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표는 침묵했지만 박심이 선거판을 뒤집었다."
1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강재섭 후보가 이재오 후보를 재치고 새 당대표로 선출되자 당의 한 관계자가 한 말이다.
실재 경선 결과는 '이변'이었다. 근소한 차이기는 했지만 여론조사 내내 선두를 지켜왔던 이재오 후보가 강 후보에게 역전패 했다. 또 114명의 당내 소장개혁파 모임인 '미래모임' 단일후보로 나선 권영세 후보가 정형근 의원 등에 밀려, 지도부 진입에 실패했다.
일각에서는 5공 시절 인사가 2명에 대여 저격수까지 포함된 새 지도부를 두고 '한나라당이 거꾸로 가는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특히 대리전 양상을 빚은 이번 전대에서 '박심'(박근혜 마음)이 '이심'(이명박 마음)을 이겼다는 분석도 나왔다.
실제로 전당대회를 2, 3일 앞두고 유승민 전 비서실장 등 박근혜 전 대표의 측근들은 박 전 대표의 불편한 심기를 전하며 '이명박-이재오'를 겨냥 여론몰이에 나섰다.
한 당직자는 "당초 박 전 대표는 강재섭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가 강하지 않았다"며 "그런데 저쪽(이명박 전 시장)에서 세게 나오니까 이쪽(박근혜 전 대표)에서도 맞불을 놓아 역효과가 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리전·색깔론... 진흙탕 싸움 끝 강재섭 당권 쟁취
이번 전당대회 경선의 가장 큰 특징은 대리전과 색깔론, 흠집내기가 점철돼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는 것이다. 특히 경선 막판 '박심'을 내세운 당내 의원들과 박사모가 강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결국 전세가 역전됐다는 분석이다. 모 의원은 "박근혜 전 대표가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강재섭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는 '루머'를 전하기도 했다.
강 후보 역시 마지막 연설에서 "탄핵 역풍에 50석도 못 건질 때 '박근혜 당 대표가 (대표직을) 해야만 당이 살 수 있다'고 총대를 맸다"며 "저는 과거에 박근혜 대표를 위해 저를 버렸다"고 박심을 십분 활용했다.
그는 또 "야당은 어설프게 좌파 정권 흉내내면 안된다"며 "대통령도 운동권, 국무총리도 운동권. 여당 대표도 운동권인데 한나라당 대표는 색다르게 나와야한다"고 이재오 후보를 겨냥했다.
강재섭 후보는 당선 기자회견에서 '경선 승리가 '강심' 때문이냐, '박심' 때문이냐'는 질문을 받고 "결과적으로는 합쳐진 것"이라며 "하다보니까 정치는 현실이었고 많이 변질됐다"고 말해, 실제 박심이 작용했음을 인정했다.
강 후보측은 "대리전은 이재오 후보와 이명박 전 시장측이 먼저 시작했고 싸움도 먼저 시작했다"는 입장이다. 이 전 시장이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고, 인터뷰에서 '개혁적인 후보'를 언급한 것 등이 대리전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또 이 후보가 강 후보에 대해 '민정계'라는 말을 먼저 했기 때문에 색깔론이라는 부정적인 여론을 감당하면서까지 반격에 나섰다는 것이다.
대리전으로 이긴 강재섭, 대리전이 발목잡나
전당대회는 끝났지만 후유증은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경선 결과를 받아든 이재오 후보는 "한나라당이 새로 태어나지 못하고, 내부의 분열을 조작하거나 특정 후보의 대리가 돼서 이 당을 쪼개려고 한다면 온 몸으로 막아내겠다"고 격분했다.
이 후보는 또 "이 당의 부패세력과 격렬하게 싸워서 새로운 한나라당을 건설하겠다"고 말해 당내 치열한 노선 투쟁을 예고했다. 이 후보는 강재섭 후보가 수락연설을 할 때에도 7명의 후보 중 유일하게 박수를 치지 않아,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대리전으로 당 대표가 되는 데 성공한 강 후보에게 오히려 대리전이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신임 당 대표의 가장 큰 역할은 공정한 대선후보 경선 관리다.
그러나 강 후보는 경선에서 박심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대선후보 경선 때 어떤 식으로든 박근혜 전 대표를을 돕지 않을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실제 돕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명박 전 서울시장 측에서는 내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것이 자명하다.
강 후보에게는 현재 50% 이상의 지지율을 대선 때까지 가져가야 하는 역할도 부담이다. 지지율이 상한선을 친 이상 앞으로 떨어질 일만 남았다.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불공정 시비가 제기되고 당세가 한쪽 후보로 급격히 쏠리면 당 지지율의 하락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다.
대선 구도와 관련 한나라당의 불안정성이 한단계 높아졌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한 시사평론가는 "이명박 전 시장의 행보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며 "이 전 시장은 경선 결과에 무조건 굴복해야 한다는 말은 했어도 경선에 반드시 참여하겠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 내에서 세가 약화됐다고 판단했을 때 당내 경선에 어떤 입장을 취할 지가 주목된다.
남경필 "당이 전체적으로 보수화 되는 것 아닌가"
당내 소장개혁파 단일후보인 권영세 후보가 지도부 진입에 실패한 것 역시 이변으로 볼 수 있다. 권 후보로서는 경선 내내 지지율이 바닥을 치기는 했지만 당내 소장개혁파 대표, 젊은 후보라는 점에서 대의원들의 막판 표심을 기대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의원들은 대여 저격수로 불리는 정형근 후보를 선택했다. 정 후보는 검찰 출신으로 안기부(현 국정원) 대공수사국장 및 제1차장 등 요직을 거쳤고, 굵직굵직한 공안 사건에서 '폭로 전문가'로 활약해 왔다.
정 후보는 부산경남 지역의 유일한 후보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강세가 점쳐 졌었다. 북한 미사일 발사 위기로 불거진 최근의 '안보 정국'도 최고위원 당선에 한 몫 했다는 분석이다.
반면 권영세 후보는 원내외 114명의 미래모임 선거인단이 모여 선출한 단일후보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중도 노선을 펴왔기 때문에 '소장파 대표'라는 상징성이 약했고, 미래모임 내에서의 조직적인 지원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또 권 후보 자신이 유세나 토론회에서 강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따라 붙었다. 당내 일각에서 제기된 "소장파가 서울시장 후보까지 좌지우지 하니까 꼴보기 싫다"는 식의 반감도 득표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당내 소장파의 리더격인 남경필 의원은 권 후보의 낙선에 대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며 "최선을 다 했지만 아직 모자란 점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이 전체적으로 너무 보수화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