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으로 등극한 세종은 우의정 이원을 종묘에 보내 즉위 사실을 고했다.
"조종이 나라를 세우고 덕을 닦아 후손에게 복을 내려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부왕이 그것을 계승하여 18년을 내려오시다가 이 몸에 명하여 대업을 이어받게 하시었습니다. 생각하옵건대, 위로는 조종(祖宗)의 유업을 계승하지 못하지는 않을까? 아래로는 신민(臣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부왕의 윤허를 받지 못하고 대위를 받자왔사오니 이로써 감히 고하나이다."명실상부한 즉위 절차를 마친 세종은 지신사 하연과 병조판서 박신에게 양전(兩殿)을 시위(侍衛)하는 일에 차질 없도록 하라 명하고 각도에서 바치는 진상품을 예전 그대로 상왕전에 바치도록 했다. 또한 조관(朝官)이 벼슬을 제수 받고 사은하는 것과 종친이나 대소 신료의 문안과 사사로이 진상하는 것도 그전 대로 하게 했다.
세종이 부왕에게 청했다.
"중궁(中宮)의 호를 검비(儉妃)라 정하고 싶습니다."
"주상이 검약함을 좋아하시는지라 이 호가 매우 좋으나 글자의 음(音)이 호에는 적당치 않다. 공비(恭妃)로 고치도록 하라. 그리고 대비가 양녕을 보고 싶어 하니 내일 아침에 그를 불러서 오게 하고 주상도 반드시 와서 뵈옵도록 하라. 양녕을 불러오게 하는 것은 대간(臺諫)의 의논에 부쳐야 할 것이다."
부왕의 뜻을 받들어 중궁의 호를 공비로 정한 세종은 대간을 불렀다.
"상왕께서 양녕을 부르시라 하시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상왕의 자애하신 마음과 전하의 우애하시는 정은 아름다우나 양녕이 왕래할 때 도시인(都市人)의 이목을 어찌하시려 하십니까."
대간이 반대했다. 병조판서 조말생과 형조참판 이유가 불가함을 역설했다. 조정의 공론을 접한 태종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세종은 아쉬워하는 부왕을 위로해드리고자 양녕이 유배생활하고 있는 광주에 환관 박춘무를 보내어 술과 고기 그리고 면포(綿布) 주견(紬絹) 각 10필과 포(布) 백 필을 전달하도록 했다.
세종이 상왕전에 나아가 상왕께 헌수(獻壽)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전위 위로연 겸 즉위축하연이다. 효령대군 이보와 영돈녕 유정현, 영의정 한상경, 우의정 이원과 종친·부마·6대언이 모두 참석했다. 세종이 부왕 앞에 무릎 꿇고 만수무강을 비는 수(壽)를 올렸다.
"내가 왕위에서 물러난 것은 복을 남겨두기 위함이었더니 이제야 복이 찾아오는구나."
태종은 흐뭇한 마음으로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유정현이 연귀(聯句)를 지어 바쳤다. 여흥에 나오는 즉흥 시(詩)다.
하늘이 아름다운 자리를 베풀어 만세를 기약하게 하고(天設錦筵期萬歲)
백성은 주린 빛 없어 임금의 은혜 가없이 고마워 하네(民無菜色感君恩)
유정현의 칠언을 받아 태종이 절구로 화답했다.
은혜의 말씀이 온화한 물결 속에 호탕하니(恩波浩蕩溫言裏)
나라의 나아갈 길은 즐거운 가운데 승평하도다(國步昇平永樂中)
상왕의 절구를 지신사 하연이 받아 우의정 이원에게 넘겨주었다.
온 나라가 근심 모르는 이 오늘이여(中外無憂是今日)
군신이 도에 맞추어 조정을 섬기네(君臣合道事朝廷)
이원의 절구를 한상경이 받아 읊자 태종이 칠언으로 응답했다.
조정 신하가 산악을 불러 수를 비나이다(廷臣祝壽呼山岳)
사자는 몸을 갈고 닦아 조종을 받드도다(嗣子修身奉祖宗)
상왕의 절구를 지신사 하연이 받아 태종에게 마지막으로 넘겨주었다.
종사의 안위는 신이 책임을 지겠나이다(宗社若危臣任責)
이를 지켜보던 세종이 마무리를 지었다.
선조들의 아름다운 술자리 문화아름다운 모습이다. 여흥이 무르익어가는 술자리에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시(詩)가 오갈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다운 문화다. 절구는 최소의 시체(詩體)이니만큼 표현에 고도의 날카로움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성법도 갖추어야 한다. 충간을 떠나 선조들의 풍류가 멋지다.
취흥에 겨운 태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서 춤을 추던 태종이 유정현의 팔을 이끌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만백성의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던 근엄은 언제였나 싶었다. 모두들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정현과 태종은 지신사와 군주였다. 현대의 대통령과 비서실장이다. 오늘날의 권부에서도 가능한 일일까? 한 사위의 춤을 끝낸 태종이 자리에 앉았다.
"위(位)를 전한다 해도 사람을 얻지 못하였다면 어찌 시름을 잊을 수 있으랴. 주상은 참으로 문화와 태평을 지킬 만한 임금이로다."
"성상께서 아드님을 아시고 신하를 아시는데 밝으심으로 말미암은 바이오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만세(萬歲)의 수(壽)를 누리시어 길이 태평함을 보기를 비옵나이다."
한상경이 화답했다. 연회는 밤이 이슥해서 파했다. 태종이 하연과 노희봉에게 내사복의 말을 각각 1필씩 하사했다. 하연은 세종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지신사이고 노희봉은 임금의 명을 전달하는 환자(宦者)다. 구왕이 신왕 측근들에게 내리는 하사품일까? 떡마일까? 의미 있는 하사품이다.
이튿날, 충녕의 세자 책봉에 대한 고명을 받으러 연경으로 떠났던 사은사 원민생이 명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명나라 사신 육선재(陸善財)가 이미 요동에 도착하였습니다."
세자 책봉에 대한 황제의 인준을 받았다는 기쁨도 잠시, 조정에는 비상이 걸렸다. 세자가 즉위 하고자 하니 윤허해 달라는 주문사(奏聞使)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명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아직 태종이 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초특급 비상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대책회의가 열렸다.
"갑자기 전위하였으니 명나라에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세종이 영의정 한상경과 우의정 이원에게 물었으나 뾰쪽한 대책이 없었다. 병석에 누워 입궁하지 못한 좌의정 박은에게 지신사 하연을 보내 의견을 구했으나 역시 대안을 내지 못했다. 다급해진 세종이 원로대신과 육조 판서를 이끌고 상왕전을 찾았다. 긴급구수회의가 열렸다.
"부왕께서 병환이 있어 세자가 임시로 국사를 맡아 보시게 되었다 하고 세자께서 출영하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남재, 정탁, 유창이 머리를 맞대고 도출해낸 의견을 내놓았다.
"부왕께서 황제의 칙명을 받지 않으시면 이는 예의가 아니옵니다. 부왕께서 왕위를 물려주신 일을 숨기시고 국왕으로서 칙사를 맞이하시는 것이 가할 듯하옵니다."
성석린이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라고 내놓은 제안이다.
"주상께서는 익선관을 쓰지 마시옵고 세자로서 칙명을 맞이하셨다가 사신이 돌아간 후에 전위를 주청(奏請)하시는 것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기발한 발상이라는 듯이 안경공이 제시한 의견이다. 모두가 고육지책이다. 약소국이 대국을 섬긴다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
잔머리 술수 가지고는 안 된다, 정면 돌파하라"새 국왕이 즉위하고 이미 교서를 반포하였으니 사신이 의주에 도착하면 어찌 그 소문을 모르겠느냐? 사실을 숨기는 것은 옳지 않다." - <세종실록>태종이 원로대신들의 의견을 물리쳤다. 잠시 숙고하던 태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병환이 때 없이 발작하기 때문에 세자로 하여금 임시 권도로 집무를 대행시키기는 하였으나 지금은 병환이 조금 차도가 있어 병을 무릅쓰고 칙령을 맞이하려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경륜이 부족하고 나이 어린 세종을 앞세워 일을 그르치느니 자신이 직접 전면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대책을 마련한 태종은 이종무에게 선온(宣醞)을 가지고 의주로 급히 떠나라 명했다. 명나라 사신이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극진히 예우하여 혼을 빼놓겠다는 복안이다. 그 이면에는 사신을 밀착 호위하여 백성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