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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룽시 서고성터 성벽 발해의 도읍지였던 중경현덕부 자리로 비정되는 곳으로, 가까운 곳에 정효공주묘가 있다.
▲ 허룽시 서고성터 성벽 발해의 도읍지였던 중경현덕부 자리로 비정되는 곳으로, 가까운 곳에 정효공주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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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백두산에 오를 요량이라면 굳이 이 길을 택하진 않습니다. 옌지(延吉)에서 허룽(和龍)을 거쳐 산 입구에 이르는 잘 닦인 도로를 마다하고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인데다 하루 꼬박 걸리는 이 길을 이용할 까닭이 없습니다.

웬만해서는 누구도 선뜻 가지 않는 길. 강가의 작은 마을인 남평(南坪)으로부터 시작해 백두산 입구에 이르는, 일곱 시간 남짓의 두만강 트레킹 코스가 바로 그 길입니다. 차량 두 대가 교행하기 힘든, 먼지 풀풀 날리는 흙길을 하루 종일 견뎌야 하는 것은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허룽은 옌볜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도시로, 옛 발해의 다섯 도읍지 중의 하나였던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가 위치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룽징(龍井)에서 허룽에 이르는 길 중간쯤에 있는 서고성(西古城)터 유적이 바로 그곳이며, 멀지 않은 곳에 발해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묘가 있습니다.

중국, 북한의 국경 마을 전경 월경한 북한 주민을 고용하거나 숨겨준 사람을 처벌한다는 팻말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 중국, 북한의 국경 마을 전경 월경한 북한 주민을 고용하거나 숨겨준 사람을 처벌한다는 팻말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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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룽시 외곽에선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눈에 익숙한 하나의 풍경일 뿐이지만 발해가 이곳에 또 하나의 도읍을 정한 이유이며 청나라의 봉금지(封禁地)였음에도 목숨을 걸고 이곳으로 건너와 삶을 개척해낸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을 느낄 수 있는 자취입니다.

두만강의 지류인 퉁허(洞河)를 따라 비탈진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면 중국과 북한이 맞닿은 국경 마을, 남평에 닿습니다. 중국에서는 다리 등 교통편이 갖춰져 사람과 물자가 오갈 수 있는 곳을 커우안(口岸)이라 부르는데, 두만강의 최상류인 이곳 위쪽에도 한 군데가 더 있어 두 나라간 일상적인 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두만강변의 다락밭 풍경 궁핍한 북한의 현실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가슴 아픈 풍경이다. 산비탈까지 개간돼있다 보니 숲은커녕 변변한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어렵다.
▲ 두만강변의 다락밭 풍경 궁핍한 북한의 현실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가슴 아픈 풍경이다. 산비탈까지 개간돼있다 보니 숲은커녕 변변한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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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두만강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가는 이 여행길은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가는 동안 내내 북한 땅과 마주할 수 있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체험입니다. 좁은 곳은 강폭이 불과 10m도 채 안 되니 강가에 나와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소곤소곤 대화도 가능할 만큼 북한 땅과 가깝습니다.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한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현실을 이곳에서는 쉬이 느낄 수 있습니다. 강 건너에는 창만 빼꼼히 내놓은 콘크리트 초소와 무장한 북한 군인들이 곳곳에 보이고, 이쪽에는 불법으로 월경한 북한 주민을 고용하거나 숨겨준 사람들을 처벌한다는 팻말이 또렷합니다.

더 할 것도 없이, 울창한 숲이 산을 뒤덮고 강변 들녘에 옥수수와 밀이 자라는 이쪽과는 대조적으로 수직에 가까운 산비탈마저 개간한 나머지 숲은커녕 변변한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은 강 너머의 모습에서 그들의 강퍅한 현실이 고스란히 읽힙니다.

남평에서 백두산 입구에 이르는 두만강 강변로(?)의 모습 그저 백두산과 천지만 찍고(?) 올 요량이 아닌, 북한 땅과 호흡하며 의미 있는 여행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이곳이 제격이다.
▲ 남평에서 백두산 입구에 이르는 두만강 강변로(?)의 모습 그저 백두산과 천지만 찍고(?) 올 요량이 아닌, 북한 땅과 호흡하며 의미 있는 여행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이곳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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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마을을 막 벗어난 비탈진 오르막에 서면 북한 땅 무산(茂山) 시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오지 중의 오지인 이곳에 철광이 개발되면서 철도가 놓이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만들어진 북한의 내로라는 광업도시입니다. 네모반듯한 바둑판 모양의 도로를 보면 여느 도시와 다를 게 없지만, 칠 벗겨진 콘크리트 건물에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낡은 집들, 나무 전봇대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전깃줄 등은 켜켜이 쌓인 가난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한편, 부르면 들릴 듯한 강 건너편에는 북한 주민들의 '나른한' 일상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빨래하는 아낙네, 그 곁 바위에 걸터앉아 책 읽는 사람, 낚시하는 노인, 의심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아이들, 그리고 어깨에 총을 둘러 맨 채 감시의 눈을 번득이는 군인들. 잠시나마 이곳 언덕배기에 서면 북한의 복잡다단한 현재와 주민들의 일상이 다 보입니다.

모자이크 모양의 산비탈 다락밭에 매달린, 을씨년스러운 잿빛 도시에 담긴, 나아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는 두만강의 거무튀튀한 강물에 비친 북한의 현실은 가엾기 그지없습니다. 그것은 북한 동포에 대한 값싼 동정도 아니고, 가슴에 불타오르는 뜨거운 민족애도 아닙니다. 단지 한 뼘 강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중국과 북한의 사뭇 다른 풍경이 낯설고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까닭입니다.

두만강 너머 북한 무산시 전경 오른쪽 맨 뒤로 철광산이 보이고, 낡고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도시 경관이 북한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다.
▲ 두만강 너머 북한 무산시 전경 오른쪽 맨 뒤로 철광산이 보이고, 낡고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도시 경관이 북한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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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을 지나 마지막 국경 마을인 쑹샨(崇善) 마을에 닿으니 두만강은 이제 한낱 개울에 불과합니다. 경비가 삼엄하고 물살만 거셀 뿐 도움닫기로 뛰면 너끈히 건널 수 있을 만큼 북한 땅이 지척입니다. 여기가 국경선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두만강과 나란한 민둥산 중턱과 들판 곳곳에는 언뜻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선동 구호를 적은 구조물들이 여전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북한 주민의 빨래하는 방망이 소리가 들리고 고샅길 담벼락 아래 사람들의 도란거리는 소리가 정겹습니다.

일제강점기 동북항일연군 지대장 시절 김일성이 가끔씩 들러 전략을 구상했다는 '김일성 낚시터'를 지나면 이내 백두산의 너른 품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길은 더 좁아지고 인가를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자주 오간 사람일지라도 어두운 밤길이라면 두려워할 만한 오지입니다.

눈앞을 가로막고 선 육중한 산과 푸른 하늘을 초록빛으로 가리는 빽빽한 숲에서 '태초'와 '원시'를 떠올리게 됩니다. 오로지 키다리 자작나무 숲 서걱이는 소리와 협곡을 흐르는 두만강의 괄괄한 물소리가 합창하는, 말하자면 눈은 닫히고 귀만 열리는 길을 따라 백두산을 향합니다.

두만강가에서 빨래하는 북한 주민 두만강 최상류 마지막 국경 마을인 쑹샨에서 건너다 본 북한 주민의 일상 모습. 뛰면 건널 수 있을 듯, 부르면 들릴 듯 무척 가깝다.
▲ 두만강가에서 빨래하는 북한 주민 두만강 최상류 마지막 국경 마을인 쑹샨에서 건너다 본 북한 주민의 일상 모습. 뛰면 건널 수 있을 듯, 부르면 들릴 듯 무척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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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중국에서도 장백산(長白山)으로 부르며 중국인들이라면 평생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어 하는 명산 중의 명산입니다. 그런 까닭에 현재 중국 정부는 우리로 치면 국립공원에 해당하는 국가자연보호구(國家自然保護區)로 지정해 중점 관리하고 있습니다.

연중 내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는 곳이지만, 백두산은 천지(天池)에서 흘러내리는 맑고 시원한 물이 사시사철 넘치고, 중턱 곳곳에서는 뜨거운 온천수가 김을 뿜으며 솟아나고, 곳곳에 벼랑이 된 기둥들이 장엄하게 늘어선 우람한 산세가 가히 '천하제일의 경승'이라 할 만합니다.

장백폭포의 물줄기. 천지에서 발원한 장백폭포의 거센 물줄기 소리가 관광객들의 대화조차 방해한다.
▲ 장백폭포의 물줄기. 천지에서 발원한 장백폭포의 거센 물줄기 소리가 관광객들의 대화조차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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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폭포(長白瀑布)에 오르는 나무 계단 길이든, 천지를 조망할 수 있는 천문봉(天門峰)을 오가는 100여 대의 지프 안이든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로 중국의 단체 관광객들과 우리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며, 세계 어느 관광지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관광객 수만으로 한·중 두 나라에서의 백두산과 천지의 상징성과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백두산과 장백산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을 이뤄내야 하는 '경제적' 필요성까지 절감시키는 대구(對句)가 돼 버렸습니다. 굳이 중국 땅을 빌어 먼 길을 돌아 갈 필요 없이, 평양에서, 혜산과 삼지연을 지나 곧장 백두산에 오를 수만 있다면 시간도 절약하고 돈도 아끼는 일석이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백폭포의 포효하는 소리를 가슴에 담고 천문봉에 오르니 백두산 전체를 휘감던 짙은 먹구름이 거짓말처럼 걷히고 영롱한 에메랄드빛 천지가 눈이 시리도록 선명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천지는 백두산의 변화무쌍한 날씨 탓에 짙푸른 호수와 병풍처럼 에워싼 산의 능선을 볼 수 있는 날이 열흘에 채 이틀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백두산 천문봉 주변의 야생화 관광객들의 발길에 시나브로 밟히고 있지만, 지금도 천문봉 주변에는 소담스럽게 핀 이름 모를 야생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백두산 천문봉 주변의 야생화 관광객들의 발길에 시나브로 밟히고 있지만, 지금도 천문봉 주변에는 소담스럽게 핀 이름 모를 야생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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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봉에서 내려다 본 천지 에메랄드빛 천지 너머에 북한 쪽 관광시설인 콘크리트 계단이 수직 송유관처럼 매달려 있다.
▲ 천문봉에서 내려다 본 천지 에메랄드빛 천지 너머에 북한 쪽 관광시설인 콘크리트 계단이 수직 송유관처럼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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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인지 백두산은 여느 곳과는 달리 예전에 왔던 사람이 다시 찾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천지를 발아래에 둔 천문봉은 관광객들이 타고 온 지프의 엔진 소리와 연신 눌러대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하고, 봉우리 주변에 소담스럽게 핀 이름 모를 야생화들은 피곤한 듯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황톳빛 속살을 드러낸 채 딱딱한 등산화에 긁혀 부스러지는 천문봉의 암반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관광객들이 가득한 천문봉은 개미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빵처럼 보입니다. 부스러진 돌멩이는 수백 미터 아래 천지의 물로 떨어지거나 비스듬한 사면을 타고 내려와 야생화 밭을 덮기 일쑤입니다.

국가자연보호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관광객들의 발길에 의해 훼손되고 있는 백두산을 지켜내기 위한 조치가 얼마나 시급한가를 깨닫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천지 건너편을 보니 송유관처럼 보이는 계단길이 보입니다. 북한 쪽에서 설치한 관광시설이라고 합니다. 정상까지 차를 타고 손쉽게 오를 수 있도록 ‘배려’한 중국에 비해 저 낡은 계단길이 더 좋아 보이는 것은 병들어가는 백두산이 눈에 밟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천문봉의 모습 인산인해의 천문봉은 마치 개미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빵 모습을 하고 있다. 딱딱한 등산화로 인해 토양 침식이 심각하여 시급한 보호 조치가 요구된다.
▲ 백두산 천문봉의 모습 인산인해의 천문봉은 마치 개미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빵 모습을 하고 있다. 딱딱한 등산화로 인해 토양 침식이 심각하여 시급한 보호 조치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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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과 백두산을 뒤로하고 채비를 서둘러 압록강 유역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지금껏 그래왔듯 한 나절 쉬지 않고 가면 압록강가에 닿고 그곳에서 또 하나의 소중한 우리 역사, 고구려를 만날 예정입니다. 사나흘 동안 북한을 포위하듯 거쳐 온 여행길의 끝자락이자 이번 연해주와 동북3성 답사 여행의 종착지가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22일부터 8월 5일까지 (사)동북아평화연대가 주관하는 연해주-동북3성 답사에 참가한 후 정리한 기록입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해외답사여행#두만강#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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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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