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이제야 술 한 잔 바칩니다"

[인터뷰] 대전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유가족 전순애·조성환씨

등록 2007.07.27 13:42수정 2007.07.2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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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에서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사진 ⓒ 김영선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과 보도 연맹원 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살해되었다. 끌려간 가족들에 대한 생사조차 모르고 살았던 그들은 눈물과 한으로 얼룩진 세월을 살고 있다. 유가족들은 유해발굴조차 어려워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에게 그저 죄송한 마음 뿐이다.

23일과 25일 두 차례에 걸쳐 전순애(79), 조성환(51) 모자를 만났다. 조씨는 현재 산내 유족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를 대신해 참석하며 잃어버린 할아버지를 그리워한다.

태어나기 한참 전 일이지만 어머니에게서 그 당시의 상황을 전해 듣고 유족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조성환 씨. 그의 어머니인 전순애 씨는 활발한 활동은 못하지만, 위령제 때마다 참석해 고인이 되신 시아버지를 위로 한다.

수감번호 44번, 불안해 하시던 아버지

충남 부여군 세도면에서 좌익 활동을 하던 전순애씨의 시아버지는 해방 직후 자수 기간에 자수를 했다. 그 후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일반적인 생활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음력으로 50년 5월 10일이었어요. 밤에 마루서 다 같이 모여 보리밥을 먹는데 경찰이 와서 시아버지에게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게 화근이었죠."

자수를 한 시아버지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경찰서로 향했다. 하지만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이건 아는 사람한테 나중에 들은 소리지만 출두하라고 하면 도망갈 줄 알고 미리 얘기를 해 준거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모르고…. 자수 했다는 생각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신 거죠."

전씨는 "그 시기만 잘 피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조성환씨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할아버지의 수감번호 얘기를 꺼냈다. 할아버지는 세도면 지서에서 부여경찰서로 이감된 후, 그곳에 한 열흘 정도 있었는데 옷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씨의 아버지가 옷을 가져다주었다.

"옷을 가져다주러 면회를 갔는데 할아버지 수감 번호가 44번이었데요. 하필 44번이라고 너무 불길 하셨답니다.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대전형무소로 가신 모양이에요."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특별한 재판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언젠가는 돌아오겠지"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한참이 지난 후, 대전에 사는 친척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산내서 돌아가신 것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할아버지의 동생뻘 되는 분이셨는데, 대전 방동저수지 부근으로 시집가셨어요. 근처 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논산이라는 글자가 써 있는 트럭에서 사람들이 줄줄이 내리더래요. 날이 더워서 물을 마시게 하려고 했나 봐요. 그 때, 트럭에서 내리는 할아버지를 봤지만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데요. 아는 척 하면 같이 죽을 것 같아서…. 그 차는 대전형무소로 가는 차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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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산내 학살 희생자 유가족 조성환씨. ⓒ 김영선


전순애씨는 시집 와서 딱 한해를 같이 시아버지와 살았다. 여자가 귀한 집안이라 유난히 예쁨을 독차지 했던 전씨다.

"시집 왔는데 절 그렇게 예뻐하시면서 자꾸 말을 붙이셨어요. 그런데 저는 너무 어려워서 대답도 못했죠. 화장 안하면 '화장품 살 돈도 없느냐'면서 장날에 나가 화장품도 사다주시고 하셨던 분이었어요.

유난히 부인 복이 없으셨던 아버님은 첫 번째 부인이 큰 아들이 6살 때 돌아가시고, 두 번째 부인도 돌아가셨데요. 세 번 째 부인은 단 열흘 살았는데 시아버님이 붙잡혀 가면서 개가를 하셨어요."

전씨는 "참 좋은 분"이라고 시아버지를 소개했다. 시골 동네에서 야학 활동을 하면서 인심을 잃지 않았던 시아버지 덕분에 몇몇 동네 사람들은 글을 알았다. 그런 덕분인지 "시아버지가 끌려간 후에도 동네에서 험한 소리 한번 듣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빨갱이다 뭐다 그런 소리 들으면서 힘들게 살았다고 하는데 우리 집은 그런 일이 없었어요. 이 동네에서 똑똑하셔서 인기가 많으셨던 분이세요. 경찰도 알았고. 그래서 집에 경찰이 찾아오지도 않았고요."

딸만 낳으면 모조리 죽어서 집안에 여자가 아무도 없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전씨는 5대 만에 딸을 낳아서 잘 키웠다.

"아버님이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못 보고 돌아가셔서 한이 될 따름입니다."

위령제 때마다 담아 가는 술, 이제 소용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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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산내학살희생자 위령제에서 돌아가신 시아버님께 직접 담근 '동동주'와 '개떡'을 올리고 있는 전순애씨 모자. ⓒ 오마이뉴스 장재완

조성환 씨는 첫 위령제부터 참석했다. 신문을 보다 산내 민간인 학살이라는 기사를 보고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찾아갔던 것이 시작이었다.

"재판도 없이 돌아가신 분들에게 어떤 말로 위로를 할 수 있겠습니까. 발굴 작업이 빨리 끝나 유해 수습해서 제사라도 잘 모셔드려야죠.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유해 발굴 작업이 순조롭지 않다. 이에 대한 생각을 물으니 "땅을 시에서 매입 한다던지 하는 도움이 있어야지 이렇게 난관에 빠지니 답답할 따름"이라며 심경을 토로했다.

위령제 때마다 술을 담아 온다는 전순애씨. 그 이유를 물었다.

"아버님이 살아 계실 적에 유난히 술이랑 개떡을 좋아하셨어요. 누룩이랑 쌀 넣고 술을 담아가지요. 돌아가신 분에게 그렇게 해봐야 아무 소용없지만, 눈도 편하게 못 감으셨을 거 생각 하니 술이라도 바쳐야겠다 싶어서 정성껏 담지요."

술을 담아가서 위령제 때 현장에 있는 기사들에게도 한잔씩 주면 좋아한다며 "앞으로도 계속 술을 담아 갈 것"이라고 했다.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어 마음이 아프다"는 게 전 씨의 말이다.

현재 전순애씨는 시아버지와 살던 집터에 새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시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단 1년뿐이었지만 아직도 옛날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전씨. 다만 정확히 돌아가신 날짜를 몰라 시어머니 제사 때 아버님을 같이 모신다.

"하루 빨리 제사라도 제대로 모셨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렇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며느리를 용서하세요"라며 시아버지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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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희생된 시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전순애(79)씨 ⓒ 김영선

#대전 산내 학살 #조성환 #전순애 #보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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