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글쓰기 전도사
바꿀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거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두 손을 꼭 잡고 말한다. 나랑 같이 글 쓰자. 거의 '글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쩌다 보니 자타 공인 글쓰기 전도사가 되었다. 믿는 종교도 없는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시작은 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전까지 나는 매일 글을 쓰지 않았다. 직업상 매일 쓴 시기도 있었지만 일을 그만 둔 뒤로는 가끔 필 받을 때만, 하고 싶은 말이 마음 속에서 마구 샘솟을 때만, 글을 쓰곤 했다. 글 쓰는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은 있지만 습관이 되어 있지 않은, 전형적으로 게으르게 꿈만 꾸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각성이 일어났다. 언젠가는 써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덧 내 나이 마흔이었다. 부끄럽게도 마흔이 되도록 후회 없을 때까지 최선을 다 해본 일이 없었다. 적당히 대충 하다 말거나, 초반에 열정을 불사르다 얼마 못 가 제풀에 꺾여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마흔을 마주하고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러다 정말 크게 후회하겠구나.
박완서 작가가 마흔에 등단했다는 이야기에 나도 마흔이 되면 글을 쓰겠노라 막연히 생각해온 터였다. 더는 미룰 수 없다. 후회가 적은 삶을 살고 싶다. 이제는 써야 한다. 때마침 새로 오픈하는 글쓰기 플랫폼이 있어 그곳에 매일 짧게라도 글을 쓰겠다고 나 자신과 굳게 약속을 했다.
습관을 기르는 데 걸리는 시간, 두 달
내게 글쓰기는 습관이 필요한 일이었다. 작가는 등단이라는 결과를 얻은 사람이 아니라, 계속 쓰는 상태의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찾아보니 습관을 들이려면 두 달 가량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는 생애 마지막 도전이라는 생각으로, 눈 딱 감고 두 달 동안 매일 500자 이상을 쓰겠노라 다짐했다.
아무 데서나 글을 썼다. 앉아서도 쓰고 서서도 쓰고 이동하면서도 썼다. 카페 일과 육아, 살림을 함께 하고 있는 입장에서 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쓸 시간은 없었다. 카페 일을 하다가도 틈틈이 적고, 집안일을 하다가 밥을 하다가 잠자다 깬 새벽에도 수시로 끼적였다. 쓰는 도구를 노트북으로 한정했을 때는 노트북 앞에 앉기까지가 너무 힘들었는데, 휴대폰을 추가하자 어디서든 쓰는 게 가능했다.
휴대폰으로 쓰는 건 처음에는 오타가 너무 많아 힘겨웠는데, 그것도 계속 쓰다보니 오타율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두 달을 살고 나니 신기하게도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애써 마음 먹지 않아도, 필을 꼭 받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글을 쓰고 있었다. 습관을 들이자 그 다음은 자연스레 굴러가기 시작했다.
무슨 글을 그렇게 썼을까 싶을 만큼 쓰고 또 썼다. 주로 살아온 삶을 녹인 에세이였다. 아픈 기억, 행복한 기억, 지우려던 기억, 아련한 기억 등 마주하기 힘든 아픔이나 상처도 과감히 꺼내 글로 썼다. 쓰다 보니 알게 됐다. 지나온 삶으로 글을 쓰는 건 그 시절의 나와 화해하는 일이라는 걸.
글을 쓰면 쓸수록 나는 혐오하고 학대하던 과거의 나를 용서하게 됐다. 부끄러웠던 과거는 점점 이해할 수 있는, 애틋한 과거가 되어 갔다. 놀랍게도 과거의 나와 악수를 나눌수록 지금의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졌다. 자신을 사랑할수록 내면은 점점 더 단단해진다. 타인의 공격적인 말이나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됐다.
쓰는 걸 지속하자 읽는 손과 눈도 덩달아 부지런해졌다. 작은 사건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깊게 사유하는 습관이 길러졌다. 글 잘 쓰는 법의 정석과 같은 3요소, 즉 '다독 다작 다상량'은 아무래도 '다작 다독 다상량'의 순서인 모양이었다. 책을 읽지 않던 사람도 자신의 글을 쓰다보면 타인의 글이 궁금하다. 질문과 생각도 끝없이 이어지고 어떻게든 이를 글에 담아보려 노력하게 된다.
요즘 쓰기 열풍이 불면서, 읽는 사람은 별로 없고 쓰는 사람만 많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이는 기우인 듯하다. 쓰면 읽게 된다. 그게 꼭 책이 아니더라도,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든 글을 읽을 수 있다. 쓰다 보면 글을 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남들은 어떤 표현을 썼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쓰는 만큼 내면이 단단해진다. 읽고 생각하는 만큼 유연해진다. 단단하면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유연해지면 더 넓은 사고가 가능해진다. 나는 이제껏 글쓰기 만큼 가성비 대비 훌륭한 일을 본 적이 없다. 종이와 펜만 있다면, 혹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만 있다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마사지가 타인의 손을 빌려 몸의 근육을 푸는 것이라면, 요가나 스트레칭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이완하는 일이다. 상담소가 타인의 힘으로 마음을 푸는 것이라면, 글쓰기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음을 이완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글쓰기의 효능을 아시나요
나는 쓰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간절함과 더는 늦으면 안 된다는 절실함으로 글을 시작했다. 비장했던 초심은 어느 순간 쓰는 것 그 자체의 즐거움으로 치환되었다. 이전의 나는 꾸준하게 한 가지를 오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매너리즘에 쉽게 빠지고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금세 일을 그만 두기 일쑤였다.
글 만큼은 달랐다. 글은 아무리 써도 도무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다. 글은 써도 써도 또 할 이야기가 있고, 문장은 다듬고 다듬어도 또 다듬을 게 나온다. 새로운 단어를 알아가고, 새로운 글에 도전할수록 내가 아는 세상과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 넓어짐을 느낀다. 동시에 내가 알아가고 싶은 세상과 내가 표현할 수 없는 세상 또한 얼마나 넓은지를 체감한다.
글 세상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을 나 혼자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커졌다. 글쓰기의 효능을 더 널리 알려야겠다. 글쓰기 모임을 만든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장 나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부터 함께 썼으면 했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 모임이 일 년이 되었다. 얼마 전 한 멤버가 내게 말했다. 친구가 그러는데 제가 예전보다 단단해졌대요. 제가 보기에도 스스로가 많이 단단해진 것 같아요. 이게 다 글 덕분이에요. 그 멤버의 말은 오랫동안 내 귓가에 메아리쳤다.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더 많은 사람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같은 것에 얽매이지 말고, 그저 마음이 하는 말을 따라 글로 옮겨보았으면 좋겠다. 하소연도 하고, 욕도 하고, 넋두리도 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얀 종이와 친구가 된다.
이곳에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는 없다. 무엇이든 말해도 되는 친구를 갖는 것만큼 든든한 일이 있을까. 용기만 한 스푼 더하면 된다. 그리고 나서 무엇이든 일단 써보기. '잘' 쓰는 게 아니라 '그냥' 쓰기. 기적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