭다.

둘째, 정부나 일부 신문의 해석과는 달리 주한미군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하게 되더라도 이를 막을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사전 혹은 사후에 대한 '합의'는 물론 '협의' 조항조차 없다.

셋째, 이 부분은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논란의 대상인데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번 공동성명으로 사실상 일부 무력화됐다. 한반도 방위 목적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동전쟁을 이유로 한미연합전력(주한미군과 한국군)을 빼내가려 할 때 한국은 과연 거절할 수 있는 것일까?

현재의 발표문상으로는 전혀 거절할 수 없다. 주어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원문과 다르게 주어를 자의적으로 바꿨다는 데 주목해 달라. 위에 제시한 문장들을 정밀히 비교해 보시기를 바란다.)

영문이나 한글 원문에 의할 때 '한국(또는 한국군)'은 동북아지역 분쟁에는 "한국민의 의지에 반해 개입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외의 지역 분쟁에는 충분히 개입이 가능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필자만의 기우에 그치는 것일까. 물론 외교 당국자들은 모호성을 근거삼거나 혹은 충분한 내부 논의가 있었다는 점을 들거나 한미동맹의 정신에 비추어볼 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대들 것이다. 필자도 그러길 바란다.

▲ 최재천 의원
하지만 용산기지이전 협정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다시 그런 논리를 들이대서는 안된다. '계약'은 그저 '계약'일 뿐이다. 국가간의 계약도 마찬가지다. 계약은 문리 해석이 가장 먼저다.

정부는 동북아지역 분쟁 자체가 개연성이 낮다며 명확한 해석 자체를 회피한다. 하지만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고 최소한 수십년간 한미동맹의 준거 틀을 바꾸는 과정이 이렇게 단순하고 모호해서야 어떻게 국민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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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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