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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에 시어른들 모시고 고기집에 갔습니다.
지난 봄에 시어른들 모시고 고기집에 갔습니다. ⓒ 이승숙
이번 추석을 앞두고 아버님께 드릴 선물이 뭐가 좋을까 생각해 봤다. 아버님은 애들 때문에 어렵다며 우리더러는 용돈 보내지 마라 그러셨는데,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서운했다.

어떤 선물이 내 마음을 담은 선물이 될까 생각해 봤다. 그래서 <오마이뉴스>에 그간 올렸던 글들 중에서 아버님과 어머님에 관련된 글을 프린트로 뽑아서 아버님께 보내 드렸다.

프린트한 글들을 문서 봉투에 곱게 담아서 시댁 주소를 썼다. 그리고 '보내는 사람'란에 우리 집 주소를 쓰고 내 이름을 썼다. 마음이 약간 이상했다. 뿌듯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어찌 생각하실지 염려도 되었다.

"야야, 니가 문재(文才)가 있는 줄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그래 잘 쓸 줄은 몰랐다. 내가 마 너무 좋아서 사람들한테 다 보여줬다 아이가. 그랬더이 사람들이 전부 다 우에 이런 걸 다 썼노 이카면서 며늘아 니보고 기자라꼬 카더라."

"아버님예, 보시기에 좋으셨어요? 지는 마 아버님이 우째 생각하실지 조금 걱정 됐습니더."

"야야, 그런 걸 우에 글로 쓸 생각을 다 했노? 그런데 사진을 말이다, 그래 찍은 거 말고 산소 앞에서 다 같이 모여서 있는 사진 찍었으마 좋았을 텐데 싶더라."

"아버님 자연스러운 기 좋은 거 아입니꺼. 일부러 모여서 그래 찍으마 자연스럽지 않고 안 좋을 거 같아서 그래 했습니더."

"그래 그렇겠제? 그래 다 모여서 찍고 그라마 꼭 자랑하는 거 같겠제? 그래 니 말이 맞다. 자연스러운 기 좋은 기제."


96년 2월에 찍은 가족사진입니다. 지금은 식구가 더 늘었습니다.
96년 2월에 찍은 가족사진입니다. 지금은 식구가 더 늘었습니다. ⓒ 이승숙
결혼하고 한 십 년간은 아버님이 어려워서 말도 잘 못했다. 안부전화를 때맞춰 드렸지만, 그건 의무감에서 드린 전화였지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온 전화는 아니었다. 아버님이 말씀하시면 대답은 "네, 네…" 했지만, 진짜로 내 마음을 담아서 편하게 말하고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아버님이 편해졌다. 농사일이 고되셔서 가끔 약주 잡숫고 역정을 내셔도 그걸 내 마음속에 담아두고 꽁하게 있고 그러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안부 전화 역시도 일주일에 한 번씩 날짜 맞춰서 의무감에 드리는 게 아니라 아무 때고 불쑥불쑥 생각나면 전화를 드렸다. 내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전화 드리지 않다가 내 마음이 내키면 아무 때고 전화를 드렸다. 그러면서 아버님도 나도 서로에게 편해져 갔다.

"야야, 그거를 누가 볼라꼬 좀 돌라 카던데 내가 몬줬다. 그거를 우리 집에 놔둬야제 누구 주마 없잖아. 그래서 볼라꼬 좀 돌라카는데 몬줬다."

"아버님, 그거는 또 뽑고 또 뽑을 수 있는 거예요. 컴퓨터로 볼 수도 있고 얼마든지 여러 장 뽑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나? 그라마 여러 장 뽑아서 좀 보내도고. 내가 여기저기 좀 줄란다."


남편과 내가 연애할 때 아버님은 나를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결혼하던 그 당시는 연애결혼하는 그 자체를 누구한테 내놓고 말하기에 약간은 부끄럽게 생각하던 그런 시대였다. 체면을 중시하던 우리 아버님은 연애결혼을 한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데다가 내가 맏며느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염려하셨다.

세월이 만든 변화

누워서 나무 보면 나무도 꽃입니다. 모두 둥글게 하늘을 이고 있습니다.
누워서 나무 보면 나무도 꽃입니다. 모두 둥글게 하늘을 이고 있습니다. ⓒ 이승숙
자리가 사람을 만들어 주고 세월이 사람을 키워주는 법인지, 나는 맏며느리 자리를 그럭저럭 잘 해 나가는 것 같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다들 잘 해주셔서 별다른 무리 없이 잘 해내는 것 같다.

남편의 공이 크고 그리고 시동생들과 손아래 동서들의 공이 크다는 걸 나는 잘 안다. 또 시부모님이 나를 이만큼 키워주셨다.

나무들은 자라면서 점점 둥근 모양으로 변해간다. 어린나무일 때는 제 멋대로 가지들이 삐죽삐죽하게 자라지만, 세월이 더해지면 나무들은 둥글어져서 넉넉한 품으로 하늘을 받치고 있다. 그것처럼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둥글어지는 것 같다.

뭐든지 좋게좋게 생각하고, 너그럽게 여기며, 그렇게 세상과 사람을 품 안에 껴안는 것 같다. 까칠하게 각을 세우고 세상과 주변에 대들던 사람들도 나이를 먹으면 둥글어지고 너그러워진다. 나이가 든다는 건 둥글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님은 전에는 자식들이 안부 전화를 걸어주기만을 바라셨다. 하지만 어느 때부턴가 아버님도 변하셨다. 생각나시면 먼저 전화를 주신다. 그렇게 걸어주시는 전화에는 정이 담겨 있다.

아버님과 통화하느라 저녁이 늦어졌다. 퇴근한 남편에게 통화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당신 옛날엔 아버님과 말도 잘 못하더니 이제는 변호사 다 됐네. 시아버지랑 그렇게 오래 통화하는 며느리가 또 있겠나?" 그랬다.

아버님과 나는 천천히 서로 이해하게 된 거 같다. 20년 세월이 그냥 지나간 건 아니었나 보다. 모래에 물이 스며들 듯이 소리 없이 서로 이해하게 된 거 같다.

상대방을 나한테 맞추려는 욕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니까 편해졌다.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 같다. 글도 그렇고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고 모든 건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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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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