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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국무총리가 11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브리핑실에서 교육, 과학, 산업 등 자족기능을 강화한 세종시 수정계획 최종안을 발표하고 있다.
 정운찬 국무총리가 11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브리핑실에서 교육, 과학, 산업 등 자족기능을 강화한 세종시 수정계획 최종안을 발표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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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수정안의 본질='정부 부처 이전하지 않는다'

지난 11일 드디어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이 발표되었다. 이로써 세종시는 행정중심복합도시에서 교육과학중심 경제도시로 바뀔 전망이다. 정부와 청와대는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대국민 홍보에 들어갈 태세다. 이미 수중에 접수를 완료한 KBS는 MB의 나팔수답게 새로이 이전할 기업과 학교 등을 중점적으로 그리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고 보수언론인 조중동도 수정안의 장밋빛 미래를 퍼 나르기에 여념이 없다.

아마도 노무현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들 언론사들은 "오기의 정치", "끝내 무리수 강행", "또 편가르기인가", "극심한 국론분열", "툭하면 말 바꾸는 양치기 정권" 정도의 헤드라인을 뽑았을 것이다. 노동법을 편법으로 통과시킨 추미애 의원을 소신 있는 정치인으로 추켜 세운 게 엊그제인데, 세종시 문제에 관해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며 MB와 맞서고 있는 박근혜를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다. 지금 언론의 보도태도를 보면 왜 MB가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방송사를 장악하려고 했는지, 또 미디어법을 그렇게 밀어붙여서 재벌과 조중동에게 보도채널을 안기려고 했는지 짐작이 간다.

정운찬 총리가 발표한 세종시 수정안은 그 화려한 미사여구에도 단 한마디로 요약이 가능하다. 정부 부처는 단 하나도 이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종시의 문제는 사실 이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부 부처가 이전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MB가 세종시 수정안을 내면서 앞세운 이유는 국가백년대계였다. 정부의 일부 부처만 내려가면 행정효율성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행정부처만 내려가서는 세종시의 자족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아예 기업이나 대학들 중심으로 이전해서 자족성을 높이는 것이 오히려 이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그 때문에 MB 자신은 신뢰성과 일관성에 오점을 남기면서까지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렸고 지난 대선 때의 공언을 '화끈하게' 사과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행정중심복합도시로서의 세종시를 MB가 '오해'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모두가 알겠지만 세종시는 원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를 새로이 건설하겠다고 한 공약에서 출발했다. 행정수도가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복잡한 이름으로 바뀐 것은 헌법재판소의 그 유명한 경국대전과 관습헌법에 근거한 위헌판결 때문이다.

원래 수도를 이전하겠다는 근본적인 이유는 국토의 균형발전과 수도권 집중완화였다.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노무현은 왜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했었나

민주당 정세균 대표와 당직자들이 11일 오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세종시 수정안 규탄대회를 열고 행정부처 이전을 백지화시킨 이명박 정부를 맹비난하고 있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와 당직자들이 11일 오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세종시 수정안 규탄대회를 열고 행정부처 이전을 백지화시킨 이명박 정부를 맹비난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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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폭설로 인한 서울의 교통대란은 수도권 집중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용한 산기슭에 계시는 MB에게는 신년 폭설이 국운상승의 징표였는지 모르겠지만 정초부터 지옥 같은 출근전쟁에 시달린 서울시민들에게 그 며칠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수십 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1호선을 기다리며, 나는 회의에 늦게 도착한 장관들에게 오늘 같은 날엔 지하철 타라고 훈계한 MB가 얄미웠다.(노무현이 그랬더라면 "또 막말"이라며 대서특필했을 것이다.)

아마 행정수도를 건설해서 청와대와 국회, 그리고 모든 정부부처가 세종시로 옮겨갔더라면 신년 대설이 축복이라는 MB의 실언도, 지하철 타고 출근하라는 그의 훈계도 너그럽게 받아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장관들이 차가 막혀 제때 출근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아예 없었을 것이다.

사상 최악의 폭설이 아니라 만약에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서울에 혼란에 빠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휴전선에 배치된 2천문 이상의 장사정포와 다연장 로켓포가 서울까지 정신없이 포탄을 쏘아대면 그에 따른 피해와 혼란은 25cm 폭설의 혼란보다 훨씬 더할 것이다. 아마 그때도 장관들과 참모들은 차가 막혀 정상적인 출근을 못할 것이고 대통령은 대책회의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벙커로 피신해야 할 것이다. 한꺼번에 피난민이 몰리기라도 한다면 명절 때마다 장관을 이루는 민족의 대이동 정도는 비교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그런 곳이다. 어떻게든 하루하루 굴러가고 있지만 어딘가가 약간만 삐끗해도 나라 전체가 대혼란에 빠지고 어이없는 참사가 생길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

물론 누군가는 그 속에서 큰 이득을 본다. 대한민국의 돈과 권력과 정보와 인재가 집중되어 있으니 누구라도 자신 또한 그 이득을 보는 무리에 속하리라는 환상을 품은 채 서울로 향한다. 천문학적인 사교육비와 살인적인 집값을 치르고서도 그 환상은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행정수도 건설됐다면 서울에 폭설대란 있었을까

하지만 정말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이런 구조와 규칙 자체를 만든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만든 체제에 더 많은 사람들이 편입될수록 자신의 부와 권력은 점점 더 강해진다. 600년 전부터 육조거리를 휘저었던 고관대작들이 그랬고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노무현이 지적했듯이 이제는 그 자리에 양대 보수신문사가 위세 좋게 서 있다. 흔히 얘기하는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 일제와 독재에 빌붙어 대다수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 먹던 사람들이 여기 속한다. 수도 이전을 기를 쓰고 반대했던 한나라당, 조중동, 지금의 고관 대작들, 그리고 이들에게 뒷돈 대는 재벌들이 그 면면이다. 이 양반들에게는 수도권 집중이 축복이다.

그런 까닭에 수도 이전은 역사적으로도 권력구도의 일대 변화를 의미했다. 묘청의 난이 그랬고 정조의 시도가 그랬다. 노무현은 비굴한 삶을 강요했던 600년의 역사를 청산하자면서 수도이전을 추진했다. 성문법인 경국대전을 들먹이면서도 관습헌법까지 끌어들여야만 했던 헌법 재판관들을 보면 그들의 절박함이 짐작된다.

행정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그렇다면 억지 논리로 수도이전을 위헌 판결한 헌법재판소를 먼저 비판했어야 한다. 청와대와 국회 및 모든 헌법기관들이 죄다 옮겨간다면 그보다 업무효율이 높아질 수 없다. 폭설과 교통대란, 그에 따른 대통령 훈계 따위도 필요 없고 휴전선의 장사정포도 두렵지 않다.

행정수도가 위헌이 된 이 상황에서 일부 정부부처만 세종시로 이전했을 때의 비효율성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비효율성이 생기게 된 근본이유는 헌재의 잘못된 판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지금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일정부분의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가 2004년 10월 21일 오후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안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고 있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가 2004년 10월 21일 오후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안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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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업무 효율성 떨어진다? 여기 묘안이 있다

다행히도, MB가 그토록 염원하는 행정업무의 효율성을 가장 높일 수 있는 묘안은 따로 있다. 헌법을 약간 고쳐서 헌재의 이전 판결을 비켜가면 된다. 즉 헌법을 고쳐서 대한민국 수도에 관한 내용을 조정한 뒤 (꼭 서울이 아니어도 된다는 얘기만 들어가면 되지 않는가) 세종시를 원래의 행정수도로 건설하면 국토균형발전과 행정업무의 효율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 이미 개헌은 올해 정가의 큰 화두 가운데 하나이니까 개헌 자체가 문제될 일은 아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정치권과 지도자의 의지와 철학인 셈이다.

정부와 청와대는 백년대계 운운하면서도 세종시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이 철학의 문제를 빼버렸다. 대신 빈곤한 철학의 자리는 '자족성'이라는 기술적인 문제가 대신했고 그마저도 임시방편과 온갖 편법으로 때워 버렸다. 그래서 수정안은 그 수준에서도 좋은 방법이 못된다. 왜일까?

수정안은 대기업과 대학과 과학비즈니스벨트가 중심적으로 들어가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자립형 도시가 될 것이라고 선전한다. 기업과 대학과 연구단지가 들어서면 사람들이 모이고 그 안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만한 여건이 만들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정부와 청와대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기업과 대학과 연구단지는 도대체 어떻게 유치하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정부부처 이전이 갖는 핵심적인 파워가 숨어있다.

정부부처가 대거 이동하면 그 자체가 기업과 대학과 연구단지를 끌어들일 충분한 이유가 된다. 대기업 본사들은 공무원과 정치인들 도장받기가 가까울수록 이득이다. 학교별 서열에 목을 매는 한국 대학들도 권력의 핵심부에 캠퍼스를 두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행정부처가 많이 옮겨가면 옮겨갈수록 자연스럽게 자족성이 갖춰지는 셈이다. 이 얘기는 하등 새로울 것이 없다. 세종시 원안이 바로 이런 취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종시에 관한 한, 정부부처의 이관 문제는 기업이나 대학을 유치하는 문제와는 완전히 수준이 다른, 근본적인 문제이다. 정부가 부처이관을 백지화 하는 세종시 수정안을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무리수를 두었을지 우리 모두는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시장자율과 대학자율을 그렇게 외치던 사람들이 갑자기 기업과 대학을 윽박지르는 모양새는 참으로 가관이다. 이건희 사면과 삼성 입주로 이어지는 거래는 그 백미였다. 현직 과학자로서 나는 과학비즈니스벨트의 부지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또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현실이 무척 서글펐다.

이 모든 무리수는, 원안대로 정부부처를 대거 이전하면 전혀 필요도 없는 일들이었다. 아니, 장담하건대 개헌을 해서 아예 행정수도를 만들면 훨씬 더 수월했을 일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국가 역량의 낭비이며 또 '행정업무의 비효율'인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세종시 수정안은, 멀리 있는 산속의 우물에서 마을까지 그냥 수로를 뚫으면 될 일을, 매일 아침 물통지고 퍼 나르겠다고 하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억지로 만든 도시의 자족성이 10년 20년 뒤에도 유지가 될는지 그 또한 의문이다.

정부가 세종시 수정계획 최종안을 발표한 11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등 보수단체로 구성된 '충청세종시수정발전촉구범국민연합' 회원들이 세종 과학경제도시 환영 및 세종시 원안 고수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부가 세종시 수정계획 최종안을 발표한 11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등 보수단체로 구성된 '충청세종시수정발전촉구범국민연합' 회원들이 세종 과학경제도시 환영 및 세종시 원안 고수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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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관습헌법과 경국대전의 올가미에서 구해내자

세종시 논란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MB 자신에게 있다. 이 모든 혼란과 분란은 MB가 자신의 약속과 신의를 하루아침에 저버렸기 때문에 생겼다. 그리고 MB가 '배신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행정효율이라는 것도 세종시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그릇된 '오해'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정말로 MB가 국토균형개발과 지방의 균형발전, 수도권 집중 완화, 진정한 업무효율성 제고를 고민한다면, 그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개헌을 발의하고, 세종시를 태초의 모습대로 행정수도로 만들면 가장 근본적이고도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MB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조중동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수도이전은, 그리고 진정한 국토의 균형발전과 수도권 완화는 그동안 수도권 집중으로 부와 권력을 부풀려 온 자신들의 기반을 허물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에 호소한다. 세종시를 건설하고자 했던 근본 철학은 그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들이다. 지난 총선 때처럼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순간의 표를 위해 수도권에서 여당을 따라 재개발 공약을 남발하거나 국토균형발전의 원칙을 저버린다면 앞으로 정권을 돌려받기는 더욱 더 요원해질 것이다.

세종시 원안을 사수하고자 하는 지금 그대들의 모습은 목숨이라도 내걸 기세이다. 나는 그 최소한의 진정성을 믿는다. 하지만 그 진정성이 최대값을 가지려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그 철학에 걸맞은 수도권 공약이 나와야만 한다. 비록 그것이 수도권 득표에 감표요인이 되더라도 국가 전체가 나아가야 할 올바르고 정의로운 길을 제시해야만 선거에서 지더라도 아름다운 패배로 기록될 수 있다.

천만 서울 시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나는 수도권 집중을 획기적으로 완화시켜 서울을 정말 인간답게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 계획을 가진 그런 후보에게 표를 던질 참이다. 그리고 곧 본격화 될 개헌 논의에서 '서울'을 관습헌법과 경국대전의 올가미에서 구제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태그:#세종시, #이명박, #정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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