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들, 엄마 좀 도와주라. 놀면 뭐하니 효도 좀 해라."
"뭔데요?"
"오늘 제수 장만하러 시장에 가는데 같이 가서 짐 좀 들어 달라구."
"그랴 댕겨와라. 할미가 다리가 아파서 못가니 너라도 가서 엄마를 도와야지."
"시장에를요? 그냥 백화점에서 시키지… 꼭 시장을 가야 돼요?"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할머니의 당부에 녀석은 어쩔 수 없이 엄마 뒤를 따라나섭니다.
지난 해 수능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한 작은 아들 녀석은 결국 올해 대학입학을 포기하고 재수를 선택했습니다. 녀석은 입원한 상태로 치른 수능에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자 누가 뭐라지도 않았는데 다 때려치우고 자원입대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적반하장격으로 오히려 골을 부리는 녀석을 어르고 달래고 야단쳐서 겨우 마음을 돌려놓았지만 엄마는 아직도 녀석이 마음을 잡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이런 녀석을 데리고 설장을 본다는 구실을 내세워 시장을 가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구실을 붙이기는 했지만 단 한번도 재래시장에 나와 본 적이 없는 녀석이 열심히 사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을 보고 뭔가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었으면 하는 막연한 욕심이 작용했기 때문이지요.
설을 사흘 앞둔 재래시장은 의외로 그리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몰리는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을 시기지만 경기가 안 좋은 탓인지 설연휴가 길지 않은 탓인지 시장을 찾는 손님들의 발걸음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재래시장의 장점은 역시 저렴한 물건값입니다. 어제 다녀온 백화점에서는 5천 원 하던 배가 시장에 오니 같은 크기인데도 4천 원입니다. 사과 역시 개당 천 원 정도는 저렴한 데다 세 개 값이면 다섯 개를 사고 덤까지 하나 얹어주니 역시 재래시장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듭니다.
"엄마 이것도 사요. 지난번 차례 때 먹어보니 맛있던데…."
아들은 떡집 앞에 가지런히 진열된 각색의 다식을 보고 자기도 아는 제수 음식이 있다면서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조율시이 다 샀어요?"
"뭐 조율시이? 그걸 알아? 하나 하나 말해봐. 조는 뭐고 율은 뭐고…."
"하 참 엄마는 내가 재수생이라고 그것도 모를 줄 알아요. 거 있잖아요. 조… 뭐더라? 하하하."
그리 춥지는 않은 날씨였지만 좌판에서 파는 어묵을 하나 집어먹은 아들은 집에서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습니다. 시장통의 생기가 녀석에게도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어묵 국물을 마시던 녀석은 시장 한 귀퉁이를 보며 조그맣게 속삭입니다.
"엄마 저기 저 할머니… 할머니 물건 좀 사드리죠."
"어, 뭘 파시는데?"
"그냥 사드리세요. 뭐든 사면 내가 먹을게요."
시장귀퉁이에 앉아 장사를 하시는 할머니가 마음에 걸리는지 아들은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을 보냅니다. 돌아다보니 할머니는 시금치니 오이니 야채류를 팔고 계십니다.
"너 안 먹어도 되겠다. 시금치는 제수에 들어가거든. 할머니한테 사지 뭐. 얼마나 살까?"
"많이 사세요."
"시금치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한다니까요."
시금치를 담아 주시던 할머니는 엄마를 따라 장을 보러 나온 제 아들을 보시더니 몇 년째 만나지 못한 당신의 손자 같다며 시금치 한 주먹을 덤으로 넣어주십니다.
"신퉁하네… 내 손주도 저렇게 컸을낀데… 잘 가요. 새해 복 많이 받구…."
"네, 할머니 많이 파세요. 할머니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야채장사 할머니께 마치 자기 할머니처럼 서너 번씩 살갑게 인사를 하는 아들을 보니 공연히 코끝이 찡해옵니다. 어쩌면 저는 녀석을 너무 어리다고만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무겁지? 엄마가 나눠 들까?"
"됐어요. 그동안 집에 있느라 운동도 못했는데 운동한다 생각하면 돼요."
"그래 그러면 그러던지. 호호호."
장보기를 시작한 지 한 시간 남짓 아들의 양손에는 서너 개씩 묵직한 검은 비닐봉지가 매달려 있습니다. 안쓰러운 어미 마음에 몇 개라도 나눠들자고 하니 한사코 혼자 들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녀석. 재래시장 구경 한 시간만에 부쩍 어른이 된 듯 엄마 앞에서 센 척을 하는 아들이 귀여워 웃음이 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모르는 새댁시절 저를 데리고 재래시장으로 장보러 다니셨던 시어머니의 심정도 이런 것이었을까요? 저에게 삶과 인생 그리고 사람을 배우게 해주었던 재래시장이 오늘은 아들에게 그것을 일러 준 듯합니다. 인생이, 삶이, 사람이 있어서 더욱 정이 가는 곳, 재래시장은 철없는 며느리와 아들에게 철도 살짝 들게 해주는 정말 고마운 곳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