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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리에서 버스를 타고 금강산으로 이동하는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꽃들이 여기저기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이동중에는 사진촬영을 할 수 없기도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저 작은 꽃을 찍을 방도는 없었다. 게다가 160mm이상의 렌즈는 가져갈 수도 없으니 줌으로 당겨서 찍을 수도 없는 일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그 길을 천천히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꽃이 피어 있는 길은 걸어야 제 맛이다. 그래야 꽃을 만나면 그를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듣는 법이다. 그렇게 그들과 앉아 얘기를 나누다 보면 또 다른 손님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그런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존재조차도 몰랐던 참조팝나무를 금강산에서 만났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구룡폭포를 향하는 길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꽃은 노랑제비꽃이었다.
남녘땅에서는 이미 꽃 지고 씨앗이 맺힌 지가 언제인데, 단 한 송이지만 상한 곳 없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바람때문에 결국은 담는 데 실패한 금강봄맞이꽃, 씨앗을 소담스럽게 맺고 있는 처녀치마, 돌틈에서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돌양지꽃, 이파리 청청한 돌단풍을 보면서 북녘땅이라고 다르지 않게 피어나는 그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통일이 되면 정녕 그들도 기뻐하리라. 온 산천초목이 함께 기뻐하리라.
금강산은 흙이 많지 않아 보였다. 바위투성이의 산, 그 바위의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삶이 만만치는 않을 듯해 보였다. 그래도 그렇게 그 곳에서 피고지는 이유는 금강산에서 피고진다는 자부심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금강에 살어리랏다.'
힘들고 어려워도 아름다운 금강에 살어리랏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비췻빛 소(沼)와 담(潭)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목마른 줄 모르고 피어난 참조팝나무, '참'자가 들어가면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참조팝나무는 어느 부분을 식용할 수 있는 것일까? 이파리 아니면 꽃?
봄이면 하얗게 피어나는 조팝나무를 보면서 보릿고개를 떠올리고, 이팝을 떠올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조팝나무가 지고 봄의 끝자락에 서면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니 그 사이 하얀 조팝나무, 이팝나무의 꽃을 보면서 고봉에 가득 담긴 쌀밥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참조팝나무는 개화 시기가 조금 늦는 것 같았다. 이미 해금강으로 가는 길에 지나는 양지마을, 고성평야에는 탐스러운 보리가 누렇게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참조팝나무는 눈으로 먹는 꽃은 아닐까 싶었다.
어릴 적 소풍을 가면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조금 여유 있는 아이들은 밥에 색깔이 들어 있는 도시락을 싸왔다. 아마도 색소를 넣어 노랑색, 분홍색, 연록색의 밥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밥이 왜 그렇게 맛나 보이던지... 참조팝나무의 화사한 색감을 보면서 나는 그 밥을 생각했다.
삼일포가는 길에 통과해야 하는 온정리와 해금강가는 길에 통과해야 하는 양지마을은 이웃마을이다. 물론 차량 이동중에 눈으로만 본 것이지만 온정리의 땅은 척박해 보였고, 양지마을의 땅은 비옥해 보였다. 아주 오랜만에 쟁기끄는 소를 보았고, 농기계를 거의 보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릴 적 농촌의 풍경을 보는 듯했다.
어릴 적 배고팠을 때가 참 많았고 조팝나무의 흐드러지게 핀 꽃들도 많이 보았는데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지 못해서 단 한 번도 그 꽃들을 보면서 이팝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야 이팝나무의 이름이 붙은 내력이며, 조팝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내력을 알고 나서야 '참 재미있는 그러나 슬픈 이름이네'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삶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다른 것이리라. 고난도 어떤 이에게는 약이 될 수 있고, 부유함도 어떤 이에게는 독이 될 수 있는 것, 그래서 삶은 살만한 것이 아닐까 싶다.
바람은 불고, 정해진 시간에 여행객들이 움직이다보니 진득하게 앉아서 꽃을 찍을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도 금강산의 꽃인데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일이니 나름대로 정성껏 찍는다. 안내원이 다가와 무엇을 하느냐 묻는다.
"아, 꽃 찍습네다. 꽃이 참 예쁩네다."
나도 모르게 북한 사람들의 말투로 대답을 했다. 어쩐지 그들이 볼 때에는 사치스러운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어디 피어도 다르지 않은 꽃, 한번 뿌리를 내리면 평생 그 곳에서 살아가니 다른 꽃들은 어떻게 피었나 보면서 피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냥 속내에 품고 있던 것들 때가 되니 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곳에 핀 꽃이든 다르지 않으니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가 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비교하며 살아감으로 인해 행복한 일보다 불행한 일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참조팝나무, 그는 그로 만족한다. 조팝나무나 꼬리조팝나무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한가보다. 금강산의 조팝나무, 누구 흉내를 내지 않았어도 참 화사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5일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열린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6·15공동선언 이행과 평화통일을 위한 금강산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둘러본 금강산에서 만난 들꽃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