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8 07:05최종 업데이트 23.04.1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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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숨진 유엔군의 유해를 태우던 화장장 시설. ⓒ 윤태옥

  
나지막한 야산이 살며시 능선을 벌려준 작은 골에 검은 갈색의 막돌 폐허가 눈에 들어온다. 건물 바닥과 벽체 일부가 남아 묘한 상상력을 끌어당긴다. 폐허 서쪽으로는 그리 높지 않은 굴뚝이 낯선 방문객에게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아무리 봐도 우리의 전통은 아닌 서구 건축의 냄새가 난다.

도로변에 안내판이 없으면 찾기 어렵고, 찾아온들 어떤 폐허인지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안내판에는 '연천 유엔군 화장장 시설, 국가등록문화재 제408호'라고 되어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전사자들을 화장하기 위해 1952년 건립하여 휴전 직후까지도 사용한 화장시설이며, 건물의 벽과 지붕이 훼손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화장장 굴뚝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설명도 덧붙여 있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산 77-2번지.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다. 어려서 숱하게 들었던 화장장의 귀신이나 공포, 음습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분명히 남의 것이었을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시신을 고국으로 실어가기는 어려운 외국군 병사들의 유해가 뜨거운 불길 속에 고운 재로 가라앉은 곳. 어쩌다가 타국 땅에서 죽었고 낯선 곳에서 화장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인지. 나의 눈에는 우리 땅에서 벌어진 얽히고설킨 현대사의 몇 장면들이 짧은 순간에 파노라마로 흐른다.

남한에 남아있는 북한군 유해
 

파주시에 위치한 북한군 중국군 묘역. 2013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이후 중국군 유해는 본국에 상환됐지만 북한군은 여전히 '적국'에 남아있다. ⓒ 윤태옥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6-1, 37번 국도변에는 북한군 묘역이란 표지가 깔끔하게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북한군 중국군 묘지라는 안내판이 또 하나 설치돼 있다. 묘지의 내력을 알 수 있다.

"이곳은 6.25전쟁에서 전사한 북한군과 중국군 유해, 6.25전쟁 이후에 수습된 북한군 유해를 안장한 묘지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네바 협약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1996년 6월에 묘지를 조성하였으며 총면적은 6,099㎡로 1묘역과 2묘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2묘역에 안장되었던 중국군 유해 541구는 총 3회에 걸쳐 (2014.3.28~2016.3.31)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묘역에는 B4 사이즈 정도 되는 석판 수십 개가 오와 열을 맞추고 햇볕을 받고 있다. 석판에는 "북한군126, 2000.11.30, 무명인, 경상북도 칠곡군 다부동"과 같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한군30, 1996.6.14, 소위 권호신, 1.21사태 무장공비"와 같이 계급과 이름이 명시된 것도 있다. 무명인이 훨씬 많다. 이 작고 키 낮은 묘비들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0년 가까이 지났건만 아직도 생생하게 진행형인 남북 충돌의 현대사를 묵언으로 발화하는 듯하다.
 

지난 2014년 3월 19일 한국전쟁기 중국군 유해가 중국으로 송환되고 있다. ⓒ 정현환

 
 

중국군 유해가 본국에 송환됐음을 표시해둔 비석. ⓒ 윤태옥

 
북한군 묘역 안쪽으로 중국군 묘역이 있다. "중국군 575~655, 2009.5.28, 중국군 81구, 2014.3.28 본국송환"이란 것도 있고 "무명인, 본국송환"과 같이 기록된 것도 있다. 중국군 병사도 유엔군 화장터에 실려 온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남의 나라 전쟁에서 죽음으로 마감한 인생이다.

중국군의 유해 송환은 2013년 6월 국빈으로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송환의사를 전달한 이후 3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사드 배치로 한중 갈등이 불거지기 전의, 소위 한중 밀월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지금과 다른 국면인 당시의 정치외교적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우리 땅에서 수습된 외국군의 유해를 인도적으로 고향나라에 보낸 것은 잘한 일이다.

다시 북한군 묘지를 돌아보면 입맛이 쓰다. 중국군 유해는 60여년 만에라도 본국으로 돌아갔으니 망자나 유족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에 비견하면 같은 핏줄인 북한군은 '적'의 땅에 그대로 묻혀 있다니, 그것도 우리 정부의 송환 제의를 북한 당국이 외면해서 그렇다고 하니 더욱 씁쓸하다.
 

연천 유엔군 화장장 시설과 피주의 북한군-중국군 묘역 ⓒ 봉주영

 

북한군 중국군 묘역은 네이버지도에는 없고 카카오지도에서는 검색이 된다. 구글지도에는 '적군묘지'라고 등록돼 있다. 우리나라의 사적지가 우리나라의 일부 지도에서 검색되지 않는 것은 좀 아쉽다.

이 두 곳의 한국전쟁의 흔적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나도 한국전쟁 관련해서는 안보관광이라고 하는 땅굴이나 판문점,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일 년 동안 휴전선 일대에서 한국전쟁의 흔적을 찾아보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우리 현대사에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이런 낯 뜨거운 일들은 휴전선 답사 내내 나를 수시로 멈칫거리게 했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얼마나 아는가

나는 십여 년 동안 주로 역사를 주제로 하여 중국 곳곳을 여행했다. 그런데 2019년 연말에 터진 코로나19 사태로 국경이 닫히면서 나의 답사여행은 어쩔 수 없이 국내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에는 서해와 남해에서 바다의 역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서해 남해 다음에, 북해가 아닌 북쪽에는 무엇이 있냐는 여행 동반자의 코멘트를 계기로 휴전선 답사에 나서게 됐다.

처음에는 한강하구 교동도에서 강원도 고성군까지 5박6일에 걸쳐 훑어나갔다. 첫 답사의 소감은 강렬했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으로서의 대한민국, 특히 한국전쟁이란 결정적인 우리 현대사에 얼마나 무지한지를 크게 깨달았다. 이후 일곱 차례의 휴전선 답사와 세 차례로 나눠서 다닌 38선 종주, 대여섯 번의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도서 답사, 그 외의 대전형무소 탐방 등 총 90여 일간 답사를 다녔다.

답사를 전후로 체크하게 되는 내 머리 속의 한국전쟁은 속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6.25란 한마디로 압축되는 김일성의 남침과, 포탄을 지고 적진에 뛰어들면서까지 장렬히 전사하면서 처절하게 지켜낸 국군이라는, 피아가 선악으로 명료하게 구분되는 서사. 그러나 길 위에서 대면하는 한국전쟁은 기존의 서사와는 크게 달랐다. 다르거나 틀렸다고 하기보다는 그것 이외의 무엇인가가 대단히 많이 보였다. 

오늘날 내가 속한 공동체로서 대한민국, 북한에 빗대어 말하면 남한은 70여 년 전에 시작되고 3년이나 지속된 한국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 세대가 분투하여 초토화된 땅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다. 국가의 위상 역시 당시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굳혀버린 남북의 갈등과 국제질서의 압박이라는 대단히 불편한 구조를 털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짊어지는 정치적 부담과 경제적 사회적 손실은 물론 전국민의 상당한 불안과 스트레스와 같은 심리적 피해는, 숫자로 계상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정전협정으로 전면전이 중지된 지는 70년이 되었다. 그럼 그것을 치료하는 것 역시 70여 년의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장기간에 걸친 준비의 하나로 한국전쟁의 이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을 꼽는다.

전쟁을 밀어내고 평화를 당긴다
 

유엔군 화장장 시설 ⓒ 윤태옥

 

한국전쟁의 속살을 그 흔적을 찾아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전쟁을 밀어내고 평화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실제 도달가능한 평화란, 갈등으로 생기는 문제를 무력으로는 해결하지 않는 것이다. 무력으로 해결하지 않기 위해, 무력으로 해결하다가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를 오히려 치명적으로 악화시킨 한국전쟁을 곱씹어봐야 한다. 한국전쟁은 38선을 깨는 북한의 남침이 실패했고, 38선을 돌파한 북진 역시 실패했다. 직선 38선이 비슷한 지역에서 곡선의 군사분계선으로 바뀌었을 뿐 남북은 치명상에 치명상을 안고 불구가 되지 않았는가.

내가 한국전쟁을 되새겨보는 두 번째 의의는 전쟁 자체에 대비하는 것이다. 전쟁은 군대가 출동해서 수행하는 전투의 총합만이 아니다. 내가 전선으로 징집되지는 않아도 나와 무관한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전쟁은 전국민의 것이라는 명제는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한국전쟁의 참극과 그 후유증을 너무나도 끔찍하게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전쟁을 포함해 국가운영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민주시민으로서 전쟁을 한걸음 정도는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해의 하나로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을 돌아보고, 실제 우리가 겪은 전쟁은 어떠했고, 훗날 원치 않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전쟁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미리 짚어보자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소박한 이유다.

휴전선을 답사하면서 <60년 전 6.25는 이랬다>는 35명의 체험담을 수록한 단행본을 읽었다. 맞다.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그랬다'는 것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하다. 그러니 오늘도 그러하거나 오늘 또는 내일에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한국전쟁을 차분하게 다시 길 위에서 읽어보려고 한다. 전쟁에서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과 해서는 아니 될 것들에 대한 확인도 필요하다. 

이제 독자들을 모시고 길로 나선다. 무거운 주제지만 가능하면 가벼운 맘으로 일어선다. 이 글의 의도의 하나는 휴전선 일대도 여행할 만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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