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인터뷰] 대전 산내 학살 사건 희생자 유가족 여태구씨

등록 2007.08.23 17:17수정 2007.08.23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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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사건이 발생한지 57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차원의 유해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산내 골령골은 1950년 7월 초부터 중순 경까지 국군과 경찰에 의해 적게는 3000명에서는 최고 7000여명의 민간인이 집단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사건 희생자들의 유가족을 찾아 사건 기억과 지난한 삶의 여정을 들어 연재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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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 학살 사건 희생자 유가족 여태구(59)씨 ⓒ 김영선


1950년 산내 골령골에서는 수도 없는 총성이 울렸다. 희생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 땅에 그대로 엎어져 생을 마감했다. 이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아온 유가족들은 내 아버지, 내 친 형제를 잃은 슬픔도 잠시, 기구한 삶의 운명에 맞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힘없이 약한 그들에게 이 세상은 버거운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야 그들의 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서글퍼지는 것이 사실이다.

수소문을 해서 찾아간 유가족은 대전 서구 월평동에 살고 있는 여태구(59)씨다. 그의 기억 속에 아버지의 얼굴은 없었다.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아버지

"사진도 없습니다. 도망 나오기 바빴데요. 차라리 사진이라도 있었으면 아버지 얼굴이라도 알게요."

그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들은 것이 전부"라고 했다. 언제 끌려갔는지, 무슨 이유로 아버지를 잃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세 살 이었다.

"들은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특별한 활동을 한 것도 없으셨고, 어떤 모임에 한번 왔다갔다는 이유로 새벽에 자다가 끌려 가셨데요. 그 모임이 무슨 모임인지는 모르지만 새벽에 자고 있는데 친구 2명이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경찰이 있었답니다. 잠옷 바람으로 나가셨다는데요."

그는 아버지가 끌려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큰집 사촌이 당시 여운형(독립운동가)의 비서와 연관되어 있어 그것이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들과 생이별을 한 그의 할머니는 아버지가 있는 대전형무소에 2~3회 정도 면회를 갔었다.

"할머니가 면회를 갔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 저는 자유로워요, 죄수들에게 밥 주는 일을 하고 있고 심심하지 않아서 좋아요'라며 할머니를 안심시키더래요. 그래서 그런 줄만 알고 계셨데요."

죄수의 신분으로 형무소 안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죄명이 가벼운 사람에게만 주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죄명에 관계없이 무자비한 학살은 자행되었다. 그의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면회를 간 날의 일이다.

"아버지가 형무소 안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할머니에게 '어머니, 제가 죽을 것 같으니 이것이 마지막 면회가 될 것 같아요'라며 '제 바지 한쪽을 찢어 놓을 테니 나중에 제 시체를 찾아 주세요'라고 말했데요."

그것이 마지막 이었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형무소 사람들이 총살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 어린 그를 업고 골령골로 갔지만 실신해 버렸다.

"바지를 찢어 놨으니 시체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셨지만 온통 땅에 피가 범벅되어 있었고 손으로 몇 번 뒤적이니 알아 볼 수 없는 시체들이 말도 못하게 있었답니다. 더 이상은 그 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 그 길로 저랑 누나를 데리고 다른 동네로 이사 했데요."

당시 그의 어머니 나이는 23살이었다. 할머니는 자식을 잃은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고향을 떠난 그의 가족은 이모네 집 등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야만 했다.

"어머니는 남은 우리 모두가 죽을 까봐 무서웠던 거죠. 그러다 재혼을 하셨는데 재혼의 조건이 저희를 교육 시켜주는 것이었데요."

끝까지 자식들을 위해 살았던 어머니다. 하지만 애초의 계획과는 다르게 그는 전혀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여씨의 한으로 남았다.

살면서 연좌제로 인해 어디를 가나 신원조회를 받아야만 했고, 애써 일군 사업도 한 순간에 무너져버렸다. 여씨의 집안은 남부러울 것 없이 부유했지만, 아버지를 잃고 도망 나오면서 아무 것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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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 학살 사건 희생자 위령제에서 헌화하고 있는 내빈들 ⓒ 오마이뉴스 장재완


그렇게 살아온 그가 위령제에 참석한 것은 2년 전의 일이다.

"뉴스를 보는데 김원웅 의원이 나와서 산내에 대한 얘기를 하더라고요. 114로 전화해서 김 의원 사무실로 전화했더니 유족 회장님 번호를 알려줘서 참석하게 되었어요."

처음에 다른 유족들을 만났을 당시 어땠냐는 질문에 그는 "눈물이 너무 나오고, 이제껏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아서 반가웠다"고 말했다.

"지금 발굴 작업 하는 장소도 가보면 마음이 울적하고‥설움이 복받칩니다. 모르고 지나다니던 길에 내 아버지가 묻혀있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잖아요."

이어 그는 정부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우리 아버지는 벌금형도 안 되는 죄 아닙니까. 아무런 일이 없었으니 말이에요. 이에 대한 책임은 국가한테 있는 겁니다. 간첩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총살 했는지 정말 이해가 안갑니다."

현재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발굴의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를 밝히는 일이 중요하죠. 현재 정치인들 중 과거 친일파 후손도 얼마나 많습니까. 과거를 밝히는 일을 하자면 그들의 과거마저 드러날 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이 더뎌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는 마지막 바람이 "발굴된 유해를 한 곳에 모셔놓고 이제라도 편안히 쉬시게 하고 싶다"고 말해 모든 유가족들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쓰신 토지 계약서를 본 적밖에 없다는 여태구씨. 그것이 아버지의 흔적, 전부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미남이었데요. 계약서를 보니 필체도 너무 좋으시더라고요. 안타깝기만 합니다. 마음속에만 아버지 얼굴을 그리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는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집과 골령골이 멀지 않아 발굴 현장에 자주 가본다"는 그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대전 산내 학살 #여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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