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교육 받으면 독일인이 된다?

<발트3국 이야기> 라트비아의 라트비아인

등록 2001.10.15 00:51수정 2001.10.1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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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라트비아라는 나라의 국명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리가에 대한 말로 라트비아에 대해서 비교적 긴 서두를 시작하긴 했지만, 라트비아를 대표하는 도시로서의 리가와, 그것이 위치한 라트비아라는 나라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외부인들이 건설한 라트비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곳의 원래 주인인 라트비아인들에 대해서 말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전에 말한 바대로 현재 라트비아는 네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동부의 쿠제메(Kurxeme) 남부의 젬갈레(Zemgale), 서부의 비제메(Vidzeme). 그리고 서남부의 라트갈레(Latgale)가 그 네 지역인데, 라트비아라는 말의 lat-는 그 네번째 지역인 라트갈레 지역에 살았던 같은 이름의 민족으로부터 나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중세시대에 고대 슬라브어로 쓰여진 사기에서 라트비아인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거의 라트갈레 지역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고 한다. 하긴 현재 라트비아 지역에 살던 민족이 한두 민족이 아니었던 관계로, 그 지역의 민족을 전부 통틀어 일컬을 만한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고 또 그래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리보니아 사람 다르고, 쿠제메 사람 다르고, 그리고 슬라브나 리투아니아쪽에 가까운 라트갈레 역시 다른 문화권이었으므로, 무역거점지를 건설하기 위해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명목을 가지고 독일이 확장을 시작할 당시, 라트갈레는 다른 리보니아 지역과 비교해볼 때, 지금의 미국과 이슬람국가들처럼 전혀 다른 문화권이었다.

13세기까지 문서에서 발견되는 '라트비아인(latviesi)'이란 단어는 거의 리보니아와 융화가 가장 덜 된 라트갈레인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후에는 일반적인 라트비아인과 라트갈레인들을 공통으로 칭하는 명사가 되다가, 불과 100여 년 전인 19세기 말에 이르러 현재 라트비아 전체를 일컫는 단어로 굳어졌다고 한다.

독특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라트갈레 지방은, 다른 라트비아 지방과도 많은 분쟁을 겪을 정도로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라트갈레와 그 사람들이 다른 라트비아인들과 가졌던 문제와 분쟁에 대해서는 차후에 별도로 다루도록 할 것이다.

'라트-'라는 어간은 또 라틴어의 'latex (축축함, 습기, 물, 강)'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라트비아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바다와의 접경이 많다고 볼 때, 상당히 수긍이 가는 말이다. 그 '라트-'라는 어간을 바탕으로 유럽 여기저기에서 라트비아를 자기식으로 부르고 있는데, 영어에서는 라트비아와 음가가 비슷한 Latvia(라트비아어로는 Latvija로 적는다)로 불리고 있으며 독일에서는 Letland로 불리고 있다.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라트비아에서 거주하는 한 발트독일인의 수기에서 '렛도란도'라는 지명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지역이 어딘지 알아내는데 꽤 골치를 앓았다. 몇 날 며칠의 고민 끝에 발트 지역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한국인 번역가가, 일본식으로 읽힌 독일어
'레트란드'를 그대로 나라이름으로 쓴 것을 알아내고는 혼자서 한참을 웃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남들에게 아무리 그 얘기를 재밌다고 이야기 해주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상당히 썰렁했었다.

독일문화가 라트비아 문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트갈레는 한때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에 소속이 되기도 한 적이 있지만, 라트비아인들은 19세기 말까지 자신의 조국에서 8%도 채 안 되는 발트독일인들의 밑에서 농노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발전을 거듭했던 리가에서 라트비아인들이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발트지역에 정착해 살던 발트독일인이 아니면 제약이 아주 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발트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인 특혜 또한 아주 많아서. 러시아인들이 라트비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때부터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도 발트독일인들은 라트비아인들과 차별된 특별한 혜택을 누리면 살았다.

인접한 리투아니아에는 로마 카톨릭이 종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독일에서 기원한 루터교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정행사가 전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라트비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리 신심이 깊은 민족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에는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도시나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반면, 라트비아는 (리가를 빼고) 도시나 마을 외곽지역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라트비아에서 교회란 그 '독일 지주 나으리님'들의 종교였으므로 농노들이 사는 마을에 그런 교회를 지을 필요가 없었던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의 도시형태는 많이 변화하고 새로이 많이 지어지고 있는 상태에 있으므로 그런 현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민속연구상 기록에 보면 그런 현상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리보니아를 차지하기 위한 국가들 간의 싸움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 리투아니아 등 주변 국가들이 라트비아 영토에서 일으킨 전쟁 등으로 인해, 그 전쟁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던 라트비아인들이 수많이 죽어나가야 했다고 역사의 기록은 전한다.

라트비아 역사상 1.2차 세계대전을 제외하고 가장 큰 피해를 남겼던 전쟁은 1600년에 발발했던 폴란드 스웨덴 전쟁과, 1700년에 발발한 북부대전쟁 등이 있는데, 러시아까지 가세한 이 북부대전쟁의 피해는 리가의 주민들 중 대다수가 죽어나갈 만큼 참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트비아인들 사이에서 '라트비아 사람들도 고등교육을 받으면 독일인이 된다'는 말이 떠돌았던 만큼 교육의 기회도 독일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20세기까지 라트비아에는 고등교육기관이 없어 농민들이 공부를 위해 러시아나 폴란드, 독일 등으로 가는 것을 지원할 만한 상황이 안되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근대 이후 '라트비아인'이라는 말은 무조건 교육을 받지 못한 '농노와 소작인'을 일컫는 것이었다고 한다.

라트비아인들 사이에서도 그 교육받은 '독일인'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라트비아는 아니지만, 독일인들이 점령했던 프러시아 영토내(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의 경우, 일부러 리투아니아인이 아닌 독일인들처럼 보이기 위해 독일어로만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부모들조차 그것을 독일인들의 밑에서 성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이해하여 묵인하곤 했다고 한다.

19세기 중 에스토니아 타르투대학교에서 유학하던 라트비아 학생 '크리샤니스 발데마르스(Krisjanis Valdemars)'는 그런 선입견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자기 방문 앞에 '나는 라트비아인이다'라는 '노골적인(?)' 구절을 붙여놓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발데마르스는 라트비아 최초의 신문을 발간하는 등 라트비아 민족개혁운동의 선각자로 성장하였다.

소련 공화국 시절에도 라트비아인들은 러시아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로 존재해야만 했다. 라트비아어가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고위직 간부가 러시아인들이었던 관계로 공식석상에서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학교에서도 라트비아어에 대한 규제가 상당히 심했다. 다른 공화국들에 비해 생활환경이 월등히 나았던 라트비아에 소련의 고위간부들이 많이 진출하기를 원했고, 그 여파로 현재 아직도 많은 수의 러시아인들의 라트비아에 남아 소련시절의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다.

리가에서 1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라트비아 최대의 해안 휴양도시 유르말(Jurmala)는 한국계 가정에서 태어나 구소련에서 록가수로 이름을 떨친 빅토르 최가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그 곳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곳이다. 그 유르말라는 과거 소련시절 러시아인처럼 부와 명예를 과시하며 사는 '신러시아인(naujais krievs)'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또 유명하다.

라트비아인들이 이들을 흉내낼때 하는 포즈는 흔히 두 손가락을 치켜들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도도하게 걷는 그런 모습인데, 이 신러시아인들은, 아직도 라트비아에 남아 주인행세를 하고자 하는 러시아인들 못지 않게 라트비아인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라트비아인으로서 라트비아에 살면서도 차별과 탄압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라트비아인들은 1991년 자민족의 명칭을 붙힌 국가를 건설했지만, 아직 풀지 못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남아 있다. 그 문제들이 이제 '과거의 역사'로만 남을 수 있을지, 아니면 '앞으로의 역사'로 계속 이어져 진행될지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최소한 그 라트비아인들이 이제 이 땅의 주인이 된 것은 확실하다.

덧붙이는 글 | 발트3국에 관한 필자에 정보방에 들러보세요. http://my.netian.com/~perkunas

덧붙이는 글 발트3국에 관한 필자에 정보방에 들러보세요. http://my.netian.com/~perku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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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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