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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대추초등학교 유리창과 벽면에 그림 작업 중인 미술가들. 48개 유리창에 48명의 주민 얼굴을 그렸다.
평택 대추초등학교 유리창과 벽면에 그림 작업 중인 미술가들. 48개 유리창에 48명의 주민 얼굴을 그렸다. ⓒ 문만식
지난 5일(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대추리 대추초등학교. 기온은 뚝 떨어지고 해는 기울어 그림자가 드리울 무렵, 그곳에는 한 무리 미술가들과 청소년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겨울 모자를 눌러쓰고 목장갑을 낀 사람들 옷에는 여기저기 아크릴 물감이 묻어 있었다.

그 학교 건물 유리에는 낯익은 대추리·도두2리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기자는 그 얼굴들이 얼마 전 대추리로 이사온 사진가 노순택씨가 찍은 사진에 나온 것임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환하다. 사람들이 밝게 웃는 모습을 좋아하는 노순택씨의 개성이 드러나 있었다.

권정안군 등 청소년들이 국민교육헌장탑에 그린 평화 그림. 아이들의 감수성이 투박하게 묻어나 있다.
권정안군 등 청소년들이 국민교육헌장탑에 그린 평화 그림. 아이들의 감수성이 투박하게 묻어나 있다. ⓒ 문만식
하지만 사진에서 사람들 얼굴을 따온 것을 빼면 나머지 그림들은 모두 미술가들의 창작이다. 벽면 전체는 가을 들판을 상징하는 연두색과 초록색이다. 큰 창에는 인물 그림을 그리고 바로 위 작은 창에는 그 이름을 적었다. 건물 앞에 세워진 오래된 조형물들도 새로 색을 입었다.

국민교육헌장탑에는 권정안(14)군 등 세 청소년들이 평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화가와 어린이 등 다른 사람들은 사자상에 예쁘게 색을 칠했다. '반공 소년 이승복'상과 포효하는 사자상, 그리고 '체력은 국력'상까지 눈길 한 번 받지 못하던 구조물들도 알록달록하고 화사한 색깔을 입었다.

현관 앞을 지키고 있는 무서운 사자상도 고운 옷을 입었다. 2층 벽 그림은 대추리의 소년 가수 일곱살 방병철의 얼굴.
현관 앞을 지키고 있는 무서운 사자상도 고운 옷을 입었다. 2층 벽 그림은 대추리의 소년 가수 일곱살 방병철의 얼굴. ⓒ 문만식
아버지 임종길 화백을 따라와 그림을 그린 열다섯살 임그림. "저도 오늘 그렸어요."
아버지 임종길 화백을 따라와 그림을 그린 열다섯살 임그림. "저도 오늘 그렸어요." ⓒ 문만식
1969년에 개교한 대추초등학교는 2000년에 폐교됐지만 그 뒤로도 마을의 대소사를 치르던 친근한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마을과 함께 평택미군기지 확장 예정지로 통째로 편입되면서 최근 교육청이 국방부에 매각했다. 이 마을에서는 벌써 3년째 미군기지 확장 저지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 달부터 뜻있는 사람들이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대추리를 평화촌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지난달 24일에는 문화예술인들 754명이 참여해 2월 초부터 약 12주 일정으로 '문예행동 2006 들이 운다' 예술제를 개시했다. 그 첫 작업이 바로 대추초등학교에 주민 얼굴을 그리는 것이었다.

주민들 그림. 오른쪽부터 홍민의, 김택균, 한승철, 김월주씨.
주민들 그림. 오른쪽부터 홍민의, 김택균, 한승철, 김월주씨. ⓒ 문만식
신대리 주민 송태경(37)씨는 "자기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주민들이 좋아한다"며 "땅을 지키고자 하는 분들에게 좋은 선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대추리 주민 홍민의(48)씨는 "실물하고 너무 똑같아 흐뭇했다"며 "날이 추워 손을 후후 불어가면서 고생한 작가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6일 마을 사람들은 학교에 그려진 자신의 얼굴을 보며 신기해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대추초등학교가 새로운 명소로 떠올라 고향땅을 지키는 싸움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짙게 묻어났다.

총연출을 맡은 목판화가 이윤엽씨. 작품이 생각대로 잘 나와 기분이 매우 좋다.
총연출을 맡은 목판화가 이윤엽씨. 작품이 생각대로 잘 나와 기분이 매우 좋다. ⓒ 문만식
이날 행사의 총연출을 맡은 목판화가 이윤엽(39)씨를 작업 현장에서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벌써 해가 기울었다. 몇 시부터 작업했나?
"아침 일찍 그리기 시작했다. 오늘 다 마친다는 계획이었는데 끝내지 못했다. 뒤처리는 각자 시간에 맞춰 하기로 했다."

- 작업에 모두 몇 명이나 참여했나?
"25명 넘게 했다. 미군 주둔에 반대하는 예술가들 모임인 '들사람들'이 있는데, 그 모임 가운데 수원 민미협과 성남 민예총 사람들이 참여했다. 수원에서는 '엽판네'라는 목판화 모임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참여했다. 조형물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생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했다."

- 다들 서로 아는 사이인가?
"작년 9월쯤 들사람 초기 모임에서 어디를 어떻게 꾸며볼까 의논했지만 함께 일해본 적은 없었다."

- 무엇을 그린 건가?
"'올해도 농사짓자'는 게 대책위 모토 아닌가. 그래서 벽면을 녹색으로 했다. 9월쯤의 새파란 논 벌판을 표현했다. 그 안에 이 땅의 주인인 사람들의 초상을 박아 놓은 거다. 유리창 총 48개에 48명을 그렸다."

- 그림에 대한 다른 의견은 없었나?
"사람들의 분노를 표현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주민들이 보면서 편안함을 느끼는 그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강하게 주장했다."

- 왜 굳이 인물 그림인가?
"벽면 자체가 유리를 빼고 나면 작아서 그릴 게 없다. 유리에 뭔가 그린다면 유리창 면을 살리고 유리창 여백도 건드리지 않아야 했다. 유리창 질감도 그대로 살리고 부서지지 않기 바라면서 결정한 거다. 초상만 그리고 배경 유리 부분은 칠하지 않아서 빛은 계속 들어오니까 창으로도 가능하다. 그래서 인물을 그렸다."

- 누가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건가?
"주민들 얼굴 사진을 1월 중순부터 내가 직접 찍었다. 그렇게 준비하고 있다가 사진가 노순택씨가 찍은 주민들 사진을 보니 너무 좋았다. 60여 장을 받았고 유리창 48개에 맞춰서 48장을 골랐다. 벽면에 그린 꼬마 두 명까지 하면 모두 50명이다."

- 만족하나?
"너무 추운데 다들 고생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함께 일해본 적이 없는 작가들인데 다 함께 해서 그렸다는 게 만족스럽다. 작품도 생각보다 느낌이 좋게 나오고 동네 분들이 너무 좋아했다. 그게 가장 기분이 좋다. 참여 작가들도 직장이 있는 사람들인데 희생을 한 만큼 뿌듯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도 기분이 굉장히 좋다. 같이 했다는 것도 그렇고 작품이 생각대로 너무 잘됐다."

- 주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 땅에서 영원히 계시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렸다. 건강하고 승리하시면 좋겠다. 저녁 촛불행사에서 그렇게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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