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5kV 송전탑 아래의 삶, 2014년 6월의 밀양을 기억하십니까. 그로부터 10년, 밀양 할매들의 지금을 전합니다. 더 많은 기사는 <월간 옥이네> 7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편집자말] |
2014년 6월 11일, 아직은 어두운 새벽. '쿵, 쿵' 소리가 산 속 농성장을 향해 울려 퍼졌다.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 평밭마을 129번 송전탑 건설 예정지 농성장과 장동마을 입구 농성장을 시작으로 부북면 위양리 위양마을 127번 농성장, 상동면 고정리 고답마을 115번 농성장, 단장면 태룡리 용회마을 101번 농성장까지 11시간 만에 완료된 행정대집행의 포문이었다.
경찰과 한국전력 직원, 공무원 등 투입 인원만 최소 2000명. '시커멓게' 드리우는 행정대집행에 주민들은 옷을 벗은 맨몸을 쇠사슬로 묶고, 구덩이를 파고 누워 저항했다. 농성장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이었지만 기다란 칼과 절단기 앞엔 속수무책이었다. 무차별하게 찢기는 농성장 안은 "여기 사람이 있다" "손대지 마라"는 아우성으로 가득 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24년 6월. 강산이 변하는 세월에도 무차별한 국가 폭력의 상흔은 여전했다. 그날 날카로운 칼날에 찢어진 농성장처럼, 마을은 갈가리 찢어지고 또 찢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밀양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100m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765kV 초고압 송전탑 아래에서도 여전히 삶은 이어지고 있기에 투쟁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10년의 시간이 흐르며 송전탑 건설에 체념한 이들, 여전히 싸우는 이들이 있을 따름이다.
밀양 행정대집행 10년, 윤석열 핵폭주 원천봉쇄 결의대회(6월 8일)에 앞서 6월 7일, 이 아래서 삶터를 지켜가는 '밀양 할매'를 만났다. 10년 전 밥을 지어 이고지고 산 속 농성장으로 향했던 이들, 행정대집행 소식에 옷을 벗어던지고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던 이들, 투쟁의 최전선에서 연대자들을 환대하고 밥을 지어먹이면서도 '돈'으로 자신들을 회유하려는 한국전력 직원과 공무원들을 따끔하게 혼내던, 온몸으로 '살림'을 보여줬던 이들이다.
평밭마을, 용회마을, 옥산마을, 여수마을에서 만난 '밀양 할매'의 송전탑 투쟁 그 후 이야기를 짧게나마 전한다. 이제는 투쟁을 중단했거나,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하며 싸우는 이야기를 통해 밀양이 잃어버린 것, 밀양이 얻은 것을 들여다보자. 밀양이 잃은 것은 우리 또한 잃은 것이고, 밀양이 얻은 것은 우리 또한 얻은 것이므로. 우리 모두 밀양이므로.
마을 공동체 찢은 송전탑... 옥산마을 ㅎ씨 이야기
"그때가 박근혜 대통령 때 아니었나. 막 사람들도 얼매나 내보냈는지, 밤에도 막 깔려있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도 거(농성장) 지킨다고 밥 해가 짊어지고 올라가고, 모두 난리를 피웠지. 그 밤에 움막 가서 자고. 진짜 목숨 걸고 싸웠거든."
ㅎ씨(80, 상동면 옥산리 옥산마을)의 얼굴이 어딘지 쓸쓸하다. 그렇게 싸웠지만 결국 송전탑은 마을 앞과 뒤로 들어섰고, 마을 사람들은 투쟁을 중단했다. 마당을 나서면 코앞에 보이는 송전탑에 익숙해진 지도 오래.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남은 상처는 ㅎ씨에게도, 마을 주민들에게도 여전한 듯했다. 송전탑 건설을 위해 주민들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한전이 마을에 뿌린 '돈'이 원흉이었다.
"집집마다 500만 원씩인가 얼마씩 보상금을 받았고, 마을로 나오는 보상금도 있었어. 누가 그걸로 땅을 사서 돈을 불린다고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 말이 틀린 거라. 그것도 마을에서 시비를 오래 했어.
우리야 자세히는 모르지. 근데 그 돈 때문에 사람들 억수로 힘들었어요. 모두 갈등이 생기고, 동네 인심도 안 좋아지고. 전신에 다 갈라져갖고 쑥덕거리고. 지금이야 원금 내놓고 뭐 어쩌고 하면서 우예 해결이 나긴 났는데..."
한전은 각종 마을 행사 지원, 후원 기금 등의 명목으로 마을에 '용돈'을 뿌려왔다. 마을자치회 등 공적 기구를 통하지 않고 송전탑 건설에 호의적인 주민을 통해 전달한 돈은 당연히 갈등의 불씨가 됐다. 이 틈을 파고들어 주민 간 사이를 벌리고, 반대 주민을 고립되게 하는 방식이 한전의 송전탑 건설 추진 전략 중 하나다. 옥산마을이 겪은 갈등 역시 한전이 '손을 대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흔한 모습이다.
이미 송전탑 투쟁이 끝났다고 여기는 ㅎ씨이지만, 핵발전소가 추가 건립될 수 있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한다. 투쟁과 갈등, 체념의 지난한 시간을 지나온 그이기에 이는 마냥 남의 일이 아니다.
"그때도 (송전탑) 들어오면 못 산다고 계속 그래 안 싸웠나. 그런데 또 세운다고? 사람들은 우예 살라고 그라는가..."
인구 준다면서 송전탑을 또 세운다고... 용회마을 김필기씨 이야기
"그때 저~ 산꼭대기까지 다 올라가고, 경찰캉 싸우고 그랬지. (행정대집행 때 다쳐서) 밀양 병원에 가서 일주일 주사 맞고 그라고 안 나왔나."
열아홉에 시집와 이 마을에서 70년을 살았다는 김필기(86)씨. 호롱불로 불을 밝히던 시절에 시집온 그도 송전탑을 막으려 마을 입구와 산 중턱 송전탑 건립 예정지에 움막을 지어 투쟁하던 '밀양 할매' 중 하나다. 그때는 훨씬 건강했는데, 이제는 보행보조기 없이는 밖을 나다니기 어려운 형편이 됐다. 귀도 어두워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송전탑 반대' 입장을 명확히 밝힌다.
"반대지, 우리 마을에는 여즉 반대하는 사람 많다. 와 송전탑을 세워가 국민을 못 살게 하노, 와 사람을 못 살게 해? 인구가 작아서(줄어서) 난리면서 송전탑은 와 세우노. 그래가 사람 또 죽일 끼가?"
연대가 우리를 살렸다... 여수마을 김무출씨 이야기
송전탑 아래 펼쳐진 노지 깻잎밭은 김무출(77)씨가 일궈온 일터이자 삶터다. 해가 뉘엿뉘엿 산 뒤로 넘어갈 때까지 깻잎밭을 돌보던 그가 밭에 물을 대려 쪼그렸던 몸을 일으킨다. 10년 전 저 산을 오르내리며 한전을 감시하고 송전탑 건설에 맞서 싸우던 몸이다.
"옛날에 그거(투쟁) 말로 다 몬(못)하지. 아이고, 무시라. (행정대집행 때) 경찰도 저~ 고개만대이(정상)에, 부북면서 넘어오는 데 와가있고. 여~ 앞에도 천 명 넘게 깔렸더라. 저 산 아래, 전신에 사람이지, 뭐."
그토록 막고 싶었던 송전탑 아래 선 그가 잠시 그때를 회상한다. 그는 마을 과반수가 송전탑 찬성으로 돌아선 지난 10년을 지나면서도 여전히 '반대'를 외치는 이 중 하나다. 그에게 송전탑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100가구 넘게 넘어간 택이지.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안 되는 기라. 한 동네 살아도 옛날처럼 어울리지를 못해. 말도 잘 안 하고."
윗마을, 아랫마을 모두 합쳐 130가구가 넘는데 이 중 100가구 이상이 송전탑 건설에 찬성했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더 심해지는 소음, 밤새 반짝이는 항공장애표시등이 그의 일상을 흩트려 놓지만, 사실 마음을 더 어지럽히는 건 이렇게 쪼개져버린 마을이다.
"마을이 쪼가리가 났다. 지금도 쪼가리 났어. 서운하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도 있고 본토백이도 있고 그런데. 나는 열일곱에 시집와서 60년 살았거든. 우리야 이제 다 살았는데 자식들이 문제라."
대대로 친인척이 살아온 집성촌이라 해도 송전탑 문제에 연루되면 '남'이 된다. 어릴 적부터 형제자매처럼 자란 친구 사이도 이제는 얼굴 보기 껄끄럽고 불편한 사이다. 송전탑은 그렇게 마을 사람들 사이를 갈랐다.
"문재인이도 대통령 할 적에 이거 없앤다 캤는데(탈핵 정책을 이름) 잘 안 됐고. 윤석열이는 이제 더한 기라. 일본사람캉 지금 오염하는 거(후쿠시마 핵발전소 오염수 해양 방출을 이름) 봐라."
지난 5월 3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실무안은 이처럼 송전탑과의 삶을 치열하게 견뎌내고 있는 이들에게 더욱 '황당한' 이야기다. 핵발전소를 30기까지 늘리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제11차 전기본은 대규모 송전탑 건설을 전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더 많은 지역이 밀양 송전탑 투쟁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
"핵발전소 만들면 송전탑 더 세운다는 거 아니가. 여 마을만 봐도 산 아래 요 돌아가면서 미꾸라지 소금 묻혀놓은 거 한 가진데. 안 괜찮지, 앞으로 우얄라 그라노."
본인은 "이제 다 살았으니 무슨 걱정이 더 있겠냐"면서도 자식들이, 후손들이 살아갈 땅이기에 염려를 놓을 수 없다.
그래도 연대하는 이들이 있어 다시 힘을 낼 수 있다. "6월 8일 전국에서 1000명이 밀양으로 온다"는 소식에 "여~ 까지, 연대하러, 천 명이 온다꼬" 하는 그의 목소리에 금세 웃음과 반가움이 실린다.
"나도 서울, 제주도(강정), 부산(투쟁현장에 연대하러) 그래 마이 가봐서 안다. 밀양에도 저- 전라도 해남, 강원도 저런 데서 옷도 해오고 먹을 것도 해오고 김치도 담아오고 그랬다. 멀리서들 마이 왔다. 이제 다 해다주는 기라, 우리 욕본다고. 그래, 그래가 우리가 살았지."
싸움은 끝난 게 아니지... 평밭마을 한옥순씨 이야기
한옥순(77)씨는 40대 후반에 남편의 요양을 위해 부산에서 평밭마을로 귀촌했다. 명상 관련 교육을 하는 그는 '조용히'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 그가 옷을 벗어던지고 쇠사슬을 몸에 두르게 될 줄은, 귀촌하던 때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내우(내외)가 여를 왜 살러 왔나하면, 우리 아저씨(남편) 몸이 안 좋아서 산 좋고 물 좋은 데로 사람 살리려고 들어온 기라. 근데 이제 이런 철탑이 들어온다 카고, 동네 할매들 싸우러 나가는데 우리라고 가만히 방구석에 앉아있을 수가 없더라고.
지금 하라 카면 그리 못 하지. 우리가 한 3년을 움막(농성장)에서 잤거든, 여 멀쩡한 집 놔두고. 땅굴을 밤새 파고, 용역들이 욕하는 거, 폭력을 다 견디면서... 젊은 사람들도 못 해내는 일을 우리가 했다. 그 3년 동안이 진짜 역사적으로 남을 일이다. 우리가 싸운 거는 우리 마을만이 아니라 온 국민을 위한 거였다."
그때 함께했던 이들 중 3명은 이제 세상을 떠났고, 마을도 조각조각 찢어졌다. 30가구가 거주하는 평밭마을에서 여전히 '반대파'로 남은 가구는 5가구 정도. 개별로 지급되는 보상금뿐 아니라 다른 주민을 찬성으로 '넘어오게' 할 경우 별도의 인센티브(추가금)가 주어지면서 갈등은 더욱 격화됐다. 한전 직원뿐 아니라 밀양시 공무원, 경찰서 관계자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을 "꼬아냈던" 일은, 옥순씨를 아직도 분노케 하는 기억이다.
"마을에 몇 명 넘어오면 얼마를 준다 카고. 시청 공무원들 만날 찾아왔다. 시청, 경찰서, 파출소, 면사무소 뭐 할 거 없이 안 온 놈들이 없다, 우리 꼬으려고. 나는 안 넘어갔는데 다른 집 가서 '그 사람도 넘어왔다' 카면서 또 사람들 꼬아내고. 외지 나가있는 자식들한테도 난리쳤다. 우리 사우(사위)가 경찰인데, 서장이 불러다가 '느그 장인장모 좀 어떻게 해봐라' 카더란다. 그런 식으로 하니, 넘어간 사람들이 많은 기라."
돈이나 친인척 관계를 매개로 한 회유,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압력이 더해지며 끝까지 '반대'를 지키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갈등과 반목이 됐다. 한때 마을 대소사를 함께하며 콩 한 쪽도 나누던 이들이 이제는 길을 가다 마주쳐도 얼굴을 돌리고 눈을 피한다.
"반대파들 때문에 마을이 더 받을 수 있는 돈을 못 받는다"는 욕도 듣는다. 여성 노인이 주축이 됐던 밀양 송전탑 투쟁에서 '밀양 할매'들에게 가해졌던 여성혐오적 발언과 폭언, 욕설도 셀 수 없다. 송전탑 건설을 추진한 국가폭력은 농성장을 짓밟던 그날을 지나 현재까지도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다.
"원망이 있지, 와 없겠노. 우리 죽기 전까지 있겠지... 지금도 저 철탑만 보면은 가슴이 벌렁벌렁하다. 눈만 뜨면 보이는데 맨날 그렇게 사는 거야. 철탑 밑에 소리도 억수로 나거든. 맑은 날에도 바람 쪼께 불었다 하면 소리 나고, 비 오고 그러면 집까지 다 들린다.
그때(행정대집행) 경찰들이 3000명씩 이래 막 안 들어왔나. 그라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겼다. 나는 그게 너무 분하고 억울하다. 우리가 도둑질이라도 했나? 왜 경찰을 보내서, 우리는 정정당당히 싸우는데, 왜 우리 생존권을 강탈해가노? 내가 저기 남미도 가보고 두바이도 가봤는데, 거기 다 가봐도 사람 사는 데 이렇게 큰 철탑 안 세운다. 허허벌판에나 세우지. 저래 큰 거를 마을을 휘감아가지고 세운 데가 또 어데 있노?"
밀양 송전탑 투쟁을 폄하하는 말 중 하나인 "합의금 더 받으려 저런다" 역시 옥순 씨에겐 코웃음이 나오는 소리다.
"돈? 우리 이날 이때까지 합의금 10원 없이도 잘 살았다. 돈이 문제였으면 진작에 집 팔고 나갔겠지. 근데 여기 싸우는 사람들 두고 우리만 살자고 나가면, 그 죄를 우야겠노. 돈 때문에 그런다 카는 소리는 진짜 벼락 맞을 소리다."
옥순씨는 '억울하다'는 말을 몇 번 더 반복했다. 이건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폄하, 오해 때문이 아니다. 그는 우리 정부가 밀양 송전탑 투쟁을 겪고도 탈핵, 재생에너지 정책을 확대하지 못한 데 통탄을 금치 못한다.
"홀딱 다 벗은 몸으로 개 끌리듯 끌려 나가"는 수모를 참으며 싸웠던 것은 자신만을, 마을만을, 밀양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땅을 이어 받아 살아갈 다음 세대를 위한 싸움이었고 미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탈핵"을 외치는 그가 제11차 전기본 소식에 분노하는 이유다.
"풍력이니 태양광이니 다른 나라도 그런 재생에너지(정책) 하잖아. 그런 게 이미 다 있는데도 왜 우리나라는 안 하는데?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철탑 더 세우고 핵발전소 세워서 우짤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저 서울에 핵발전소 세우고 발전기 세워갖고 거~서 전기 만들어 써라."
누군가는 송전탑이 세워졌으니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 한다. 겉으로 보이는 싸움이 없으니 마을이 다시 이전의 평온을 찾은 줄 알기도 한다. 그러나 밀양 송전탑 투쟁은 이렇게 조용히, 여전히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 싸움을 이어가는 밀양 할매 중 한 명인 옥순 씨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덧붙인다.
"우리는 지금도 싸우고 있다. 최선을 다해 싸웠고 지금도 그렇다. 이제 (행정대집행) 10년 됐다고 사람들이 찾아오고 하는 게 참 감사하다. 철탑이 고마 세워졌지만은 우리는 사람을 얻었고, 사람을 남겼다. 이제 죽어도 눈 감고 편히 갈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니 느그도 느그 후손을 위해 싸워야 안 되겠나. 싸움은 끝난 게 아니지. 느그가 있으니까, 느그가 이어받을 거니까."
월간 옥이네 통권 85호 (2024년 7월호)
글 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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