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무리 폭염주의보가 내렸어도 확실히 절기는 절기인지 처서를 지나자마자 불어오는 바람의 빛깔과 맛이 다르다. 전에는 희끄무레하니 텁텁했는데 그저께부터는 제법 투명하면서도 산뜻한 맛이 분명히 예전과 달라 그 덕에 편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헌데 모처럼 맞은 휴일 잠을 더 자고 싶었으나 아내가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야만 했다. 일 주일 내내 밀려놓은 일들을 오늘(25일) 내일 이틀 동안 다 마무리해야 한다는 잔소리 때문이었다. 하기야 그동안 직장 관계로 집안일 밭일을 밀쳐놓았으니 그대로 놔두면 집 꼴이 폐허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

그러나 아무리 일이 밀렸다 해도 더위 땜에 일할 시간은 고작 아침 한 시간과 오후 세 시간 정도. 오늘 아침에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아 전에 잘라놓은 감나무를 겨울 땔감용으로 쓰기 위해 옮기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땔감을 집 뒤로 쌓으러 가다가 잠깐 밭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거기에는 분명 작년 매실나무를 옮겨다 심었는데 나무는 보이지 않고 온통 칡넝쿨뿐이었다. 세상에… 십 년쯤 된 매실나무를 칡넝쿨이 칭칭 감아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었다. 불과 보름 전만 해도 매실나무를 뚜렷이 볼 수 있었는데 그새 칡넝쿨이 완전히 그의 존재를 지워버린 것이다.

▲ 칡넝쿨로 칭칭 감긴 이것은 무엇일까요? 전봇대를 칡넝쿨이 감고 올라간 모습입니다.
ⓒ 정판수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아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여태 그걸 몰랐느냐는 듯 핀잔을 주면서 거기뿐 아니라 밭에도 칡넝쿨이 들어와 엉망진창이라는 말을 했다. 고구마밭, 호박밭, 심지어 몇 포기 남아 있지 않은 고추밭에도 침범하여 그대로 두면 다 감아 목을 조를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마 시골살이를 해 본 사람은 칡넝쿨의 폐해를 한 번쯤은 맛보았을 것이다. 얼마나 성장 속도가 빠른지 전에 조금밖에 안 보이던 넝쿨이 며칠 뒤면 주변을 다 덮어버린다. 덮여버린 나무나 채소류는 그걸로 더 자랄 수 없다. 결국 칡넝쿨의 왕성한 생명력이 다른 작물을 해치고 말게 된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칡넝쿨에 대해서 사랑과 증오의 두 감정을 가지고 있다. 증오의 감정은 앞에서 얘기했으니 덧붙일 필요가 없겠지만 사랑의 마음은 두 가지 이유로 해서다. 하나는 그 향기의 달콤함과 그 맛의 진득함으로 하여.

꽃의 향기 중 가장 향기로운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가장 달콤한 향기가 무엇이냐고 하면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칡꽃 향기가 으뜸이라고. 꿀을 입으로 먹지 않고 코로 마실 때의 바로 그 맛이 칡꽃 향기다.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동안 사방에서 풍겨오는 칡꽃 향기에 취해 있노라면 낙원이 따로 없다고 느끼니까.

▲ 우리 집 매실나무를 감고 있는 칡넝쿨입니다. 매실나무란 생각이 듭니까?
ⓒ 정판수
칡은 향기뿐만 아니라 맛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재작년 달내마을로 내려오는 길목에 어떤 이가 산을 택지로 만들기 위해 개간하던 중 나온 칡을 얻어 칡술과 칡차로 만들었는데 아직도 제법 남아 있어 필요할 때마다 마신다.

한방(韓方)에서 갈근(葛根)이라 불리는 칡은 가루칠기와 물칠기(학술적이 아니라 경상도 시골에서 칡을 가르는 기준)로 나뉜다. 가루칠기는 고구마로 치면 타박고구마처럼 씹으면 파삭파삭한 느낌이라 그냥 먹기에도 좋고 맛도 있다. 물칠기는 물고구마처럼 이름 그대로 물기가 많고 약간 쓴 맛이 강하다.

한의학에서 어느 게 더 약효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짐작으로는 칡즙을 짤 때는 아무래도 물기가 많은 물칠기가 유리할 테지만, 칡술을 담가 먹는다면 가루칠기도 물칠기에 못지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 꽃 향기 중 가장 달콤한 향기를 내품는 칡꽃입니다.
ⓒ 정판수
칡으로 해먹을 수 있는 건 네 가지다. 생칡을 짜서 즙을 내어 만든 생칡차와, 말린 칡의 뿌리를 달여 마시는 칡차, 칡꽃을 따서 살짝 덖은 뒤 차로 만들어 마시는 칡꽃차, 소주에다 칡을 넣고 담은 칡술(칡주)이 있다.

경험에 따르면 겨울에는 칡차를 보리차처럼 끓여 마시고, 중탕집에 가 만든 비닐봉지에 담긴 농축액은 여름에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찬 채로 마시고 겨울에는 데워 마시면 되고, 칡술은 어느 계절이나 관계없이 먹고 싶을 때 먹으면 된다. 또 칡꽃차는 다른 계절보다 휘영청 달 밝은 가을밤에 마시면 제격이다.

칡을 좋아하다 보니 우리 집에는 이 네 가지가 갖춰져 있어 손님들이 올 때 내놓곤 한다, 그런데 칡넝쿨이 오늘처럼 매실나무를 칭칭 감아버리거나 밭의 작물들의 목을 조르는 상황이 오면 정말 밉다. 그래서 칡은 내게 언제나 애증의 두 그림자를 드리곤 한다.

#칡#칡꽃#칡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