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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미륵리사지는 월악산 국립공원 내 하늘재 옆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석굴 사원으로 유지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석굴의 흔적이 남아 전한다. 

 

“여기는 옛날에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었어요. 발굴이 시작되면서 마을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살았지요. 현재 보이는 대부분의 유물은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인데 발굴되어 세상에 나왔어요.”

 

절터 입구에서 문화유산 해설사가 나오셔서 설명을 해주셨다. 아이들은 그늘에 둘러앉아 설명을 들었다. 땀 닦으며 앉아있는 녀석, 눈 반짝이며 설명에 귀 기울이는 녀석, 카메라와 캠코더로 열심히 찍는 녀석 등 다양한 모습이었다. 설명은 뒷전이고 땅바닥에 기어가는 개미를 관찰하는 녀석도 있고, 옆에 앉은 친구와 장난치는 녀석도 있었다. 

 

고려 초 북진정책의 산물?

 

“이 절의 이름은 미륵대원사였다고 해요. 발굴 과정에서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알게 되었지요. 고려시대 세워진 절인데 특이하게 미륵불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지요.”

 

설명을 듣고서야 미륵불이 향한 방향이 북쪽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절터에 들어가 구경하다 돌아오면 미륵불이 향한 방향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돌아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람 사는 집이나 절집이나 지을 때 방향이 중요하기는 매일반이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사람 사는 집을 북향으로 짓지는 않는다. 절집도 마찬가지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지요. 고려 초기  세워진 이 절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 고구려가 있던 북쪽을 향한 미륵불을 세웠다고 해요.”

 

고려의 북진정책의 염원을 이루려는 뜻에서 미륵불로 하여금 고구려 옛 땅을 바라보고 서 있게 했다는 설명이다. 태조 이래 강조되었던 북진정책이 낳은 산물이 미륵대원사의 건립으로 해석하고 있다.

 

 

왜 하필 충주였을까?

 

남한강 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던 고구려와 신라도 아닌 고려 초기에 충주 지방에 미륵대원사를 지은 이유가 뭘까? 더구나 북진정책이란 목적을 안고 세운 절이 충주에 있어야할 이유는 그리 많지 않다. 충주가 고구려 땅인 적도 있었지만 진흥왕 이후로는 신라 영토였다. 평양처럼 고구려의 수도였던 것도 아니다. 고구려의 옛 영토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도 물론 아니었다.

 

충주는 중원이라 해서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의 중심 역할을 했다. 고구려와 신라가 다투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애쓴 것도 중원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고려 왕조에 있어서도 충주는 역시 중원으로서의 의미가 이어졌다. 그래서 이 지역을 장악하는 게 고려 왕조의 안정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왕조는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여전히 호족 세력의 힘이 존재했다. 이들 세력은 언제든지 중앙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다. 고려 왕조는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기거나 자신들의 권력 체제 내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중원 지방에도 유력한 호족이 있었으니 충주 유씨 세력이었다. 왕건은 호족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방편으로 호족의 딸과 결혼정책을 추진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충주 유씨 집안에서도 왕비가 탄생했다. 그가 신명왕후였다. 

 

북쪽을 향해 서 있는 미륵불의 의미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아이들과 미륵리사지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화강암으로 만든 엄청나게 큰 귀부(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에 아이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귀부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이 두 마리가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다며 웃었다. 오층석탑 앞에서 탑의 층수 헤아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미륵불 앞에 섰다.

 

 

“미륵불 얼굴 참 잘 생겼지?”

“아니요.”
“허걱, 저게 잘생긴 거야?”
“못생겼어요.”
“얼꽝이에요.”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못생겼다고 아우성이다. ‘얼꽝’이라는 말이 ‘얼굴이 꽝’이란 뜻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이들의 눈은 정확했다. 못생긴 불상이 나말여초 불상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조화미와 정제미의 극치라 할 수 있는 통일신라 불상에 비해 신라 말 고려 초의 불상은 잘 생긴 것과는 거리가 있다. 크기는 엄청나게 커진데 비해 조각 수준은 많이 떨어진다. 각 지방 호족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세우다보니 크기만 커진 탓이다.

 

“저 미륵불이 상징하는 게 충주 호족이었을 거야.”
“그게 누군데요?”
“충주 호족인 유긍달의 딸이 왕건의 부인이 됐어.”
“우와, 좋겠다.”
“그 왕비가 낳은 아들이 두 명이나 왕이 되었어.”
“어느 왕인데요?”
“정종과 광종이야.”

 

충주 호족으로 고려 중앙 권력과 연결되었던 유씨 세력은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절을 세웠다. 그 절이 미륵대원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 세웠다는 말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꾸며진 말로 여겨진다. 마의태자가 망국의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세운 절이라고도 하지만 고려 초 세워진 사찰 건립 시기와 마의태자의 행적과는 시차가 크다.

 

“미륵불은 왜 북쪽을 향하고 있을까요?”
“이곳 경관을 살펴보면 북쪽이 탁 트여 있기 때문에 북향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돼요.”

 

황재연 선생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과연 남쪽으로 험한 산이 있는데 비해 미륵불이 바라보고 있는 북쪽이 시원스럽게 트여 있었다. 미륵불은 말없이 서서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고 서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강원역사교사모임과 원주 YMCA에서 원주 지역 초, 중, 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 역사캠프 관련 기사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만주 유적 답사로 이어집니다. 


#중원#충주#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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