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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각과 현실이 심하게 괴리될 경우, 사람들은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성향을 강하게 보인다. 자신만의 이상향을 만들어서 그것을 구현하려는 노력을 어떤 식으로든 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스파르타쿠스의 난이나 태평천국 운동처럼 사람들을 규합해서 폭력적으로 나아가는 방식도 있고,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책으로 표현하는 방식도 있다.

바이에른 공국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도 이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 시절부터 점점 무너져가던 왕권의 실상을 목격했다. 왕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는 상황에서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와 교류하기 시작했고, 점점 바그너의 오페라에 심취했다. 왕이 되자 루트비히 2세는 불안한 현실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이상 세계를 직접 구현하려는 노력에 착수했다.

▲ 성 아래 주차장에서 본 호엔슈반가우 성. 루트비히 2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가 만든 성이다.
ⓒ 한대일
독일 남부의 조그마한 도시 퓌센의 대표적 관광지인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은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건설됐다. '새로운 백조의 성'이라는 뜻의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이름답게 백조 장식물이 곳곳을 수놓고 있다.

험준한 절벽 위에 백조 한 마리가 다소곳이 앉아있는 것 같은 성채를 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관광객들은 최악의 지형적 조건에서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성을 건설했는지 궁금해하는 한편 인간의 경이적인 힘에 놀라움을 표하기 마련이다. 특히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디즈니랜드의 상징인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성의 모델이기에 관광객은 더 친근감을 느낀다.

성 아래쪽에서 성 입구 근처까지 가려면, 걷거나 마차를 타거나 미니버스를 타야 한다. 30분쯤 걸리는 도보는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침염수림 숲길을 체험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많이 권하는 방식이다. 마차는 미니버스보다 느리고 요금이 비싼 점이 문제이긴 하지만, 옛날 방식의 이동 수단을 경험하고 싶은 관광객에게는 운치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수단인 미니버스는 마리엔 다리 근처까지만 운행되며, 성까지 가려면 거기서 조금 더 걸어야 한다. 버스표는 성으로 올라가는 버스와 성에서 내려가는 버스에서 모두 통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성 밑으로 내려가는 버스에서 표를 걷는다. 그러니, 올라가는 버스에서 표를 걷지 않았다고 해서 이를 그냥 버려서는 안 된다.

▲ 성 근처까지 운행되는 미니버스
ⓒ 한대일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관광객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성으로 직접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성이 잘 보이는 마리엔 다리로 가는 길이다. 필자는 먼저 마리엔 다리로 올라가 성의 전체적 모습을 본 뒤 성 가까이로 갈 것을 권한다.

▲ 정류장 근처의 갈림길. 왼쪽이 성, 오른쪽이 마리엔 다리로 가는 길이다.
ⓒ 한대일
마리엔 다리의 이름은 루트비히 2세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높은 절벽을 연결하는 마리엔 다리에서 보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환상 그 자체이다.

성 자체와 그 주변 경관이 워낙 환상적이기에 어느 때에 가든 아름답지만, 특히 단풍잎이 휘날리는 가을에 가면 더욱 아름다운 성을 볼 수 있다. 마리엔 다리에서는 누구든 사진기사 부럽지 않게 성을 아름답게 찍을 수 있으며, 십중팔구 그 사진은 여행 때 그 관광객이 남긴 베스트 샷(best shot) 중 하나가 될 것이다(그것이 사진 찍기 실력에서 나온 건지, 아름다운 경관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턱이 없지만).

▲ 마리엔 다리. 담력이 약한 사람에게는 다소 무서운 곳이다.
ⓒ 한대일
성은 한국의 창덕궁과 같이 가이드 동반 관람만 허용되며, 개인별 자유 관람은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성 내부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성문 안의 마당에 들어서기만 해도 성의 아름다움을 자세히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백색 도시인 '미나스 티리스'가 연상되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그 이미지대로 백조가 따로 없을 정도다.

▲ 마리엔 다리에서 본 노이슈반슈타인 성
ⓒ 한대일
이런 외적인 아름다움 못지않게, 이 성은 최첨단 방식으로 건설됐다. 1869년 시작된 공사는, 열악한 입지 조건과 천문학적 경비로 17년의 세월을 끌었다. 성 내부에는 현대식 중앙난방시설과 음식 운반용 선반 엘리베이터 등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신식인 기술들이 도입되어 있다.

▲ 노이슈반슈타인 성문
ⓒ 한대일
당시 독일은 30년전쟁 후 시작된 영주국 중심의 체제가 뿌리부터 뒤흔들리는 상황이었다. 강대한 프로이센의 입김에 수많은 독일 영주국들은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었고, 독립과 자치를 자신할 수 없는 처지였다. 또한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혁명적 생각들은 영주국들의 왕권 약화를 가져왔다.

바이에른 공국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비스마르크 앞에서 바이에른 공국은 무력했고, 결국 루트비히 2세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제국에 편입됐다. 독일 제후들은 독립적 지위를 잃은 채 독일제국 황제인 빌헬름 2세 아래로 들어갔다.

▲ 성문에서 바라본 성 내부 영역
ⓒ 한대일
루트비히 2세는 어려워진 현실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그 길을,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백조의 전설'에 나오는 성을 짓는 것에서 찾았다. 성 건설은 루트비히 2세에게 현실의 탈출구이자 자신이 꿈꿔온 이상의 현실적 구현이었고, 넓게 보면 추락한 왕권을 신장하기 위한 최후의 시도였다.

이 때문에 루트비히 2세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 건설 과정에서 죽어갔는데도 계속해서 성 건설을 밀어붙였다. 채권자들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루트비히 2세는 막무가내였다. 이처럼 자신의 이상 구현에 방해가 되는 세력이 차차 모습을 드러내자, 왕은 정신이상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기존 내각의 대신들을 해임하고 자신이 총애하는 마부, 요리사, 시종을 주요 관직에 앉히는 이해할 수 없는 개각을 단행했다. 국정도 이들과 의논하고 주요 정책에 관해 검토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도장만 찍기 시작했다. 자신의 침실을 모두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같은 방식으로 개조하는 등 이미 멸망해 버린 옛 프랑스 왕실의 화려함을 재현하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가끔씩 환각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 망루의 모습
ⓒ 한대일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재정 부족으로 인해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착공 17년만인 1886년에 완성의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루트비히 2세의 정신 분열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심각해질 뿐이었다.

결국 대신들은 권위 있는 정신과 의사들에게 왕이 정신병자임을 입증하는 진단서를 받아내고, 1886년 6월 9일 루트비히 2세를 쫓아낸 다음 그 자리에 왕의 숙부를 앉혔다. 이렇게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루트비히 2세 시대는 마침표를 찍었다. 왕이 성에 머무른 기간은 172일에 불과했다. 17년 동안 들인 엄청난 공력에 비하면 허무할 정도로 짧은 기간이다.

왕위에서 물러난 지 3일 뒤, 루트비히 2세는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익사였다. 그 옆에는 루트비히 2세의 정신병을 진단한 구덴 박사의 목 졸린 시신도 있었다.

루트비히 2세의 죽음은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자살론이 우세하지만, 일부에서는 대신들이 타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폐위된 후 루트비히 2세와 구덴 박사가 같이 있었던 3일이라는 짧은 기간을 주목하지만, 아쉽게도 이때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루트비히 2세의 유일한 충신이라 할 수 있었던 듀크하임 백작이 루트비히 2세를 독일에서 탈출시키려 노력한 것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결국 루트비히 2세는 이상을 구현하지 못했고 자신까지 파멸에 이르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사람들은 루트비히 2세를 '미치광이 왕'이라고 부르지만, 그에게 이런 정신적 혼란을 겪게 만든 당시 사회 상황을 고려하는 이는 별로 없다.

당시 독일 현실은 그를 계속 옥죄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고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아름다운 성을 만들어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왕 개인의 욕심 때문에 수많은 국민들이 고통 받고 바이에른의 재정이 바닥난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과를 따지는 일과는 무관하게 우리가 그의 죽음을 한 미치광이의 죽음이 아닌, 이상 구현 실패에 따른 좌절의 결과물로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 성 내부 영역의 모습
ⓒ 한대일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입실론 (Epsilon)'이란 필명을 쓰고 있으며, 현재 싸이월드에 '입실론의 C.A & so on Travel 가이드페이퍼'를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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