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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마다 따스함이 배인 달내마을 할머니가 밭에서 일하시고 있다.
말 한마디마다 따스함이 배인 달내마을 할머니가 밭에서 일하시고 있다. ⓒ 정판수
어제 밀린 일 처리하느라 늦게 잔데다가 오늘 직장에 가지 않아도 돼 늦게까지 이불 속에 들어 있으려는데 밖에서 개가 자꾸만 짖어댔다. 이맘 때쯤이면 녀석들에게 변 볼 기회를 주러 밭 저쪽에 옮겨줘야 했기에 그러는가 하여 밖을 보니 비가 제법 내리고 있어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일어나야 하는 법.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어 깨어나 보니 아직도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태풍의 영향으로 계속 비 내리는 걸 깨달았지만 적당히 내리는 비는 몰라도 줄기차게 오는 비는 역시 싫어 어떻게 할까 하다가 피해는 없는지 주변을 살펴봐야 했기에 문을 열었다.

봄날 애써 뜯은 산나물을 할머니가 몰래 갖다 놓다.
봄날 애써 뜯은 산나물을 할머니가 몰래 갖다 놓다. ⓒ 정판수
그런데 …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 제법 실하게 묶인 열무 두 단이 놓여있는 게 아닌가. 아까 개 짖는 소리가 났을 때 누군가 우리 집 현관에 놓고 갔으리라는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해서 누군가 궁금했다. 맑은 날도 아닌 오늘처럼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와 놔두고 간 이가 누군지. 물론 몇 사람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내더러 전화하라고 했다. 짐작에 처음 짚은 할머니가 주인공이지 싶었다. 그래서 아내도 먼저 요령껏 물었다.

아내 : 왜 또 열무 두고 가셨어요?
할머니 : 나가? 무신 열무를?
아내 : 에이 다 알아요. 할머니가 갖다놓으셨지요?
할머니 : 구신이 갖다놓았는갑네.
아내 : (웃으며) 그러면 할머니가 귀신이시겠네요.
할머니 : 아이구, 내사 구신이었으면 억수로 좋겠다.

작년 가을 다래 좀 팔아줬다고 할머니가 우리 집에 그만큼의 다래를 갖다 놓다.
작년 가을 다래 좀 팔아줬다고 할머니가 우리 집에 그만큼의 다래를 갖다 놓다. ⓒ 정판수
그 뒤로 몇 마디 더 이어졌고,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새벽에 양남장에 가는 길에 가져다 놓았다는 것.

열흘쯤 전에는 또 다른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급한 일이 있으니 자기 집으로 오라는 것. 깜짝 놀라 아내가 달려갔다. 시골에서 급한 일이라면 … 심각한 일이라는 생각에. 그런데 돌아온 아내의 손에는 감자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급한 일이 아니면 오지 않을까 봐서 일부러 그랬다는 것.

보름 전 메주콩을 심어놓고 난 뒤 할머니와 까치 사이에 일어난 처절한(?) 투쟁을 난 기억한다. 콩의 떡잎이 보일 때쯤 그걸 따먹기 위해 떼 지어 날아온 까치들과 그걸 막기 위해 쉼 없이 헌 냄비를 두들기면서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야 이눔들아, 쪼매만 묵고 가라. 제발 쪼매만 묵고 가라."

콩 떡잎을 똑똑 따먹는 얄미운 까치에게 "야 이눔들아, 너거가 정 그라몬 내가 너거 집 완전히 뿌사삘 기다"하고 할머니가 공갈 협박을 해대던 감나무 위 까치집
콩 떡잎을 똑똑 따먹는 얄미운 까치에게 "야 이눔들아, 너거가 정 그라몬 내가 너거 집 완전히 뿌사삘 기다"하고 할머니가 공갈 협박을 해대던 감나무 위 까치집 ⓒ 정판수
그러니까 조금 따먹는 건 허락해주겠는데 완전히 콩밭을 작살내지 말아달라는 것. 그러나 새들이 염치를 어찌 알랴. 일주일 가까이 매일 녀석들과 싸우던 할머니가 하루는 녀석들에게 엄청난 공갈 협박(?)을 했다. 우리 집 감나무의 까치집을 올려다보며 한마디 했다.

"야 이눔들아, 너거가 정 그라몬 내가 너거 집 완전히 뿌사삘 기다."

그러나 녀석들이 정말 콩밭을 작살냈는데도 까치집은 아직 그대로 있다.

작년 가을 할머니 한 분이 우리 동네에서도 두어 시간을 더 들어간 깊은 산 속을 헤매 따온 다래를 나에게 팔아달라면서 갖고 왔을 때 한 말을 잊지 못한다. 팔아달라는 가격이 내가 생각해도 너무 헐한 듯싶어 좀 더 나은 가격으로 팔아줄 수 있으니 가격은 나에게 맡겨달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마 고 만큼만 받으소. 나가 약치고 비료주고 농사지은 기 아니라 기냥 산에 있는 거 따왔은께네 많이 받으면 벌 받을 끼라."

당신 먹는 것도 넉넉지 않을 텐데 역시 할머니가 갖다 주신 고구마
당신 먹는 것도 넉넉지 않을 텐데 역시 할머니가 갖다 주신 고구마 ⓒ 정판수
우리 마을 할머니들은 어떤 땐 귀신이 되고, 우렁이 각시도 되고, 천사도 된다. 그냥 한 마디 한 마디 던지는 말들이 따스하다. 좀 투박한 듯하지만 꾸밈도 없고 가식도 없어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요즘 할머니들이 특별히 도를 닦지는 않았으나 이미 베푸는 삶의 깊은 뜻을 깨달은 고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골#할머니#고구마#감자#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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